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조학연(趙鶴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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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1,737회 작성일 15-04-2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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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觀察使趙公鶴年善政碑(관찰사조공학연선정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헌종 9년(1843년) 1월 ~ 헌종 10년(1844년) 12월 [11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174cm,너비65cm,두께24cm / 갓 높42, 너70, 두33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시변리 구 7번 국도 도로변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시변리 구 7번 국도 도로변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시변리의 조학연(趙鶴年,1786∼1854년)관찰사 비는 강원도관찰사로 재임기간 중 민의를 살피는 가운데 특히 환곡의 폐해를 줄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1834년 1월부터 1844년 12월까지 위의 관찰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를 세웠다.
  본관 풍양(豊壤), 자 화중(花仲),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순조 19년(1819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몽교관(童蒙敎官)과 세마(洗馬)를 지냈다. 1828년 화성유생(華城儒生) 응제시(應製試)에서 뽑혔고, 교관(敎官)으로서 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전적(典籍)ㆍ지평(持平)ㆍ정언(正言) 등을 역임하고, 1832년 태천현감(泰川縣監)으로 나갔다가 1835년 부교리(副校理)ㆍ예조참의(禮曺參議)를 지내고 같은 해 부사과(副司果)로 진하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6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37년 정주목사(定州牧使)로 나갔다가 1839년 다시 동부승지로 기용되고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처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842년 부제학(副堤學)ㆍ우윤(右尹)을 지낸 후 헌종 9년 (1843년) 1월 3일 강원도관찰사로 재수 받고 재임하였다가, 헌종 10년(1844년) 12월 10일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이임한 후 이듬해 공조참판(工曹參判)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승차[陞差:한 관청 안에서 윗자리의 벼슬로 올라감]하였다.
  1846년부터 평안감사(平安監司)ㆍ대사헌(大司憲)ㆍ이조판서(吏曹判書)ㆍ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두루 역임하고, 철종 즉위년(1850년)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서 우참찬(右參贊)으로 재직 중 지실록청사(知實錄廳事)가 되어 『헌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같은 해 12월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철종 2년(1851년) 관직이 종1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1843년 1월부터 1844년 12월까지 강원도관찰사로 재직한 趙公의 碑에 '조찰민은 교구환폐 (照察民隱 矯捄還弊)'의 글귀로 보아 각종 민의(民意)를 살피는 가운데 특히 환곡(還穀)의 폐해를 줄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參考文獻

『헌종실록』, 『승정원일기』, 『국조방목』, 『경기도사인물지』,
『강원도사』, 『양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關聯金石文

 觀察使趙公鶴年善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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