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4. 6·25한국전쟁 및 군정 체험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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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454회 작성일 2016-03-2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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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25한국전쟁 및 군정 체험수기

 

■ 전 양양군재향군인회회장 최지훈(崔祉勳, 8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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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4월 인민군들이 소련제탱크와말이대포를끌고집결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나는 양양고급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양양은 38°선 이북으로 인공(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치하에 있었으며, 인민군3대대와4대대가주둔하고있었다. 그해4월부터양양에소련제탱크와말 이끄는대포를앞세우고인민군들이속속들이집결하기시작하였다.
6월25일새벽, 여명이채가시기도전에북한에서는남침을강행하였고한국 전쟁이발발하였다. 아무런대비가없던남한정부에서는속수무책으로당할수 밖에 없었고,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남한 전역을 완전 함 락할기세였을때였다.


* 1950년 추석무렵 광업소, 현북중, 양양중학교를 미군기가 포격을 했다.


9월중순경, 함종악선생님[수복후양양국민학교장역임]이수업이끝난보도 시간에 놀라운 말씀을 했는데, 미군과 국방군이 인천에 상륙을 하는 것을 우리 인민군전사들이모두격퇴시켰다는것이다.
며칠동안이나그말씀을반복하였고학생들도수군수군대던그이야기는지 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소식을 우회적으로 말씀해주신 것같다.
며칠 뒤 B29 폭격기가 양양광업소 뒷산에 폭탄 15발을 투하하였고, 9월 26일 (음 8월 15일) 추석이 되었는데, 오전 수업 중에 현북중학교를 폭격하여 20여명 의사상자가발생하자관내학교들은모두휴교령이내려졌다.
휴교 중에 서면 수리의 외가에 가 있을 때 10월 1일 국군에 의해 양양이 수복 되었으므로 10월 2일 집에 내려와 학교에 가 보았더니 2층은 폭격으로 파괴되 었고중학교는소화탄폭격으로잿더미가되어있었다.


* 시내는 포사격권내여서 남대천을 건너 월리까지 피란지시가 내려졌다.


양양을 수복한 국군은 거리에 넘쳐났고 헌병들이 오고가는 군용트럭들을 교통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생전 처음으로 흑인을 직접 보았다. 인공치하에 있던양양이수복되자10월10일경, 학생들도학도호국단을결성하고헌병들과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바뀌고하루아침에전방에서후퇴하여다시양양에모이게되었다.
12월 27일경, 수도사단 북진 때 헌병을 따라갔던 정병화가 나를 찾아왔다. 전 황을 물었더니 국군이 몰리고 있으니 피난 갈 준비를 하라고 말해주었다. 며칠 후시내는포사격권내에있으니남대천을건너적어도월리까지만피하라는지 시가내려졌다.
우리 식구는 쌀과 고추장 이불 등을 우차에 싣고서 30일, 월리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남쪽으로 피난하라는 지시에 따라 왕도리, 여운포리를 지나 현남 남 애리에 도착했는데, 북쪽하늘을 쳐다보니 검은 연기가 시커멓게 솟아올랐다.
뒤에오는피난민들에게물으니군인들이민가를모두태워버렸다고하는데그때가1951년1월2일경으로기억된다.


* 부친대신내가 학생모를 쓰고 우차를 끌었다.


그 후 우리가족은 강릉, 삼척을 가다 쉬어가며 20여일을 우차를 끌고 호산에 도착하여여장을풀었다. 얼마지나호산국민학교에주둔해있던군인들이찾아 와 우차로 산에 나무를 실으러 가자고 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전방에 부역으로 끌려갈염려가있어내가대신학생모를쓰고우차를끌었다.
군인들의 취사용 화목을 운반해준 덕에 국군이 밥과 부식 때로는 쌀도 주어 우리 식구는 그나마 식량 걱정 없이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 부분의 38°선 이북 주민들은 남한 돈 한 푼 없이 피난길을 떠났으므로 먹고 살길이없어많은사람들은문전걸식으로살아야했다.
그 후 3월 말경, 양양의 북쪽까지 국군이 진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오기위해 호산을 출발하여 4월경, 강릉에 도착하여 8·15해방 후 월남하여 강 릉에 살던 문재호씨 댁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 헌병대에 근무하는 정병 화가날찾아왔다.


* 밀기울에 산나물을 섞어먹다가 풀독에 몸이 부어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 친구의 얘기는 민간인은 38°선 이북의 통행을 전면 금지 시킨다는 것이고, 양양은 모두 타버렸으며 우리 집도 잿더미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친구정병화가사주는자장면을처음으로 맛보았다. 5월 중순경, 38°선 통행이 풀려 집에 돌아와보니정말우리집은잿더미가되었고모든생활은곤궁하기그지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장티푸스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고통을 겪을 때,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이 대민진료와 예방접종 등 방역활동을 하였으며, 전후방 교대로 사단병력이 주둔함으로 이곳 주민들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많은사람들은식량이없어초근목피로살아가야할형편이었으며, 밀기울에 산나물을 섞어 먹다 풀독이 올라 얼굴과 몸이 부어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복지구의이곳주민들에게는혹독한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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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방역활동중인 모습>


* 최전방 GOP고지까지 올라가 위문공연을 하면서 러시아댄스를 추었다.


나는거처를마련하려고아버지와토담집을짓고있던어느날, 군한청(한국 청년단)에 근무하는 정병화가 감찰부장 김여수 명의로 된 호출장을 갖고 날 찾아왔다. 나는정병화와함께당시불에타지않았던마을인손양면학포리박증길씨집을사무실로쓰고있던군한청에갔더니, 전쟁전고급중학교의김명환 국어선생님이계셨다.
당시 군 한청단장은 최찬오, 부단장이 최성호, 감찰부장이 김여수, 선전부장은김명환이었는데김명환선생님께서는6·25사변1주년을기념해서제1군단 의지시로위문단을조직하는데협조하라는말이었다.
1947년 초급중학교 2학년시절이던 나는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사용하던 군표 화폐[戰時나占領地에서군대에서필요한물품을구입할때사용하는긴급통화] 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화폐로교환하면서주민계몽활동을위해중학교에 연예부를 만들었을 때, 댄스부에 들어가 김운봉 선생님께 소련병사 춤을 배웠 다.
후일김운봉선생님은서북청년단조직사건으로고재철, 안재성, 김주철등과 수감되기도했으며, 그때음악부지도는안진혁일명안딩글선생이었다.
위문단원은약30여명정도로나와김기선은여학생들과함께팀을만들어러 시아 댄스를 추었다. 우리는 군악대와 함께 제1군단 사령부에서 공연을 시작하여 전방, 수도사단, 3사단, 11사단 등 최전방 GOP [일반전초 : 남방한계선 철책선의소대단위초소] 고지에도올라가위문했으며, 8월15일경공연을끝냈다.


* 양양남대천에서 황어를 잡으려고 깡을터지다 치안대원에게 얻어맞았다.


1952년 봄, 양양 남대천에 황어가 많이 올라오자 친구들과 함께 TNT[속칭 깡이라고 했음]를 터뜨려 고기잡이를 하던 중, 치안대원에게 붙잡혀 같이 잡던 친구들 모두 무척 많이 얻어맞았다. 악질적으로 우리를 때리던 치안대원에 대한 복수심이 발동한 나는 그 후에 8240 미 극동사령부 스케논부대[속칭 낙하산부대]에입대하였다.
매일고된낙하산훈련과해상침투등유격훈련을받던어느날아버지가면회를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화폐교환[1953년 2월 조선은행권‘원’에서 한국은행권‘환’으로100:1로인당2,000환으로한정교환한제도]으로생활에어려움을 겪고있다고하시면서, 군생활을그만두고집으로가자고하였다. 나는그무렵 적지로출동대기중이였으므로그럴수없다고하니아버지는그냥집으로가셨다.


* 미극 동사령부 낙하산부대 근무경력이 인정되지않아 한국군에 입대했다.


그 후에도 힘든 훈련을 계속 받았고 전선으로 출동할 날만을 기다렸을 무렵, 1953년 7월 27일 갑자기 휴전이 됐다는 것이었다. 휴전 후 8240 예하부대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우리 부대에서 양양고등학교 축구선수들을 데리고 왔다는 말이있어찾아봤더니최선문과김남한외여러친구들이왔었다.
그해1953년4월, 양양고등학교가신설되어양양에서속초고등학교를다니던 정범화, 김남한, 신정섭, 김명호, 이우균, 이도형, 안학선 등이 양양으로 전학하여최선문, 이구행, 정병화, 장성온 등과함께 양양고등학교를 다닌다는 얘기를 친구들로부터듣고나는그들을너무부러워했다.
1953년12월중순경, 부대에서2박3일의외박을허가받고집으로돌아왔는데 부모님의만류로귀대를하지않았다.
그후1954년에양양고등학교에입학하여1957년양양고등학교3회졸업생으로졸업하였다. 그당시정부에서는특수부대생활을공적으로인정하지않았으므로 나는 1957년 9월, 다시 한국군에 입대하여 1960년 5월 만기제대로 병역을 필했으며, 6·25 참전과함께이중의군생활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