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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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260회 작성일 2016-03-2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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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맺음말


한국전쟁 시기 양양군은 38°선 이북지역 9개 군(강원도 7개 군, 경기도 2개 군)중에 유일하게 민간인이 거주할 수 있도록 허용된 군정(軍政)실시지역이 되 었다. 이와 같이 군정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지역이 군사·전략적 거점의 중요성이며, 둘째는 과거 공산주의 지역에 사회주의요소제거및재건문제이다. 구체적이유는군사전략적거점으로서의 지역특성은수많은인구를필요로했고, 동시에군정의실시를필요로했다.
육군1군단은1950년10월1일국군3사단을선봉으로역사적인38°선이북진격을개시하였다. 이로써5년간의공산치하에서고초를겪던38°선이북양양주민들은 자유대한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1·4후퇴 후 1951년 3월 27일 38선을 다시 돌파한 후 제1군단은 잠정적인 행정조치로 실시한 군정기의 중심 수행부대였다. 당시수복지구양양일원은1951년7월4일미제8군사령부행정명령제 34호 부칙에 의거 1군단이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속초읍을 포함한 양양군 8개 읍면의7만명, 고성간성지구를제외한수복지구를총관장하였다. 1951년7월 5일1군단군정수반은양양군내읍면자치위원회, 군자치위원회를재구성하고, 군관하지구행정잠정규정을공포하여각리장과읍·면장선거를실시하였다.
1951년8월1일에는군청을양양면에두고군정제도를실시하게되었다. 또한 군민정관(군수)을 선출하였는데 초대민정관은 박종승(朴鍾勝)이 뽑혔으며, 각 읍면협의원을선출하였다.
이형근 제1군단장의 군정목표(軍政目標)는 주민생활 안정과 향상, 교육의 재건, 산업의 진흥 등으로 결정하였다. 일면작전, 일면건설이란 구호아래 공병부대는주민들에겐집터마련과주택건축을위해적극지원하였다. 그리고피난길에 돌아온 주민들의 기초생활보장을 위해서 구호양곡을 수령하여 대상자에게 배급하여주었다. 한국민사원조처와긴밀한연락을취하여구호식량과물품을 도입하여요구호대상에게지급함으로써생계안정에노력하였다.
침체된상경기의활성화를기하기위해서양양과속초에시장을개설하여부족한 생필품을 구입 및 판매할 수 있게 하였다. 양양은 5일장으로 매 장날이면 많은 장꾼들이 몰려들었고, 속초읍의 경우 중앙동에 2동의 현대식 상가건물이 신축되면서인구에걸맞는상권이형성되었다.
째는 지역이 군사·전략적 거점의 중요성이며, 둘째는 과거 공산주의 지역에 사회주의요소제거및재건문제이다. 구체적이유는군사전략적거점으로서의 지역특성은수많은인구를필요로했고, 동시에군정의실시를필요로했다.
육군1군단은1950년10월1일국군3사단을선봉으로역사적인38°선이북진격을개시하였다. 이로써5년간의공산치하에서고초를겪던38°선이북양양주민들은 자유대한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1·4후퇴 후 1951년 3월 27일 38선을 다시 돌파한 후 제1군단은 잠정적인 행정조치로 실시한 군정기의 중심 수행부대였다. 당시수복지구양양일원은1951년7월4일미제8군사령부행정명령제 34호 부칙에 의거 1군단이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속초읍을 포함한 양양군 8개 읍면의7만명, 고성간성지구를제외한수복지구를총관장하였다. 1951년7월 5일1군단군정수반은양양군내읍면자치위원회, 군자치위원회를재구성하고, 군관하지구행정잠정규정을공포하여각리장과읍·면장선거를실시하였다.
1951년8월1일에는군청을양양면에두고군정제도를실시하게되었다. 또한 군민정관(군수)을 선출하였는데 초대민정관은 박종승(朴鍾勝)이 뽑혔으며, 각 읍면협의원을선출하였다.
이형근 제1군단장의 군정목표(軍政目標)는 주민생활 안정과 향상, 교육의 재건, 산업의 진흥 등으로 결정하였다. 일면작전, 일면건설이란 구호아래 공병부대는주민들에겐집터마련과주택건축을위해적극지원하였다. 그리고피난길에 돌아온 주민들의 기초생활보장을 위해서 구호양곡을 수령하여 대상자에게 배급하여주었다. 한국민사원조처와긴밀한연락을취하여구호식량과물품을 도입하여요구호대상에게지급함으로써생계안정에노력하였다.
침체된상경기의활성화를기하기위해서양양과속초에시장을개설하여부족한 생필품을 구입 및 판매할 수 있게 하였다. 양양은 5일장으로 매 장날이면 많은 장꾼들이 몰려들었고, 속초읍의 경우 중앙동에 2동의 현대식 상가건물이
신축되면서인구에걸맞는상권이형성되었다.


<참고문헌>


가미야후지(이기택역)『조선전쟁』,2004
김귀옥, 『경제와사회여름호』잃어버린또하나의역사(한국전쟁시기강원도양양군미군정통치와반성, 서울대사회발전연구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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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수, 『내가겪은6·25』(명문당, 2007)
유광정, 『백선엽을말한다』(책밭,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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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욱, 「한국전쟁」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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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모니까, 『한국전쟁전후 수복지구의 체제변동 과정』(가톨릭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2009)
『민족의증언』(『중앙일보사』1983,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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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신문(나라사랑)』(국가보훈처, 2014. 7. 1)
『동아일보』(1950. 10. 14)
『설악신문』(양양3·1만세운동재조명, 2003. 3. 3)


집 필 자
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
연구소장 이종우
연 구 원 이철수
연 구 원 김재환


편 집 자
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
연 구 원 이규환
연 구 원 김양식
연 구 원 이기용
양양문화원
사무국장 김광영


자료조사
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
연 구 원 이철수
연 구 원 김재환


증 언 자
김기정, 김남하, 김동소, 김사철, 김용섭, 김정식, 김종남, 김종호,
김주혁, 김준기, 김홍식, 김희소, 노 돈, 노재춘, 박제철, 손봉만,
신덕순, 양재억, 오제정, 유승일, 원태수, 이교영, 이상억, 이상준,
이종우, 이종하, 이주희, 이철수, 이흥만, 임영애, 장영철, 전영용,
전인원, 조홍식, 최용술, 최용회, 최종원, 최지훈, 최홍제, 추종삼,
한재덕, 홍성하, 김 구(김종극)


사진자료
『약진도상의수복지부』(양양군수복지구건설위원회, 1953)
『수복연감』(강원문화연구사, 1954)
『사진으로보는양양의옛모습』(양양문화원, 2010)
『6·25 전쟁1129』(이중근,2013)
『김양식』(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연구원) 양재억, 이교영, 이종우, 임영애, 조홍식, 최홍제, 김 구, 전상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