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3) 선림원지홍각선사비(禪林院址弘覺禪師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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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00회 작성일 2015-04-2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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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면 황이리


  선림원지홍각선사비는 본래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의 선림원(또는 사림사)터에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비신이 깨져 현재 일부만이 전한다. 비신의 오른쪽 상단 부분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비편 조각 일부를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탁본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다. 홍각선사(弘覺禪師)는 봉림산문(鳳林山門) 소속으로 속성이 김씨이다.
  선사는 헌덕왕 2년(810년) 무렵 경주에서 출생하여 17세에 출가하고, 해인사와 영암사에서 수학하다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법을 배웠다. 귀국하여 왕실과 접촉하여 왕궁에서 10일 동안 설법하기도 하였으며, 헌강왕 6년(880년)에 입적하였다.
  비는 제자들의 건의에 따라 정강왕 1년(886년) 10월에 선림원(禪林院)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수병부랑중(守兵部郞中) 김원(金遠)이 지었다. 김원(金遠)은 이전에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의 글씨를 쓴 바 있어 문장과 글씨에 능통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신라 하대 선종사상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參考事項》
  신라 설악산 선린원 홍각선사비는 예전 양양의 사림사에 있었다. 병부랑중 김원(金遠)이 글을 짓고, 중 운철(雲徹)이 晉나라 우장군 왕희지의 글을 모아 앞면에 쓰고, 거성현령(車城縣令) 최형(崔夐)은 전액(篆額)을 썼다. 지지(地志)를 살펴보건대 그 탁본으로 이곳 사람은 고통스러웠다. 연이은 들불로 비석은 깨뜨려졌다.
  부사 안경운[安慶運: 재임기간(1744~1747년)이 알고서 남은 조각들을 수습하여 모두 창고에 간직했다. 내가 1766년(丙戌) 가을에 순시하러 양양부에 들러 찾아보니 창고지기는 잃었다 한다. 늙은 관리에게 물으니 기록에는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창고에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내가 창고에서 비록 잃었으니 기록에 있는 대로  모아야 되지 않겠나하니, 젊은 관리가 모두 구하는 것은 이로울 것이 없다하며 읍 향교의 집 담장의 밑 지대석으로 썼다하니 무릇 심히 이상하게 의혹이 간다.
  이에 빨리 들어 올려 오라 명하여 가져온 이끼흔적을 씻은 것을 보니 과연 그렇구나. 한자 되나만한 돌로 전수 밑의 1조각이다.  글자는 460여 자이고 글자의 점획이 팔팔 뛰려는 것같고 삼장(三藏)의 서문과 서로 비슷하여 낫고 못함이 없다. 이 비는 승안각 김대안이 지은 인각(경상도 의흥 麟角寺)에 있는 것보다 근100년 전에 지은 것이며, 인각사비은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또한 무장사비(경주 무藏寺碑)와 상하가 서로 같다.
  아! 왕희지의 글자의 자취여! 우리나라(華東)는 말할 것 없이 많지 않다. 이는 어찌 송나라의 계첩과 다르며, 더부룩한 깃털 같이 조각나 나머지도 위태로우니 적게나마 보물로 고쳐지기를. 그러나 산사람의 불로 산도, 비에 새긴 것도 타 이 글도 함께 재앙을 입었으니 이는 가히 아깝도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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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關聯金石文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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