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2. 행적 소회록(行績 所懷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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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418회 작성일 2016-03-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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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적 소회록(行績 所懷錄)

■ 전 양양교육청 교육장 고 김종극(故 金鍾極, 1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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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수기는 고 김종극 선생의『풍상구십평생 행적소회록 ( 風霜九十平生行績 所懷錄 ) 』중 일부내용을 옮긴 글입니다 .>

* 설악산 마등령을 넘어 5 일 동안 걸어서 춘천에 도착했다 .

나는 1905 년 강현면 중복리 서당집 김좌배 ( 金佐培 ) 공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

어려서부터 한학자인 맏형 [ 김종섭 ( 金鍾燮 ) 서당훈장 ] 에게 한문을 배워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

16 세가 되던 1920 년 맏형의 권유로 남궁억 양양군수가 군행리 구 객사 ( 舊 客 舍 ) 에 설립 (1905 년 ) 한 현산학교 1 학년에 입학하였다 .

이듬해인 1921 년 12 월 4 학년 2 학기 말 야간에 현산학교가 불에 타고 그 앞에 있던 양양의 명물인 태평루 ( 太平樓 ) 가 전소되어 , 3 학기부터 구교리에 건설한 새학교로 옮겨서 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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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사범시절 암록강철교 수학여행>


그 후 보통학교 ( 현산학교 ) 를 졸업하고 , 19 세 때인 1923 년 3 월중복리 집을 떠나 설악산 마등령을 넘어 주막여인숙에서 숙식을 하며 5 일 만에 춘천에 도착 , 그해 4 월 춘천사범 학교 응시시험에 합격하여 , 1925 년 3 월 25 일 춘천사범학교 제 1 회로 졸업하고 공립보통학교 훈도자격증을 취득하였다 .

1925 년 3 월 31 일 강원도지사로부터 근무지를 지정받은 울진군 매화보통학교를 시작으로 홍천보통학교 , 원주보통학교 , 원주 황둔간이학교 , 춘천학곡간이학교를 거처 1942 년 교직생활 17 년 만인 37 세에 첫 교장 발령지로 회양군 이포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고향인 양양 강현인민학교 교장으로 전근 되어 재직하였다 .

1947 년 6 월 월남 후 강릉성덕학교와 묵호학교에 재직하고 연곡 학교에 온지 10 개월 만인 6 월 25 일 아침식사 후 학교주변 공지에 깨 모종을 하느라 라디오도 듣지 않고 모종을 하고 있는데 , 6 · 25 동란이 터져 아침 10 시가 되니 북쪽 인구 방면의 피난민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우리 식구도 피난길에 올라 강릉 안인과 옥계를 거처 정선 임계 , 평창 미탄 , 제천 , 영주 , 안동 , 영천 , 대구 , 경주 , 울산 , 부산까지 피난생활을 이어갔다 .

1950 년 9 월 15 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고 1950 년 9 월 28 일 서울이 수복되고 그 해 11 월 10 일 수복명령이 내려져 전쟁 중 부산으로 대피중인 묵호 운수국 ( 運輸局 ) 소속 수송선을 타고 11 월 30 일 묵호에 도착하였다 .

12 월 2 일 강릉 주문진 주영학교로 임지를 지정받고 근무를 하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 년 1 월 4 일 제 2 차 피난생활을 울진에서 하고 돌아온 후 `51 년 4 월 초에 수복이 되어 `51 년 5 월 1 일에 개교를 한 주문진 솔밭학교에서 근무를 하다가 사천학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

* 강릉교육감으로부터 양양수복지구로 전출을 권고 받다 .

1953 年 2 月 11 日에 강릉교육감 최준길이 사천으로 출장 와서 나와 조용히 이야기 할 시간을 가졌다 . 나를 보고 수복지구 ( 收復地區 ) 인 양양 ( 襄陽 ) 에 전출할 의향을 묻는다 . 나는 즉각 강릉에서 나 같은 인물이 필요하면 그냥 두고 그렇치 않거든 내 보내라 . 그러나 나의 자신은 전출할 의향이 없다고 똑 잘라 말하고 헤어졌다 . 즉 나의 뒤를 희망운동 ( 希望運動 ) 하는 자가 있기에 고향인 양양으로 가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 집에 와서 도인사계장 안경모에게 양양 입주의향을 전달하고 귀향을 결심하여 양양학교로 전출하게 되었다 .

校監 : 洪廷杓 . 朴榮成 敎師 : 沈興燮 . 朴命均 . 權赫南 . 沈相信 . 權吳詵 . 崔燉弼 . 崔允植 . 洪順子 . 崔○○

* 양양국민학교 시절에 얻은 영광의 별명인 돈 벌거지 교장


6 · 25 한국전쟁이 휴전과 동시에 38 °이북에 군정 ( 軍政 ) 이 실시되어 모든 기관이 군정 하에 예속 ( 隸屬 ) 되어 교육도 사령관인 군단장이 통할 ( 統轄 ) 되어 공무원의 임면권도 장악하였다 .

교원의 임면도 우익 ( 右翼 ) 인사로 채용하여 국민의 제도에 준하였다 . 그러나 1955 년 3 월에 군정이 종지부를 찍고 대한민국에 복구하여 수복지구에 공무원도 대거 남에서 입북하여 과거 유임자 ( 留任者 ) 들과 마찰이 심하여 입북한 자들도 곤경에 처하였다 .

나는 양양국민학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도임하였다 . 나는 월남을 하여 강릉객지에서 교육생활을 하였기에 지역사회와는 생소하며 또 공산지역이기에 이념적 ( 理念的 ) 으로 합치 ( 合致 ) 하는 편이 적다 . 주민들은 흔연 ( 欣然 ) 히 국민의 품속 으로 들어 온 것을 감읍 ( 感泣 ) 할 것으로 여겼으나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면도 적지 않았다 .

첫째 , 교직원들의 생활이 불안정이었다 .

이남에서는 사친회에 보조를 받아서 궁색은 면하였으나 수복지구에서는 사 친회 성립이 전혀 불가능한 위치였다 . 나는 유지 몇 분과 합의하에 사친회를 조직하였으나 납부성적이 부진하여 개중에는 반대의 태도를 가진 자가 많았다 .

그들은 공공연히 절규한다 . 왈 ( 曰 ) 대한민국은 의무교육에 부담이 없다는데 무슨 사친회비냐고 회비가 납부되지 않아 교육자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

공산치하에서는 교원은 특대 ( 特待 ) 에 배급도 특별하여서 일반민보다는 곤란치 않았다 하여 선생들은 먹여 살리기 위해서 매일 조회 때마다 돈 얘기를 독려 하고 독촉을 하니 나에게 영광의 별명이‘돈 벌거지 교장’이라 하였다 .

둘째로는 주택난이다 .

6 · 25 때 회신 ( 灰燼 ) 하였기 주택이 없다 . 교장도 선생들도 남의 집에 세를 들어 방 한 두간으로 만족하였다 . 교사는 군정시대에 여차 직하면 군막 ( 軍幕 ) 사용 으로 어두움 속의 교사였다 . 그러나 가교사는 3 · 8 선 지방의 가교사보다는 나은 편 이었다 .

셋째 상이군인들의 행패이다 .

상이군인이라는 명예를 몸에 걸고 물품의 강매이다 . 태극기와 학용품 등의 강매가 심하였다 . 이야기인 즉 국군이 진격 시는 재력의 탈취 , 정조의 유린 등 적국 패전지에서 하는 불법행동이 신성한 국군을 모독하는 불순분자도 많아 전쟁초기에는 욕설도 많이 들어 대한민국 국군들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

넷째 산에 삼림 ( 森林 ) 들이 없어졌다 .

군정시에 적국의 소유물로 여기고 나무를 벌목을 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토색 분자 ( 討索分子 ) 도 많아 독산 ( 禿山 ) 이 되었다 . 이 지역은 공산주의의 불모시대를 거처 군정시대에 민정수복이라는 정신적으로도 혼선이 일고 생활도 거의 입에 풀칠을 할 정도이다 . 피난민이 대거 입주하여 생활력이 강한 주민들의 경제력을 좌지 ( 左之 ) 하게 되어 암암리에 반항을 하는 기색도 보였다 . 우리는 겨우 봉급과 사친회비보조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니 겨우 걸색 ( 乞色 ) 을 면하였다

* 양양 교육에 전력을 다하다 .

첫째 민주사상의 앙양 ( 昻揚 ) 에 힘을 썼다 .

둘째 국어 정신함양 ( 精神涵養 )

셋째 전 교과 성적 앙양에 주력하였다 .

이와 같은 목표를 정하고 교직원이 일치단결하여 운영에 힘을 쓰니 실적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

이 무렵 도에서 양양학교를 수복지구 연구학교로 지정하고 , 그 해 3 월 연구 발표회를 가졌고 , 전 직원이 교육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 그러나 지금과 비교 하면 운니지차 ( 雲泥之次 ) 라 하겠다 .

이 시기에 나는 1 년간 성내리에서 세를 얻어 행랑살이를 하다가 군행리 에서 피난민이 사는 두 칸짜리 초가집을 사서 이주하였다 . 밭을 일궈 아침에는 똥지게를 지면서 호박 농사를 짖고 , 아내는 돼지를 키워 살림에 보탰다 .

또 교육청 토지 200 평에 콩과 감자를 심어 자족을 도모하고 250 여 평의 밭을 사서 농사를 지으면서 된 것도 모르고 생활을 유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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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발표를 주관하는 김종극 교장>

* 군수 교육감 ( 郡守 敎育監 ) 과의 마찰

첫째 하루는 군에서 호출이 왔으나 나는 즉시 출두하지 않았다 . 이유인즉 수복지구 행정공노표창 이라한다 . 나의 불응으로 대노한 군수교육감은 시말서 ( 始末書 ) 를 내라고 한다 . 나는 시말이고 무엇이고 군수가 교육자를 호출 좌지우지 ( 左之右之 ) 하는 이유를 반박하였다 .

나는 교육청계통이기에 불응하고 , 교육청에서 부르면 당연히 출두한다고 하였다 . 그랬더니 교육감이면 교육과장을 통 할 것이지 하니 교육청에서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하며 이건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

두 번째는 음력 정월 휴일이다 . 나는 음력휴일로 2 일간 휴업하고 과세 ( 過歲 ) 하라고 하였다 . 군수가 나를 보고 무슨 까닭으로 휴업을 하느냐 하면서 또 시말서를 내라하나 나는 불배 ( 不背 ) 하였다 .

이남에서도 교장 재량으로 휴업을 하였고 , 부모동족 ( 父母同族 ) 이 노는데 학생들이 공부가 되느냐고 하였다 . 이 일로 나는 고분고분 하지 않고 군수는 어찌 하여 군민을 이틀간이나 휴업을 하고 집에서 다 노는데 학생들이 어찌 공부가 되겠는가 하니 군수가 내무과장을 불러 무른 즉 내무과장이 왈 ( 曰 ) 군수 명의로 2 일간 휴업을 통보하였다고 하니 군수도 유구무언 ( 有口無言 ) 이었다 . 나의 이 일로 군수는 교육감으로의 호평을 받지 못했다 .

나의 출신지는 양양이나 외지에서 교육생활을 많이 하였기에 친지와 친척들의 거래가 없었기에 객지나 다름없다 .

과거의 친구들인 최용달 ( 崔容達 ), 최용원 ( 崔容遠 ), 최용대 ( 崔容大 ), 이겸열 ( 李 謙烈 ), 강○○ ( 姜○○ ), 등 적색분자 ( 赤色分子 ) 들이라 거개 ( 擧皆 ) 입북 ( 入北 ) 을 하였기에 어 쩔 수 없는 노릇이고 , 특히 최용대 ( 崔容大 ), 김종성 ( 金鍾聲 ), 김종학 ( 金鍾鶴 ), 김봉면 ( 金鳳冕 ) 도 잠적 ( 潛跡 ) 을 하니 상대하여 말할 것도 없으니 누가 있어 나를 도와줄 친구들도 없다 .

중견인물 ( 中堅人物 ) 들은 내가 타 지역에서 교직생활을 한 관계로 나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나 역시 외교수완이 부족하여 외빈내허 ( 外賓內虛 ) 하기에 교제할 형편이 못된다 . 하여간 돈으로 교제함이 친밀의 첩경 ( 捷境 ) 인 것이다 .

생면부지의 교육자가 많았다 . 남에서 입주한 교원은 적고 거개 ( 擧皆 ) 가 군정 시대 ( 軍政時代 ) 에 채용한 자들이다 . 따지고 보면 인공치하 ( 人共治下 ) 의 종사자와 피난민중 과거 이북에서의 교육종사자들이다 .

교육회장 ( 敎育會長 ) 투표에 나는 부회장이 되고 회장은 과거 군정시대의 인물이며 양양이 광역 ( 廣域 ) 한 까닭에 생면부지의 교육자가 많고 민정이양 ( 民政 移讓 ) 입주자가 적은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