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3. 6 ·25한국전쟁사와 군정 시 체험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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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664회 작성일 2016-03-2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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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 ·25한국전쟁사와 군정 시 체험수기

■ 전 강현면총무계장 장영철(張英哲, 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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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향은 원산 철산리


우리가 산 곳은 원산시내 철산리 마을 이였다 . 때는 겨울철이다 . 방안은 난방 장치가 잘 안되어서 인지 땔감이 부족해서 인지는 몰라도 몹시 춥게 지냈던 것으로 생각난다 . 우리 집 옆에는 소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

목탄 자동차에 살림을 실고 아침 일찍 원산을 출발하여 금화로 이동하는데 밤이 깊어서야 금화에 도착 하였다 . 가는 동안 몇 차례 숯을 사서 차량운행 연료로 사용하였고 몇 번이고 차량이 고장이 나서 가는 도중에 고생이 많았다 . 그 시절에는 목탄으로 운행하는 목탄차가 있었고 그나마도 극히 적은 대수에 차량 고장이 자주 있었다 .

나는 이곳에서 처음 인민학교에 입학하였다 . 우리 집에는 가끔 손님이 찾아왔다 알고 보니 나의 여섯째 할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와는 4 촌 형제지간인 장성준으로 당시 김일성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 금화에서의 생활이 2 년이 되기도 전에 다시 원산으로 이사 온다 . 그때는 경원선 열차를 이용 하였을 것이다 .

아버지는 원산 무역소 소장으로 우리 집은 원산시 충성리에 과거 일본인이 살던 일식 주택으로 다다미방이었다 . 일본식 다다미방은 두껍고 단단한 매트리스식 방바닥 자리로 바닥의 찬기를 없애고 위풍은 작은 난로로 추운겨울을 지내는 방법 이였다 .

집에서 북쪽으로 약 200 m에는 송도 해수욕장으로 가는 언덕길에는 오래된 벗 나무 가로수가 봄이면 벚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 그 옆에 도당 청사가 있었고 원산에서는 지위가 높으신 분들이 근무하는 관청이었다 . 우리 집에서 서쪽으로 약 200 m거리에는 원산에서는 가장 큰 적십자 병원이 있었고 주변 도로는 아스콘 포장도로로 원산 중심가 같다 . 나는 4 촌 석준 형이 양양에서 원산에와 공업전문학교에 다니는데 기숙사에 놀러가기도 하고 송도 해수욕장에도 가 본 적이 있다 .

나는 원산 13 인민학교 2 학년 양자 누나는 4 학년일 것이다 .

가끔씩 누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우리 집에 모여서 공부 하는 것을 보았다 . 언젠가는 5-6 명 정도의 학생이 우리 집에 모여서 자습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마지막 시간에 동료 학생 1 명을 앞에 놓고 다른 학생들이 지난날의 잘못한 행위와 학

교 소년단의 규범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에 대하여 엄하게 질책하며 공세를 하여 그 학생은 질책에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보았다 . 이것이 소위 말하는 학생 자아비판인 것이다 .

당시 북한은 공산주의에 대한 사상 교육이 철저했고 지도자와 국가에 대한 충 성심을 자율적으로 고취시켰고 인민 학교에서는 소년단이라는 조직에 학교는 물론 사상적 교육이 철저하였다 .

이에 불응하는 이탈자에 대해서는 자아비판이라는 공개비판으로 지금 말하는 왕따를 시킨 것이다 . 그래서 북한은 모든 조직이 일사불란하고 집단 체제화 하고 불만을 사전에 차단하는 정책에 불편 불만이 표현될 수가 없다 .

모든 생물체는 먹이를 주는 자에게는 복종하게 마련이다 . 당시 북한은 모든 일을 집단체제화 하고 식량은 국가가 주는 배급제도와 사상과 성분을 중요시하는 정책으로 조직과 충성심을 강화하고 도둑 폭력범죄 사고 같은 기사는 잘 알리지 않는다 .

* 전쟁의 발발

1950 년 경인년 6 월은 가뭄으로 무더운 날씨가 계속 되었다 . 6 월 25 일 새벽 4 시에 38 °선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다 . 전쟁이 일어나기 전 북한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남한을 안심 시켰다 .

북한 땅의 소련군을 철수 시키고 남한의 미군을 철수 시키라고 하면서 한반도의 자주 평화를 부르짖으며 비밀리에 전쟁 준비를 하였다 .

남쪽에서는 북한의 전쟁준비 가능성의 정보를 일부수집 했으나 짧은 기간 비상체제를 하였을 뿐 군부에서는 만일 북한이 남침하면 국군은 총공세로 북침하여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 대 전과를 올릴 것이다 라고 하며 호언장담하여 북한이 비웃음을 하게 하였다 . 비상이 해제되고 군인은 태평하게 장병들을 모내기 휴가 보내고 장교들은 토요일 외출이 많았다 . 채병덕 육군참 모총장 이하 군 고위 간부들은 6 월 24 일 저녁에 육군회관 낙성식 파티로 술에 취해 저녁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날 새벽 전쟁발발 비상벨에 잠이 깨어 났을 정도였다 .

북쪽에서는 인민의 사상교육 결속과 훈련된 군인으로 남침을 계획하고 , 북한군은 탱크 240 여대 전투기 170 여대 병력 20 여만으로‘폭풍’이라는 공격명령으로 개성 , 전곡 , 포천 , 춘천 , 양양지역에서 분산하여 38 °선 전역에 전쟁선전 포고도 없이 남침하였다 . 남쪽에는 탱크 , 전투기도 전무하고 훈련용 연습기 20 여대만 있을 뿐 무기력한 군인과 정치는 민주정권 수립으로 계파간의 사상과 정치 사욕 갈등으로 남한 혼자 남침을 대처하기에는 너무나도 약한 모습으로 남한 땅을 빼앗기는 불미스러운 당시의 현실이었다 .

전쟁이 일어나고 80 여일 만에 낙동강 하구를 경계로 대구 , 포항 , 부산을 제외하고는 남한 땅 전부를 북한이 점령하였고 그나마도 유엔의 도움으로 방어선을 지탱했으며 , 1950 년 9 월 15 일 유엔군이 비밀리에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으로 맞이하였다 .

전쟁이 일어나도 원산 시내에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시민들의 모습이나 시가지의 거리에서는 전쟁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였다 .

그저 거리의 게시판에 한국 지도를 붙여놓고 시민들이 모여서 구경할 따름이었다 . 지도에는 전쟁 후 3 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며칠 후에는 대전까지 또 몇 일후에는 전주 광주로 하더니 낙동강까지 화살 표시로 전쟁의 성과만 시민들에게 알리고 시민들은 매일같이 남한이 거의 점령되어 곧 통일이 될 것이라면서 모여서 서로 대화하는 모습만 보았다 . 나는 그때 9 살 이였다 .

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른다 . 곧 통일이 될 것처럼 술렁이던 시민들이 두세 달 후에는 전승 지도도 없어지고 통일에 대한 이야기도 점점 사라지는 것 이다 . 마침내 전쟁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 9 월 초경 인 것 같다 .

남쪽 비행기가 원산 상공을 자주 날면서 원산시에 대한 폭격이 시작된 것이 다 . 어른들은 사전에 알았겠지만 나는 이제 전쟁이 일어난 것 같았다 . 후에 안 일이지만 유엔군이 한국을 지원하여 미국 비행기가 제공권을 장악하고 9 월 15 일인천상륙과 9 월 28 일 서울을 탄환하고 북진하는 것이었다 . 유엔은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인한 한국의 위기를 돕기 위하여 긴급 안전보장 이사회를 열어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각국이 (16 개국 ) 한국전에 전투병인 지상군 해군 공군 등 을 파병하기로 한 것이다 .

이들 나라는 미국 , 영국 , 오스트레일리아 , 캐나다 , 네덜란드 , 뉴질랜드 , 프랑스 , 터키 , 필리핀 , 태국 , 그리스 , 남아공 , 에티오피아 , 콜롬비아 , 벨기에 , 룩셈부르크 들이며 , 또 5 개국인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이탈리아 , 인도의 나라들이 의료품을 지원하므로 21 개국이 우리를 도왔다 .

1950 년 10 월 1 일 한국 3 사단 백골부대의 선봉으로 동해안 기사문리 38 °선을 제일먼저 탄환으로 전 지역에서 북진을 계속 하였다 . 원산 시내의 폭격은 하루 에도 그 횟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주요 건물과 공장에 매일같이 화염이 싸이게 하였다 . 특히 원산시내의 석유 화학 공장에는 계속된 폭격으로 일주일간이나 불에 타고 있었다 . 시민들은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폭격을 피해 산으로 피신하여야 했었다 .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폭격이 더 심했다 . 어느 날 인가 B29 폭격기와 전투기가 시내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

우리가 사는 집 주변에도 몇 개의 포탄이 떨어져 그 위력이 집을 흔들고 천장 에서 흙이 떨어지고 창문이 포탄위력에 깨어지며 집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 연일 계속되는 공습에 하는 수 없이 원산에서 10 여리 떨어진 농촌 마을인 당하리라는 곳에 피난을 갔다 .

양지쪽 산 아래 외딸게 몇 집 있는 곳에서 방을 얻으려 하였으나 피난민들이 너무 많아서 방을 얻지 못하고 주인집의 승낙을 얻어 집 처마 옆에 널빤지 나무 로 잠잘 수 있게 만들고 그곳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

아버지는 10 여리나 되는 원산시내로 걸어서 출퇴근 하시고 어머니는 가끔씩 원산에 가서 식량을 운반해 와서 식생활을 이어 간다 . 누나와 나는 당분간이나마 산 넘어 이웃 마을인 와우리 인민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

이것이 우리가족의 전쟁으로 인한 최초의 피난살이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시발점이 될 줄이야 누가 알리요 . 이곳은 시골이므로 폭격기는 자주 날아도 폭격은 하지 않았다 . 수없이 계속되는 공습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원산을 점령할 시기가 된 것이다 .

* “국제시장”영화를 보며 과거를 회상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일찍 집에 오시었다 . 이것은 우리 가정에 엄청난 불행 이였다 . 아버지는 오늘 밤 중에 인민군으로 입대 하게 되어 일찍 집에 온 것이다 . 불과 몇 시간의 여유를 두고인민군에 입대 하라는 명을 받았 으니 이는 원산시가 곧 유엔군에게 점령당하는 때가 온 징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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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1.10 국제시장 화재현장 모습>

급하게 모집하는 인민군 징집이다 . 아버지는 34 세이다 . 피난살이 중에 어린 자식 넷을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우리에 대한 책임도 없다 .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없다 .

이날 밤 어린 자식들을 잠재워 놓고 부자간의 인사도 없다 . 이 밤중에 아버지를 멀리 배웅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하고 슬플 뿐이다 . 하늘이 무너지는 운명의 날이 아닌가 . 어머니는 혼자서 많이 울었을 것이다 . 전쟁 속에서 이제는 모든 것을 우리에 대해 어머니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

1950 년 9 월 27 일 ( 음력 8 월 16 일 ) 맑은 밤하늘에는 둥근 보름달이 생이별하는 슬픈 부부의 두 얼굴을 비춰 주었을 것이다 . 서로가 반대방향으로 걸어야만하고 점점 멀어 저 가는 두 남녀의 걸어가는 모습은 밝은 달빛 이였건만 눈물이 앞을 가리고 심장이 요동치며 아주아주 천천히 걸어가는 우리 엄마 아빠의 그날 밤 , 서로 다른 운명의 날 , 이튼 날 아침 어머니는 우리들과 같이 아침상을 차려 놓고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나는 철부지였지만 슬프게 바라보았다 .

그 후 어머니는 우리들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

어머니는 굳건하여 점점 강해지셨다 . 우리는 집도 없고 수입도 전혀 없다 . 식량도 아버지 때 남겨둔 것 얼마 안 될 것이다 . 타향에는 도움 받을 사람도 별로 없다 . 나는 아버지께서 피우다가 남겨둔 담배를 거리에서 팔아 보았던 기억이 난다 . 아버지가 가시고 13 일후 1950 년 10 월 10 일 ( 음 8 월 29 일 ) 국군 3 사단이 먼저 원산지역을 점령하였다 . 전쟁은 후퇴하면 패잔병이요 점령하면 개선장군인 것이다 .

이곳 시골에도 많은 국군이 들어오고 있었다 . 점령하기 전날 심한 폭격이 있었을 뿐 점령 당시에는 이곳 마을에서 전투는 하지 않았다 . 다만 인민군 패잔병 2 명이 산에 숨어 있다가 국군을 환영하는 민간인에게 총을 쏘아 민간인 몇 명이 죽고 인민군은 국군의 사격에 의하여 사살 되었다 .

인민군이 집 뒤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숨겼다는 오해를 받아 이지역의 젊은 남자 3 명이 국군에 의해 총 한방에 3 명이 한꺼번에 살해되는 것을 보았다 . 차후에 국군 장교가 주민들에게 사과는 하였지만 전쟁 중에 사람의 생명은 천하기 한이 없다 .

원산시내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점령하고부터는 비행기 공습이 없어 전쟁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였다 . 인민군은 전쟁초기 남침 할 때만 전투기를 사용하였고 유엔군이 지원하고부터는 제공권을 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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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1 38°선을 돌파하는 국군>

당하리 피난살이 거의 두 달이 되었을까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 우리는 원산으로 다시 내려간다 . 그러나 있을 곳이 없어 고향의 고모라고 하는 할머니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 국군과 유엔군은 10 월 1 일 38 ° 선을 돌파한 후 10 월 19 일 평양을 점령하고 10 월 26 일 평북 초산의 압록강을 바라보는 전과를 올렸다 . 10 월 29 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방문으로 군의 사기를 올렸으나 북한군을 지원하는 중공군이 갑작스럽게 밀려와 유엔군은 겨울철 산악의 추위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많은 손실을 보며 후퇴가 계속된다 .

약 2 개월이 지났을까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원산을 후퇴 한다 . 유엔군은 원산항을 이용하여 군함을 타고 후방으로 이동한다 . 군인은 항시 폐전으로 후퇴한다는 말을 잘 안한다 . 작전상 후퇴라고 한다 . 원산 시내에는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하였다 . 원산을 후퇴하여 인민군과 중공군이 밀려오면 원자탄을 사용한다는 말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

원산 시민들은 남쪽으로 피난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 흥남에도 중공군의 전세에 몰려 주둔한 국군과 유엔군이 10 만여 명 , 남으로 피신하기 위해 모여든 피난민 9 만여 명 전투장비 차량 1 만 7 천여 대 수많은 각종전투물자들을 1950 년 12 월 12 일 유엔군의 흥남 철수 명령 후 130 여척의 군함과 수송선을 통원하여 정원을 수십 배 초과하면서 거제도까지 12 월 24 일 완전 철수함으로서 6 · 25 전쟁이 나은 인간 대탈출의 성공 이였다 .

군함을 타고 남하한 피난민은 부산의 국제시장 및 자갈치 시장이 피난민의 생활 터가 되였고 걸어서 남하한 피난민은 동해안일대와 특히 속초의 청호동에 거주하며 함경도 아바이 마을 촌을 이루었다 . 이때를 38 °선을 지키지 못하고 서울을 두 번째로 후퇴한 1951 년 1 월 4 일을 일사후퇴라고 말한다 .

나는 2015 년 1 월 5 일 속초 극장에 가서 처와 같이 영화‘국제시장’을 과거를 회상하며 관람하였다 . 이 영화는 나의 과거와 너무나도 유사하였다 .

나는 아버지와 헤어지고 어머니 손을 잡고 어린나이에 형제들과 같이 12 월 11 일 걸어서 원산을 출발하여 양양까지 15 일간의 피난길로 어려운 여건 속에 오늘에 이루면서 1 남 3 여의 장남으로 살아왔고 , 영화 국제시장은 아버지와 여동생을 이별하고 어린나이에 어머니와 같이 군함에 매달려 3 일간의 항해로 부산에 도착하여 국제시장에서 가난을 극복하며 장남으로서 가족을 지키며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한 눈물겨운 전쟁사의 드라마가 감회가 깊었다 .

* 도루묵 알을 씹어가며 적은리에 도착

때는 12 월 11 일 ( 음력 11 월 3 일 ) 겨울이어서 날씨가 추웠다 . 우리 가족은 남쪽 고향으로의 피난길에 나섰다 . 어머니는 등에 메는 가방에 옷 몇 벌과 쌀과 식량을 지고 누나는 조그마한 솥 냄비 그릇을 머리에 이고 나는 이불을 지고 동생 선자는 걸어서 동생 성연이는 손잡고 걷다가 또는 업다가 하면서 고향까지 가야 한다고 양양 땅 적은리를 향하여 피난길에 나섰다 .

원산을 뒤로하고 수많은 피난 인파속에서 떠나는 과정에 남아있는 일부 시민들은 폐허의 원산 시내에서 양곡창고 탈취와 빈집털이 갈취가 곳곳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 두고 온 우리 집 재산도 다 가져갔을 것이다 .

그때 어머니는 33 세 , 누나는 11 세 , 나는 9 살 , 선자동생은 8 살 , 성연동생은 5 살 , 때는 겨울철 가야할 양양까지는 500 리 길이다 .

죽고 죽이는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때로는 인민군도 만나고 때로는 국군도 만나면서 고향으로 가야만 산다는 신념 하나로 걸어야만 하였다 .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과 때죽음을 당한 시체도 보면서 걸었다 . 처음에는 피난민들이 도로를 가득 누비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잘 걷지 못하는 우리 가족만이 외로이 걸 어야만 하였다 . 생명의 존엄성과 인격의 존엄성이 존재하지 않는 마치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위해 사냥하는 것과 같은 한 민족 인간끼리의 싸움이다 .

이렇게 남하하는 피난길에 가져오던 아버지의 옷을 군인에게 빼앗기고 식량이 떨어지면 옷과 바꾸어 식량을 충당하였다 . 많이 가는 날에는 5 십리 , 날씨가 춥거나 우리들이 잘 걷지 못하는 날에는 3 십리길 , 때로는 방에서 자고 때로는 부엌에서 자면서 원산을 출발하여 안변과 통천을 거쳐 고성을 지나 금강산을 멀리 바라보기도 하고 간성을 지나고 대포를 지나 동해안 길을 따라 도루묵 알을 씹어가면서 비틀 걸음으로 고향땅인 적은리에 도착한 것이 15 일이 걸렸다 .

잘 걷는 사람이면 5 일 만에 오는 길을 보름동안 추위에 걸었다 . 원산에서 양양까지 걸어서 오는 동안 우리가족을 잠자게 하여주신 신세진 분들 너무나 고맙고 다들 잘살고 잘되기를 바랄 뿐이다 .

* 적은리 에서의 수난

여기 강현면 적은리는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다 . 친척 가족도 있지만 우리와 가장 가까운 큰댁이 살고 있다 .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사촌 형제도 있어서 오랜만의 만남에 반가웠으나 우리 가족이 아버지도 없이 가진 것 없이 빈 몸으로 고향에 온 것은 큰댁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큰 부담 이였다 . 어차피 우리는 우선 큰댁에 있어야만 하였다 . 그런데 또 어이없는 불행이 닥쳐왔다 .

고향에 와서 큰댁에 있은 지 10 여일 정도 있었는데 계속된 전쟁은 중공군과 인민군의 강세로 국군은 계속된 후퇴로 이곳 고향에도 후퇴 하는 것이었다 . 어 느 날 오후 국군이 후퇴 하면서 개인 집에 불을 지르고 마을에다 총질을 하는 것이다 .

가족들은 마을 앞 도랑거리에 피신을 하며 화염에 휩싸인 검은 연기와 함께 집들이 타는 모습만 바라볼 뿐이었고 적은국민학교도 이때 타 버린 것이다 .

40 여 호가 넘는 집중에서 단 3 채만 불에 안탔으며 태양은 마을이 불타는 화염에 반사되어 벌겋게 보이는 것이었다 . 엄청난 재산의 무자비한 손실이다 .

이때가 1951 년 1 월경이다 . 국군이 두 번째로 38 °선을 사수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후퇴 하는데 이때를 1 · 4 후퇴라고 한다 . 전쟁 중에 밀고 밀리는 접전 지역에서는 선량한 양민이 억울하게 죽어 가는 사례가 많다 .

점령한 군인들이 점령지의 주민에 대하여 불순 세력과 사상 점검 등 적군에 유리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에서 못된 병사들이 저지르는 행동이다 . 그래서 접전지역의 젊은이는 그 마을을 피하였다가 조용할 때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데 이때 돌아오지 못하면 가족과 이별 또는 이산이 된다 . 사실상 당시 무식한 일반 주민들은 사상에 관심이 없다 .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기보다는 비극적이고 두려운 전쟁만 없었으면 하는 것이 그때 그들의 바람 이었다 .

전쟁은 전쟁만의 고통 그것이 아니다 . 때로는 집을 잃고 때로는 재산을 잃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가난과 질병과 불량한 환경이 전쟁과 같이 간 다 . 나도 장질부사라는 전염병에 걸려 나른하고 떨리고 오랜 기간 병고에 시달 리기도 하였으나 다행히 회복되어 살아났다 .

마을을 불 살리고 국군이 후퇴한 후 적은리는 또 북한군 정치가 되었다 . 큰댁과 우리는 잿더미가 된 큰댁 집터를 정리하고 그곳에 움막집을 짓고 큰댁 5 식구 우리 5 식구 하여 10 명이 불편한 한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 인민군들은 또 주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

국군이 있을 때 마을 지도자와 그 일에 협조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이 마을 창고에서 주민들을 모아놓고 인민재판을 한다면서 그들을 처벌하자고 주민의 강 제 동의를 받아 같은 마을에 살던 사람을 마구 때리게 하여 한 사람이 맞아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 이것은 주민들을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함은 물론 오늘날까지 이 마을에 가장 치욕적인 오명을 남게 하였다 .

운이 없는 사람은 억울하게 귀중한 목숨이 순식간에 죽어가고 어떤 사람은 전쟁의 숱한 고비를 넘기면서 구사일생으로 살게 되니 이것이 사람마다 다른 운 명이 아닌가 .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마을주민이 맞아죽는 모습을 보는 현실은 그때 당시의 분위기를 감히 짐작할만한 생활이 아니던가 !

국군과 유엔군은 두 번째로 다시 북진이 시작되었다 . 인민군 치하에서는 미군 전투기의 공습이 심하여 집집마다 땅속에 방공호 1 개씩을 가지고 있다 . 남쪽 비행기만 뜨면 재빨리 땅굴 방공호 속에 피신하는 생활이 당시는 습관화 되어 있었다 .

1951 년 봄이다 . 이곳에 또 다시 인민군이 후퇴하고 국군이 진격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 당시 큰아버지는 41 세 인민재판을 보고 공포에 떨고 있을 때다 . 또 무슨 불운이 생길까 염려하여 잠시 피신하였다가 국군이 돌아와 마을이 평온해지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시며 북쪽으로 떠나가신 후 오늘날까지 되돌아오지 못하므로 큰댁과 우리 두 가족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 슬하에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

그 후 전쟁은 북쪽 지금의 휴전선 지역에서 소강상태로 계속 되었고 후방은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평온한 편이였다 . 그러나 움집에서의 불편함은 여전 했지만 불안감은 차츰 나아졌다 . 농사일을 준비해야 할 봄철이 다가 왔다 . 우리는 큰아버지도 없는 큰댁에 계속 있을 수 없었다 . 농사 경력도 없고 할 줄도 모르고 아무런 준비도 없고 식량도 별로 없다 . 원산에서 온지 4 개월여 된 것 같다 .

* 송현리 정자골 외가에서의 더부살이

어머니는 염치를 불구하고 식구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외갓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 외가는 옛날 월리에서 살다가 손양면 송현리 정자골에 살고 있으며 농지도 많고 농사를 많이 지어 잘 사는 편이다 . 외갓집도 집이 불에 타고 깨진 기와와 흙을 석어 담처럼 쌓아서 집을 만들고 살고 있다 .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이모 두 분하여 다섯 식구다 . 여기에 우리 식구까지 하여 10 식구다 아무리 가까운 딸과 외손자들이라고 하여도 좋을 리가 없으련만 외할아버지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우리를 거두어 주셨다 .

배 골리지 않게 먹이려고 가끔씩 밥그릇을 확인 하면서 많이 먹어라 . 밥을 더 많이 지어라 하면서 무척이나 신경 쓰는 바람에 외할머니와 다투기도 하였다 .

외할머니도 고마운 분이다 . 배다른 딸 식구 챙기느라 고생도 하고 많이 베풀어 주셨다 . 밥도 외가 식구보다 우리 식구가 더 많이 먹었다 .

옛날에 가난한집 자식은 허기 끼가 있어 개걸을 더 쓰고 부잣집 자식은 몸에 기름 끼가 있어 밥을 적게 먹는다더니 사실인 것 같았다 .

나는 외삼촌과 같은 나이로서 같이 식사를 하는데 내 밥은 많이 담아도 다 먹는데 외삼촌은 나보다 적게 담아도 조금씩 남기곤 한다 . 나는 어린 나이지만 얻어먹는 입장에서 주인보다 더 많이 먹는 것이 무척이나 미안했던 것이 지금도 생각난다 .

나뿐이 아니라 우리식구 모두가 그러 했을 것이다 . 어머니는 조금이나마 도우려고 고기 장사도 가끔 다녔다 . 어느덧 외가에서 1 년이 지나 새로운 봄이 왔다 .

* 새로운 출발과 전쟁의 종결

어머니는 우리 식구가 외가에 계속 있을 수가 없어 독립해서 살 계획을 결심했다 . 경험이 없는 농사를 지어야 하나 장사를 하여야 하나 망설이다가 농사짓기를 결심하고 적은리에 토막집을 짓고 아버지가 물려받은 논 1,000 평과 북에 들어간 친척 밭 몇 백 평을 개간 경작 하면서 살아갈 생각이다 . 나를 외가에서 학교 다니게 남겨놓고 누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적은리로 농사지으러 갔다 .

1952 년 봄이다 . 북쪽에서는 계속 전쟁 중이나 소강상태의 전투다 . 우선 큰 큰댁의 불탄 빈터에 집을 만들기 위하여 인근에서 헐어내는 헌집나무를 구하고 부족한 나무는 산에 나무를 베어서 약 5 평정도의 부엌과 방을 마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게 되었다 . 이때 적은리는 거의가 움막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 1 년 반을 친척집에서 신세지고 살았는데 이제 작으나마 내 집 장만을 하고 농사일도 시작 하였다 .

우리 논 1,000 평은 전쟁 중에 휴경지가 되어서 농사일을 처음 하는 우리에게는 더욱 힘들었다 . 외가 할아버지가 소와 인부를 보내어 논도 갈아주고 모심는 일도 도와주고 하여 겨우 논에 모를 심었다 . 비료도 없고 거름도 없지만 묵은 논이어서 벼가 잘 자란다 .

당시는 모두가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특히 기반이 없는 우리에게는 거택 구호라는 가난한 자의 정부 구호 대상이었다 .

어머니와 양자 누나는 정부에서 주는 밀 , 옥수수가루의 구호 배급과 쑥 나물과 죽을 끓여 먹어가면서 논에 김매기를 하였는데 잘 먹지 못하고 허리 굽혀 김을 매니 얼굴이 붓고 일어서서 하늘을 보면 어지러웠다고 한다 . 그러나 그때는 다들 어려운 생활 이였지만 모든 일은 서로가 협조하고 이웃과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인심은 자랑스러운 삶이었다 , 아무튼 그해 가을에는 경작한 농사가 추수가 되어 위쪽 방에 벼 가마니가 쌓 이게 되니 이것이 새로운 출발의 첫 번째의 수확이고 1952 년이었다 .

지난 농사기간 동안에 잘 먹지도 못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로 가장 고생이 많 았고 어렵게 지내던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외아들과 장남이라는 이유로 외가에 있으면서 학교에 다녔는데 손양면 학포 마을 회관에서 초등학교 3 학년 과정을 외삼촌과 지금도 생각나는 당시의 친구들과 군인 장교부인인 여자 담임선생의 가르침 , 그 후 손양국민학교 운동장 나무 그늘에서 일 년 간 학교를 다니다가 집에서 농사지어 수확이 끝난 후에 적은리에 돌아와 이때부터 온 식구가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 어머니 와 누나의 고생에 너무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

1953 년 3 월 5 일 소련 스탈린의 사망과 오랜 전쟁에 지친 유엔군과 북한군 진영은 전쟁 중에도 여러 차례 휴전협정을 재기하면서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국민을 설득 하였으나 우리대통령의 휴전반대와 한국국민의 휴전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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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 논의모습 1951.10.11>

북진통일 대모와 연일 대중 집회가 계속 되였다 , 유엔은 휴전을 예고하고 북한의 유엔군 포로와 남한의 북한군 포로교환을 한국의사를 무시하고 협상을 진행함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분노하여 미국과의 사전협의 없이 1953 년 6 월 18 일 24 시를 기하여 부산 , 광주 , 논산 , 마산 , 영천 , 부평 , 대구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2 만 7 천여 명의 반공포로들을 유엔 몰래 석방명령을 내렸다 ,

미국은 엄청난 사태의 한국 대통령의 반발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미국 국무 차관보 로버트슨이 방한했고 여러 차례 한국과 미국의 협상 끝에 1953 년 7 월 12 일 한미상호 방위조약에 동의하고 휴전회담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 1953 년 7 월 27 일이다 . 판문점에서는 전쟁 후 159 차례나 남과 북이 회담 끝에 이날 22 시를 기하여 휴전협정 조약이 성립되어 휴전이 되었다 .

막판 전쟁은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쌍방이 오랜 기간 치열한 전투가 있었으며 주로 불모고지 , 백마고지 , 저격능선 , 수도고지 , 백석산 , 피의능선 , 가칠봉 351 고지 등에서 남과 북이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

전쟁은 3 년 1 개월 2 일 (1129 일 ) 만에 민족 통일도 없고 승패도 없이 쌍방이 많은 손실을 보면서 휴전으로 종결 되었다 .

그 후 국군 공병대가 적은국민학교도 지어주어 나는 금풍리 개인집 사랑방에서 공부하다가 적은국민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누나도 늦게나마 학교에 다녀 적은국교 1 회로 졸업하고 나는 2 회 졸업생이다 . 1954 년 9 월에 내가 국민학교 5 학 년 13 세 때이다 .

그해 비가 억수로 많이 와서 영동지방 일대는 대 홍수로 농경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 더욱이 전쟁기간에 나무를 가꾸지 않고 마구 베어내어 집을 짓거나 화목으로 벌채되어 모든 산들이 벌거벗어 흙만 남아 비만 오면 산 흙이 흘러내려 도랑에 쌓여 논둑과 제방이 터지기 일쑤이다 . 우리는 운이 없게도 우리 논과 임차 논이 제방이 터져 수확을 앞둔 벼가 흙에 매몰되어 50 %이상의 수확이 감소됨은 물론 유실된 제방과 매몰된 농지를 복구 하는데 가을부터 겨울까지 너무나 힘이 들었다 . 당시에는 국가에서 복구 지원은 없었고 소와 지게 , 리어카 , 삽 등 재래식으로 오랜 기간 복구 작업 이였다 .

이때 홍수를 갑오년 홍수 또는 9 · 13 홍수라고 한다 . 그 후부터는 우리 집 경제는 차츰 나아지기 시작하여 내가 중학교 갈 때와 고등학교 입학 할 때면 주위 사람들의 권유와 어머니께서 어려운 생활에서도 어렵게 결정하여 한 달에 쌀 1 말 값의 학비를 내면서 우리보다 형편이 좋고 부모가 다 있는 집 자녀도 학교를 안 보내는데 어머니의 강한 교육열 관계로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하였다 .

우리 형편에 경제적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소비를 절약하고 근면 성실하게 노력한 원인도 있지만 외가의 도움이 컸었다 .

그간에 외가에서 천 평이 넘는 논을 우리에게 주었고 암송아지 한 마리를 주셔서 송아지가 자라서 농사일을 하게하고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아서 그 송아지를 키워 팔아서 저축한 결과다 .
1952 년 농사를 시작하여 30 여년이 지난 1980 년 이후에는 답 4,500 평 전 1,000 여평을 자경하여 적은리 마을에서 상위권 경작농이 되었다 .

* 오늘이 있기 까지

나는 1942 년 일본 식민지 시절에 태어났다 .

1945 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광복을 맞이했으나 38 °선 이라는 분단국으로 이곳 북쪽은 조선의 정치 하에서 살아야 했었고 1950 년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생명의 위협과 가난의 고통을 오랫동안 겪어야만 하였다 . 3 년이 넘는 전쟁의 결과는 남과 북이 폐허의 땅과 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또 분단의 휴전선을 만들고 말았다 . 그리고 현재 광복 후 분단의 세월이 70 년이 지났고 한국전쟁의 발발이 65 년이 흘러갔다 .

누구 때문이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 ?

지금 우리나라는 휴전이 성립되고 남과 북으로 분단된 나라가 되면서 그 후유 증은 평화로운 나라가 아닌 대립의 나라가 되었다 . 1968 년 1 월 21 일 김신조 일 당 31 명의 북한공비들이 서울 청와대습격 , 1968 년 10 월 30 일 ~11 월 2 일 120 명의 무장공비의 삼척 울진 침투사건 , 1976 년 8 월 18 일 휴전선 판문점부근의 미루나 무제거 도끼만행 사건 , 1983 년 10 월 11 일 버마 아웅산 국립묘지폭파로 대통령 수행원 17 명 사망사건 , 2010 년 3 월 26 일 해군 천안 함 폭파와 당년 11 월 23 일 연평도 포격사건 등은 휴전선의 후유증으로 도발하는 세계유일의 분단의 비극이 이어가고 있는 나라다 .

요즈음 젊은이들이 한국전 바로 6 · 25 전쟁을 잘 모르고 또 잊혀져가고 있다 .

지금으로부터 65 년 전 지금세대의 부모님들이 겪은 비극의 역사에 관심이 멀어 지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 꼭 알아야한다 . 그리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대비하여야 한다 .

바로 반대쪽 우리와 접하고 있는 인근에서 전쟁을 도발한 자가 있다는 사실이 낯선 얼굴이 아니다 .

만일 우리의 동맹국의 도움을 받지 않았었다면 대한민국도 자유도 민주도 존재하지 못하고 3 대 세습독제와 가난한 북한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꼭 한번 생각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