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9) 안축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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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619회 작성일 2015-04-2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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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강현면 전진리 낙산사 의상관 서쪽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 5월에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로 임명된 안축[安軸: 충렬왕 8년(1282년 ~ 충목왕 4년(1348년)]은 당시 양양지방을 순방하면서 산수가 수려하고 풍광이 뛰어난 이 지역에서 100여년이 지나도록 인재가 나오지 않음은 변방에 인접하여 변란이 자주 일어나 학교가 재건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마침 이 지방의 향로(鄕老)들에게 물어보니 구읍(舊邑) 북쪽에 예로부터 구학(舊學)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구교리에 향교 설치를 명하였다고 한다.
  고려 때 문신인 유자량[유資諒: 의종4년(1150년)~고종16년(1229년)]이 명종 27년(1197년) 병마사로 부임한 그 해 10월 낙산사 관음굴에서 분향재배할 때 청조(靑鳥)가 꽃을 물어 두건(頭巾)에 떨어뜨리고 가자 이는 세상에 드문 일 이라하였다.
  이 비(碑)는 당시 유자량이 낙산사에서 지은 시(詩)를 그로부터 약 133년이 지나서 안축 강릉도존무사[재임기간: 1330년 5월~1331년 9월]가 여러 고을을 순회하던 중, 낙산사에 머물며 유자량의 詩文의 봉(峯), 봉(封), 봉(逢), 용(容) 자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가 새겨져있는데, 앞서 유자량(유資諒)이 지은 시와, 안축(安軸)이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유資諒의 詩 : 1197년 10월】
 海崖高絶處(해애고절처) 바다 벼랑 지극히 높은 곳
 中有洛迦峯(중유낙가봉) 그 가운데 낙가봉이 있다.
 大聖住無住(대성주무주) 큰 성인은 머물러도 머문 것이 아니고
 普門封無封(보문봉무봉) 넓은 문은 봉해도 봉한 것이 아니로다.
 明珠非我欲(명주비아욕) 명주는 내가 욕심내는 것이 아니며
 靑鳥是人逢(청조시인봉) 청조는 이 사람이 만나보려는 것일세.
 但願洪波上(단원홍파상) 다만 원하는 것은 큰 물결 위에서
 親瞻滿月容(친첨만월용) 친히 만월 같은 모습 뵈옵는 것을.

 

【安軸의 차운(次韻) 詩 : 1330년】
 大聖圓通境(대성원통경) 관세음보살의 원통한 경지를
 曾聞海上峰(증문해상봉) 바다 위섬에서 일찍이 들었네.
 恩同甘露潤(은동감로윤) 은혜는 감로처럼 윤택하니
 香有紫泥封(향유자니봉) 임금님도 자니 봉향을 하사하셨네.
 隨類身常現(수류신상현) 우리 절에 상주하는 관음진신을
 纏迷眼不逢(전미안불봉) 미혹한눈으로는 만날 수 없다네.
 草論진與假(초론진여가) 진실 일까 거짓 일까 따지지 말고
 但自禮慈容(단자예자용) 자비로운 저 모습에 예배를 하게나.

 

안축[安軸] : 충렬왕 8년(1282년 ~ 충목왕 4년(1348년)
고려 말 문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근재(謹齋), 자는 당지(當之), 시호는 문정(文貞) 이다. 충숙왕 11년(1324년) 원나라 제과(制科)에서도 급제하였지만 벼슬을 사양하기도 하였으며, 고려로 돌아와 여러 관직을 거쳐 1330년 5월부터 1331년 9월까지 강릉도존무사를 기낸 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정2품 관직인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에 이르렀다.
문집으로 관동별곡, 죽계별곡, 관동와주가 있고 저서로 근재집이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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