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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군사고문단 지휘소(KMAG,F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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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215회 작성일 2016-03-2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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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군사고문단 지휘소(KMAG,FDC)


김사철 (남, 80세, 강현면 주청리)

면담일 : 2015.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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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산 솔밭에 미 군사고문단지휘소 (KMAG,FDC) 가 주둔 했다 .
1951 년에 조산 학교 앞 솔밭에 미 군사고문단이 주둔했다 . 현 고려대 연수원부터 주청리까지 바닷가에는 비행장도 닦았다 . 보지도 못했던 장비들이 주 - 욱 지나만 가면 평평한 비행장이 되었다 . 솔밭 속 부대에는 철조망을 치고 주로 미군 장교들이 많았고 한국군도 있었다 . 경비를 엄하게 하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다른 곳의 나무를 베어 목재도 화목도 하였지만 이곳은 얼씬도 못해 소나무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 한국군은 통역사 , 번역사 , 그리고 한국인 고용인들도 있었다 .

부대 주변에는 조그만 구멍가게들이 있어 술 몇 병에 과자 몇 개씩을 놓고 조그만 문으로 돈을 받고 물건을 내어주는데 고객들은 주로 한국군 졸병들이 배가 고프니까 군수품을 가져 나와 팔아서 먹을 것과 바꾸기도 했다 .

또 술집도 많았는데 위스키 집과 맥주 집은 미군들이 드나들었고 , 흑인과 백인들이 드나드는 술집이 달랐다 . 장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지에서 와서 장사를 하였고 술집에는 아가씨들도 많았다 . 화폐는 주로 한국 돈을 사용하였고 양양 사람들도 술을 마실 때는 조산으로 와서 마셨다 . 하우스 보이라고 해서 나이가 적은 아이들이 부대 안에 들어가 심부름도 하였는데 직장이 없던 때에 미군부대에서 일하면 먹을 것도 풍부하고 못 먹어보던 통조림 , 과일 , 과자 등도 많아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집은 먹는 것이 풍족해 잘 살았다 .


- 깡통은 지붕 , 드럼통은 쌀통 , 철모는 대야 , 엔진은 방앗간에서 사용했다 .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깡통은 색깔도 곱지만 가위로 오려서 여러 가지 물건도 만들고 지붕도 깡통으로 이었다 . 철모도 세수 대야나 그릇으로 쓰고 군용 항고와 물통들도 훌륭한 그릇으로 사용하고 드럼통도 쌀통이나 벼를 넣어두는 단지로 사용하였다 . 자동차 엔진도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는데 이용하였으며 , 그릇이 없어 통조림 깡통 등은 여러 가지 그릇으로 사용하는 등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재활용하여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

여러 가지 구호품도 나누어 주었으며 옷과 신발 등을 나누어 주었는데 당시 서양인들이 주로 즐겨 입었던 원피스를 지급받고 보니 긴 치마만 입던 한국 여자들이 원피스를 못 입고 뜯어서 다른 옷을 해 입었고 , 그리고 서양여자들이 신었던 뾰족구두 ( 하이 힐 ) 가 나와도 신지 못하고 버렸다 . 병이 나면 군인 야전병원 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


6 · 25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 사람은 물론 소도 시련을 겪었다 . 군인들이 끌고 가서 잡아먹기도 하고 짐을 싣고 가기 위해 빼앗아 가기도 했다 . 농촌에서는 소가 큰일을 하는데 피란을 갔다 와서 농사를 지으려니 사람 힘으로서는 소가 하는 일을 대신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 모내기를 위해 질 ( 두레 ) 을 구성할 때도 우선 소가 있는 집을 고려하고 다른 집들을 배정하였다 . 소 주인은 소를 힘들게 부리지 않나 살펴보았고 소를 자식처럼 귀하게 여겼다 . 먹이도 여물에 콩이나 곡식 사료를 넣어주어야 했다 . 소 1 마리 값은 쌀 10 가마 정도 했었고 , 춘궁기에 쌀 1 말을 장리쌀로 빌리면 추수기에 쌀 1 말 5 되를 갚아야 했다 .


- 22 · 25 사단 창설식에 이승만대통령과 미제 8 군사령관 테일러 장군이 참석했다 . 전쟁이 치열해 지면서 더 많은 군인이 필요하게 되자 국군의 전투력 증강을 위해 양양군에서 1953 년 6 월 15 일 보병 12 사단을 필두로 7 개의 사단이 창설되 었다 . 강현면 주청리 7 번국도 옆 연병장에서 22 · 25 사단 창설기념식이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사열을 받으셨다 . 미제 8 군사령관 테일러 장군 , 신 국방장관 , 진 내무장관 , 변 외무장관 , 원 헌병 총사령관등 정부요인들을 대동하고 참석하셨다 .


22 · 25 사단 창설 행사가 끝난 다음 이대통령께서는 통일 없는 휴전결사반대 양양군민 총궐기 대회에 임석하시어 3 만군중의 환호를 받으시고 간곡한 훈시를 하시고 귀경하셨다 . 2013 년 전까 지 주청리 7 번국도 옆에 12 사단 창설기념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 당시 양양지역에서 사단창설을 한 부대의 기념 비와 함께 현재에는 강현면 장산리 102 여단 정문 앞에 여러 창설기념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 창설비의 앞에는 아래와 같은 사단창설 지의 표지판이 있고 , 현 조산 주유소 뒤 골짜기는 사단 사령부로 사단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 각 연대들도 주변에서 훈련을 하였다 .


- 공병대 마대로 옷을 해 입고 , 다이너마이트 가방이 책가방이었다 .

조산마을이 불에 탈 때 학교도 재만 남았다 . 학생들은 학교가 없어 정손리 동사 ( 마을회관 ) 에서 공부하였다 . 아이들은 옷이 없어 벙커를 만들 때 모래나 흙을 넣어 사용하는 공병대 마대로 만든 포대를 뜯어 옷을 만들어 입고 가방은 다이 너마이트 가방을 이용하여 책을 넣어 매고 다녔다 . 장난감이 없고 놀이터도 없으니 학교가 끝나면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다가 대포 불발탄을 주어다 가지고 놀다 잘못 두드려 폭발하여 다치고 죽는 일도 있었다 . 아이들 두발은 모두 삭발인데 머리를 깎는 기계가 있는 집에 가면 잘 깎이지 않아 머리카락이 집혀지면서 뽑혀 따가워 이발하자면 눈물을 많이 흘려야 했다 .


- 영혈사에 주둔했던 인민군들이 부처님을 산 아래로 굴려버렸다 .


1951 년 초 낙산사가 화재를 당했다 . 사천왕만 나고 모두 화재를 당했다 . 1 군단에서는 낙산사를 복원하기 시작했는데 마을마다 구장 ( 이장 ) 이 사람들을 동원 했다 . 내가 도시락을 싸 가지고 낙산사에 가니 다른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와있다 . 어디서 기와를 많이 실어다 놓았다 . 내가 맡은 일은 기와를 지고 지붕위에 나르는 것이었다 . 4 일간 다니면서 기와를 저 올렸다 .

낙산사를 짓고 부처님이 낙산사와 함께 타서 영혈사의 부처님을 모셔왔다 . 영혈사 부처님은 6 · 25 한국전쟁 시 인민군이 주둔지로 사용하기 위해 부처님을 산 아래로 굴려 낸 것을 화일리 김선녀 라는 할머니가 며느리와 산나물 하러 갔다가 발견하고 집에다 모셔놓은 것을 첩보대장이었던 김동석 대장과 이형근 군단장이 모셔다 낙산사에 봉안하였다 . 낙산사를 짓고 난 후 사천왕상 앞에 낙산사 중건 비를 세웠고 이승만 대통령도 1952 년 11 월 낙산사를 둘러보셨다 . 낙산 고아원에는 검둥이 어린이도 있었다 . 낙산사 절 안에 고아원을 설립했다 . 검둥이 , 고수머리 아이들도 있었으며 그리고 피난민의 아이들도 있었다 .


- 골방에 피난민이 많이 들어와 흙으로 지은 벽이 터져나가기도 했었다 .

1951 년 1 월 1 · 4 후퇴 시 눈이 억수 로 퍼붓고 피난민들은 끊임 없이 내려오는데 집을 다 태웠으니 들어가 눈을 피해 거처할 곳이 없으니 우리 집 작은 딴 체 골방이 남아있었는데 그 방으로 밀고 들어왔다 . 밖은 눈이 계속내 리니 나가라고도 못했다 . 사람을 깔고 올라앉기도 했다 . 얼마나 사람이 들어왔는지 흙으로 지은 벽이 터져나갔다 . 그래도 불편하다는 말도 못하고 참고 추운 밤을 지냈다 .

사람들이 집이 타니까 조산국민학교에 모여들었다 . 그런데 거기도 나오라고 하고는 학교도 불을 질렀다 . 사람들이 놀라 한꺼번에 빠져 나오느라 아비규환 이었다 . 학교는 목재가 좋아서 처음엔 잘 붙지 않다가 오래 불이 탔다 . 양양 사람들은 김백일 군단장이 불을 놓으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하여 그 군단장을 미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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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5사단 창설행사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과 테일러 미8군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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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낙산 고아원과 원아들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