석조물

【 조종저(趙宗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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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694회 작성일 2015-04-2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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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趙公宗著興學碑(부사조공종저흥학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숙종 원년(1675년) 8월 ~ 숙종 2년(1676년) 11월 [1년3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132cm, 너비 52cm, 두께 20cm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 향교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 향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 향교 앞의 조종저(趙宗著,1631∼1690년)비는 양양부사로 재직 중 교육에 치중하고 교풍을 진흥시켜 우수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흥학비와 아울러 선정비도 세워졌다고 한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취숙(聚叔), 호는 간재(艮齋)·남악(南岳)이다.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중려(重呂)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신경진(申景珍)의 딸이다.
  현종 1년(1660년) 성균관에 입학, 문명을 날렸으며, 그곳 유생들을 대표하여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등의 상소문을 찬(撰)하였다. 1667년에는 제주도에 표착한 중국인 95명을 청나라에 압송하는 문제로 조정에서 논의가 일자 압송을 반대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1669년 동몽교관(童蒙敎官)이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귀향, 1672년 다시 복직하였다가 그해 겨울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갔다.
  헌종 14년(1673년) 성균관 전적(典籍)에 승진하고, 이어 병조좌랑(兵曹佐郞)ㆍ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등을 거쳐 문학 겸 지제교에 승진하였으며, 1674년 사간원 정언(正言), 숙종 즉위년(1674년) 사헌부 지평(持平)ㆍ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가, 숙종 원년(1675년) 8월 2일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제수되었다. 숙종 2년(1676년) 11월 16일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제수받고 이임하셨다.
  1677년부터 1686년까지 성균관 사예(司藝)ㆍ사헌부 헌납(獻納)ㆍ성균관 사성(司成)ㆍ사헌부 장령(掌令)ㆍ사헌부 집의(執義)ㆍ사간원 사간(司諫)을 역임하고 1687년 회양부사에 임명된 후 숙종 14년 (1688년) 3월 16일 조정에 상소를 올려 기근(饑饉)과 여역(癘疫)으로 죽는 읍민(邑民)이 많다고 상소(上疏)하여 봄 세금을 감(減)하여 줄 것을 청하고, 진휼창(賑恤倉)의 쌀로 구제(救濟)할 것을 원하니, 임금이 허가하고, 인하여 철원(鐵原)·김화(金化)·안협(安峽) 등의 읍(邑)에 쌀 각각 3백 석(石)을 하사(下賜)하였다. 라는 왕조실록 기록과 같이, 때마침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의 구휼(救恤)에 힘쓰는 등 치적을 쌓았다.

  숙종 14년(1688년 戊辰) 3월 16일 1번째 기사
○己丑/淮陽府使趙宗著, 以邑民饑疫死者多, 上疏請減春稅, 乞得賑倉米濟之。 上許之, 仍賜鐵原、金化、安峽等邑米各三百石。

  1689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자(陞資)되는 등 조정에서 포상이 내려졌으나, 이이ㆍ성혼이 문묘에서 출향(黜享)되자 병을 핑계로 등청하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나 장유(張維)ㆍ이식(李植)에 비유되었다. 또한 역사에 밝았고, 천문ㆍ역수ㆍ의약에도 통달하였다. 저서로 『남악집(南岳集)』․『간재신사(艮齋新笥)』등이 있다.


參考文獻

 『현종실록』, 『숙종실록』, 『승정원일기』, 『국조인물고』,
 『양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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