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1. 군정시기(軍政時期) 나의 체험기(體驗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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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059회 작성일 2016-03-2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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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정시기(軍政時期) 나의 체험기(體驗記)


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장 이종우(李鍾●, 82세) 손양면 수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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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온 지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남들과 서로 이야기는 하면서도 체험한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

위인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수기가 후대에 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으나 역으로 나는 수기를 써서 남기려 생각지는 않았다 .

그런데 내가 양양문화원부설 향토사연구소 소장으로서 우리 양양에 대하여 멸시하거나 왜곡되거나 한 역사 문화적 사실들을 그대로 인정하거나 인정하려는 잘못된 행위를 방관할 수는 없다는 의지를 굳히고 양양문화를 바로 고쳐 기술하고 널리 홍보되어 바른 역사의식이 양양군민의 정도의 정서에 흠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의식을 굳히게 된 것이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닌가본다 .

2010 년부터 꾸준히 고문헌들을 검색하면서 우리 향토사 6 명의 연구원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여가를 선용하면서 양양의 역사 문화에 대하여 조사 , 발굴 , 연구 , 홍보 등 우리 앞에 전개되는 임무들을 수행하고 있는 과정에서 일찍이 우리 양양지역은 선사문화가 꽃핀 곳이고 , 유사 이래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억울하게 탄압받은 비운의 역사를 저변에 깔고 있으면서 , 외세엔 배타적 적개심으로 초토화 되었던 내 고장을 되찾으려 항거한 역사를 읽어보고 진솔하게 기록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하여 비통함도 느꼈었다 .

지금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 약소국 약소민족이니까 .

조선말기 즉 조선 고종임금 말기까지는 모화사상 ( 慕華思想 ),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사상 ( 親日思想 ), 8 · 15 광복이후는 남북분단으로 인한 갈등과 외세에 의존한 민족분열을 정산하고 통합하려는 기운보다 기득권 유지의 지속화에 혈안이 된 혼돈 ( 混沌 ) 상태가 지속되고 있으니 개탄스럽다 .

오늘의 우리지역 38 °선 이북지역인 양양 ( 속초 , 죽왕 , 토성 포함 ) 에 대하여 나는 천기 ( 天機 ) 는 알 수 없으나 , 양양은 정말로 천운을 타고난 상서로운 땅인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

김일성 ( 金日成 ) 의 남침 6 · 25 전쟁이 없었다라고 하면 우리 양양지역의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 경지 ( 境地 ) 에 처했으랴 상상해 본다 .

구구하게 말은 잇지 않겠으나 6 · 25 이전 양양에 살고 있다가 자유대한의 품에 안긴 양양의 주민들은 참으로 천운을 실은 대한민국 땅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가 아닌가? 이 말은 결코 심한 말이 아니다 .

이같이 새로운 세상을 이루어지기까지 우리 양양 인들은 피나는 눈물 속에서 새 세상의 양양을 건설하는 과정이 있었다 .

이 과정을 곰곰이 생각지 않으면‘뭐 그러려니 체념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못 가질 수도 있다 . ’바로 그 한 단계의 과정이 양양지역의 군정기간이다 .

군정기간은 정확히 1951 년 7 월 4 일부터 1954 년 11 월 17 일까지 짧은 3 년간이다 . 나는 군정기간이 청년시기라서 알건 이미 알고 있었으며 지금보다 명석했다 . 그러나 그 당시는‘으래 이렇게 사는 거야’불만도 행복감도 못 느꼈으니 그대로 순응하면서 살아 왔었다 .

이제 내가 우리 양양향토사 중 오늘의 양양이 있게 된 한 과정의 군정시기 , 우리 군민의 삶의 애환 , 그리고 양양을 재건하겠다는 애향심 , 묵묵히 상전벽해와 같이 변천한 시대상을 기록물로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는 양양문화원의 사업을 장식 해야겠다는 생각과 소임을 이행해야겠다는 일념의 책임의식에서 흐릿해져가는 기억을 더듬어 내가 겪었던 군정기의 체험기를 적어감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내 주관에서 사실을 적어가고자 하나 시기는 조금씩 넘나들면서 기록하게 된다 .

* 소년기 일제강점기 손양공립초등학교 ( 巽陽公立國民學校 ) 에 다녔다 .

2 차 세계대전 [ 당시 일제는 대동아전쟁 ( 大東亞戰爭 ) 이라 함 .] 당시 학교 교문 옆 교정에 루즈벨트 , 처칠 , 장개석 ( 蔣介石 ) 의 허수아비 짚으로 만들어 세워 놓고 아침마다 등교하면서 목총으로 세 번씩 찌르고 일본천황만세 ( 日本天皇萬歲 ) 를외쳐야만 교실로 들어갔으니 어찌 보면 이것은 친일행위 ( 親日行爲 ) 가 아닐는지 . 그러나 나는 누구에게 배운 바도 없는데 나의 배일사상 ( 排日思想 ) 이 핏속으로 흐르지 않았나본다 .

내 아버님의 암시가 있었으리 . 나는 의식 없이‘일본은 망하고 우리 조선이 독립해야 해’이런 말을 문득 문득 했었으니까 . 시기는 1945 년 8 월 15 일 일본천황의 항복 방송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남대천을 건너 양양면 연창리 국도변에 위치한 라디오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서 일본천황의 울음 섞인 항복 문을 읽는 방송을 직접 들었으니 그때의 감격 ,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감격을 다시 느껴보게 된다 .

* 광복 후 5 년간 북한치하에서 학교교육을 받았다 .

농지 5 정보 이상 소유 지주는 전 재산 몰수 , 토지개혁 등 정치체제 속에서 나는 중학생의 신분으로 초기 문맹퇴치 운동에 적극 참여했었다 .

당시 양양에는 고등학교급인 고급중학교 ( 양양고급중학교 , 양양여자고급중 학교 ) 와 중학교급인 초급중학교 ( 현북초급중학교 , 양양초급중학교 , 양양여자초급중학교 , 강현초급중학교 , 영랑초급중학교 , 천진초급중학교 , 오호초급중학교 )가 있었다 .

초급중학교에는 소년단조직이 있었고 고급중학교에는 민주청년조직이 있었 으며 매주 토요일 자아비판 명목의 회의가 있었는데 이는 정치사상교육의 기초과정임이 분명했었다 . 이 시기 내가 지금 기억에 남고 있는 것 중에서 공개해도 그 누구의 나무람을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 두 가지만 기록한다 .

첫째는 1946 년 9~10 월경 손양인민학교 이태하 ( 李泰河 ) 교장을 월남 루트 ( 손양면 부소치리 경유 현북면 장리 당상구미 ) 를 안내한 일 .

둘째는 1949 년 8 월 방학 중 3 년 연상의 내 친구 석병설 ( 昔炳卨 ) 이 나를 찾아와 인제군 기린면 귀둔리 큰댁으로 월남하려하니 길을 안내해 달라고 하기에 서면 공수전리를 경유하여 양아치 고개 넘어 영덕리까지 대려다주고 훗날 다시 만나자고 손잡고 헤어져 돌아온 일이다 .

분명 석병설 친구는 월남과 동시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한 것으로 짐작된다 .

6 · 25 전쟁 중 육군 상사 계급장을 달고 참전 양양을 경유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 그 후에 소식이 없으니 그는 분명 동작동 국군묘지에 잠들었을 것이 다 .

* 이제 여기에서부터가 군정기의 체험 과정이다 .

전쟁 중 피난생활을 겪고 1951 년 아직 전쟁 중이다 . 집은 모두 불타버렸으니 우선 거처할 집을 마련하는데 불탄 집터자리 구들장 그 위에 뙤짱 [ 뗏장 ] 으로 벽체를 쌓고 지붕은 양양역 ( 양양읍 송암리 ) 부근 창고들이 탄 자리에 흩어진 함석을 걷어다 이었으니 거적때기 문을 걷히면서 기어들어가고 기어 나올망정 제법 함석집이었다 .

우리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 내 동생들 3 명 모두 6 명이 오순도순 열심히 농사 지으며 살려고 노력했다 .

당시 장티푸스가 창궐하여 , 국군 군의무병이 집집이 돌아다니며 예방접종을 실시한다 . 우리 집 식구들은 일제강점기 내가 초등학교 2 학년 때에 아버지만을 제외하고 모두 장티푸스에 걸려 혼난 일이 있어 면역력이 생겨 그런지 장티푸스 접종 후 열만 조금 있고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며칠씩 누워 앓았었다 .

우리민족은 과거 춘궁기인 보릿고개라고 하는 힘든 고개를 넘었어야 했는데 6 · 25 전쟁 중 그 고개는 더욱 험했다 . 땟거리가 없어 익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잘라다 가마에다 복아서 맷돌에 갈아 멀건 보리죽을 먹으면서 말하자면 초근목피 속에서 하루 속히 전쟁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하면서 살았다 .

우리 마을에도 1950 년 전쟁 중 폭격으로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일할 만한 사람들 ( 공산치하에서 부역한 분들 ) 은 모두 북으로 피난가고 심하게 말하자면 우리 동내에는 지치레기 ( 지스러기 ) 들만 남았으니 내가 동내 일에 솔선 참여해야 했다 .

내보다 나이가 위인 분이 있어 그 분을 구장 ( 이장 ) 으로 하고 나는 2 반 반장 역을 맡아하면서 한청 ( 한국청년단 ) 총무 , 구장 일을 보좌하는 서사 몫까지 담당하면서 마을에 불상사가 없도록 마을을 보살폈다 .

그런데 어떻게 보면 여기는 국군의 점령지라 , 손양면 하왕도리에 주둔해 있는한 부대에서 부식용 농산물인 채소류와 간장 , 된장 , 고추장 등을 하루 이틀이 아니고 계속 징발하므로 너무나 고통스러웠으므로 삼복더위에 날마다 소고리지게 ( 소쿠리지게 ) 를 짊어지고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거두어 드리기가 너무 곤욕스러워서 나도 요령이 생겨 한꺼번에 많이 거둬드려 쌓아놓고 납품하라는 날 갖다 바쳤다 .

그러니 신선도가 전날 같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 물론 아무런 대가도 없이 징발당하는 것과 같았는데 책임자 모두 부대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띠고 병사 둘이 내려오니 구장은 숨어 나타나지 않고 반장 3 명과 한청단장 이렇게 4 명이 끌려가서 촌집 높은 뜨럭 ( 뜰층계 ) 에 발을 올려놓고 마당에 손을 짚은 거꾸로 엎드려 벋쳐 시켜놓고 곡괭이자루와 나중에는 카빈소총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내려치는 억울한 고문을 당하니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이판사판 나로 하여금 지기 ( 志氣 ) 와 기지 ( 機智 ) 를 발휘하여 사태를 해결 수습하고 군과의 오해를 풀고 군의 민간에 대한 적폐를 해소시키고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일도 있었다 .

* 군무 ( 軍務 ) 에 동원되었던 일들

- 미시령 도로 건설에 동원

1951 년 가을철이다 . 벼가 익어갈 무렵이니 9~10 월이 아니겠는가 싶다 . 내가 반장이니 우리 마을에 배당된 인원 속에 내가 솔선 참여했다 . 바랑망태기를 꾸려 그 속에 쌀 3 되 , 고추장 , 소금 , 냄비 등 취사용구와 홑이불을 넣고 , 괭이를 지참하고 손양면 하왕도리에 집합하여 일행은 군 트럭으로 미시령 아래 화암사 앞 학사평 너른 벌판에 석양 무렵에 도착하니 군 천막이 쭉 깔려있는 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날 아침 지원인력이 충분하다고 우리 손양면에서 간 인부는 군 트럭에 실려 되 집으로 돌아와 추수를 하게 되었다 .

- 미 8 군 중거리 통신대에 노무원으로 동원

장소는 미시령 , 그곳 군부에서는 향로봉이라고 하나 토성면에 위치한 금강산 제 1 봉인 신선봉의 상봉 북쪽 기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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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원으로 근무한 미시령 옛 모습>

일자는 기억 없으니 1951 년 연말이나 1952 년 1 월 초로 기억되는데 온통 은세계를 이루었을 때 다 .

우리 마을에서는 2 명이 차출 되었는데 내 ( 당시 19 세 ) 가 또 솔선 지원하고 현재 (2015 년 ) 수여리 노인 회장을 맡고 있는 이주희의 부친 이영수 ( 李永洙 : 당시 62 세 ) 씨는 부친 몽상 ( 蒙喪 ) 을 입고 있는 중임에도 차출되었다 .

동원 기간은 3 개월 , 손양면에서 동원된 인원은 50 명 정도다 . 미군 GMC 트럭 2 대에 분승했는데 앞차는 백인 병사 , 뒤차는 흑인 병사가 운전했다 .

눈길에도 무난히 미시령 중턱을 지나 영마루가 보이는 구배 ( 오르막 ) 가 심한 고개에 이르자 앞차가 오르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 이때 내가 탄 차의 흑인 병사가 우리 차를 세우고“까땜”이라 중얼거리며 앞차로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차에 올라 차를 멈추게 하고 차를 몰아서 구배를 지나 올려놓고 내려오는데 우리 차가 슬며시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 나는 재치 있게 차의 오른쪽 난간을 안고 뛰어 내렸다 . 이 순간도 나는 하늘의 은혜를 입었다 . 라는 생각이 들었다 . 뛰어 내리기는 했는데 내 몸은 차바퀴 밑으로 미끄러진다 .

바로 그 순간이다 . 흑인 병사의 재치 있는 동작과 기술 , 미끄러지는 차에 오르지도 못하고 한쪽 발은 바닥에 한쪽 발로 차의 브레이크를 밟은 모양이다 . 이리 하여 우리 일행 모두는 또 제 2 의 인생길을 밟게 되었다 . 차위에서 우리들 일행이 하는 말 이구동성으로“흰둥이 보다는 깜둥이가 기술도 좋고 희생정신이 강하다 . ”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

이런 고비를 넘겨 우리 일행은 무사하게 미시령 정상에 당도하니 , 커다란 국방색 낡은 텐트 1 개와 말끔한 텐트 2 개와 같이 카추샤 (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에 배속 된 한국군인 ) 3,4 명과 미군 2,3 명이 우리를 맞이한다 . 우리는 우리 일행은 커다란 텐트 안에 들어갔는데 가운데에는 커다란 드럼통 나무난로 하나가 설치되어있고 양옆으론 10 ㎝ 정도 높이의 미송마루 ( 침상 ) 에 군용 모포가 안쪽으로 개져 놓여있었다 . 이어 모두 밖에 나오니 미군 쓰리코터 1 대가 도착하고 미군 서너 명이 내리는데 한 병사는 술에 취한 채 양주병을 입에 노상 대면서 부근에서 해골 2 개를 주어다가 바위에 올려놓더니 M-2 카빈소총으로 드르 륵드르륵 쏘아 깨트리며 고함을 지른다 .

다들 겁에 질렸겠지 . 우리 쪽으로 총부리를 돌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간이 콩알만 해지는 순간 내 눈엔 섬광이 인다 . 저 해골은 인민군이나 국군의 유골일것이다 . 왜 ? 그곳은 전투가 치열하여 골짜기가 피로 물들어 벌건 물이 흘렀다고 하며 우리 국군의 희생자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 이 광경 속에서 나의 뇌리에는 무엇이 스쳤을까 ! 이 글을 읽어보는 분께서 임의로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

그곳에서 복무하는 카추샤는 우리를 인솔하는 병사와 미군을 위한 취사병이 었다 . 인솔 담당병사는 우리들끼리의 자치조직을 하게하니 반장 1 명 , 취사당번 2 명을 선출했다 .

우리에게 내리는 식품은 타개지도 않은 통밀과 왕소금 단 두 가지다 .

우리 일행은 퍼지지도 않은 통밀 밥에 소금물만 멀겋게 끓인 소금국만 먹으면서 엄동설한에 3 개월간 복무했다 . 취사용구는 솥 대용으로 드럼통을 반 자른 것 2 개 , 양은 바케쓰 [ 일본어 : 양동이 ] 2 개 , 한식기 , 스픈 뿐이다 .

취사장은 우리 텐트 뒤편이요 , 우리가 사용할 변소는 등 너머 쌩쌩 삭풍이 몰아치는 그곳에 깊게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굵은 참나무 장태를 쌍으로 걸쳐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 용변토록 되어 있고 눈비가림도 없는 노천 그대로였다 . 용변을 보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불그스레하게 팅팅 불은 통밀 그 자체가 대변이다 .

그런 식생활 속에서도 오전 오후 하루 2 회 용수와 연료용 디젤을 각각 1 스빼아깡 ( 스페어 캔 ) 씩 광목천으로 멜빵을 만들어 짊어지고 미 8 군 통신소까지 운반 하였으니 통밀 밥도 소화되고 열량이 충분했던 모양이다 . 지금 생각하니 모두 거짓 같은 황당한 옛날이야기 같기도 하다 . 지금 우리군의 특수요원들이 그런 지경 속에서 훈련할까 ?

우리는 밤마다 모포 1 장을 3 인이 덥고 누워 자는데 입담 좋은 중년 어른들의 음담패설로 밤을 새운다 . 일본군에서의 얘기 , 폐전으로 만주에서 일본으로 귀국한 일본 여자들의 얘기 , 일본군 정신대 1 명이 하룻저녁에 일본군 24 명까지 상대해준다는 얘기 , 나는 입도 뻥끗하지 않고 별들과 같이 꿈만 꾸었다 . 그뿐 아니 다 .

저녁이면 때때로 미군병사가 나를 불러내어 자기네 막사로 데려가서 나에게 복싱 글러브를 끼워주고 나를 복싱용 샌드백 역할을 하게한다 . 맞아주다가도한 뻔치 날리면 인정사정없는 무례한 행위를 어쩔 수 없이 참으면서“너 몇 살이냐 ? ”물으니 20 세란다 . 상대의 미군은 키만 내보다 컸을 뿐 정식으로 하면 그자를 다운시킬 것만 같았다 . 저 자는 이국수만리 왜 여기서 나한테 분풀이 하는가 ? 도리어 그 자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

또 가끔 미군이 없는 날이면 카추샤취사병이 나를 슬쩍 불러 가보면 이름도모르는 음식을 차려준다 . 고마운 동포의 정을 나누며 맛있게 먹고 나면 30 분도 안되어 통밀만 쏟아 붓는 야전변소로 가야했다 . 그래도 나는 좋게 여겼다 .

어느 날은 기온이 영하 33 ° C 이하란다 . 콧구멍에도 얼음덩어리 , 눈썹에도 고드름 , 소변을 보면 오줌이 땅에 닿자마자 얼어 오줌 얼음 순이 50 ㎝정도 솟아오른다 . 이렇게 혹독한 추위 속에서 일행 중 손양면 여운포리 노인 한분이 손이 얼어 헬리콥터로 후송하였는데 후문에 팔을 절단하였다고 한다 .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 손가락과 귀밑 목덜미에 동상을 입었었다 . 그 후유증은 평생 이어지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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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 LST(아갈배) 모습>

이렇게 3 개월 복무를 마치고 이영수씨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날 이영수씨는 문턱에 들어서자마자 그분 부친의 구연 앞에 그대로 엎드려 대성통곡하시니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울음바다를 이루기도 했었다 .

이렇게 어려운 일을 치르고 난 후 나는 그 후 그곳에서 6 개월 더 복무했다 .

여름철이 되어 홍수로 인하여 미시령 도로가 유실되어 보급품 공급이 중단될 때가 있었다 .

그럴 때는 카추샤의 인솔 하에 속초항까지 걸어 내려가서 미 LST[ 당시 아갈배 라 칭함 ] 에서 보급품을 내려 짊어지고 미시령까지 힘들게 운반한 일도 있었으니 무더운 삼복 그런 지경에도 불평 없이 즐겨 소화했으니 이 무슨 청승이었나 ? 내 그 때 미시령 길을 오르내리면서 충통 ( 忠通 ) 이라 새겨진 바위의 글씨도 보았다 . 이렇게 내 푸념을 늘어 놓다보니 미시령 ~ 향로봉에서의 복무 9 개월의 복무가 끝이 났다 .

*육군 1101 야전공병단에서의 노무자로서의 복무

1951 년 12 월 24 일로 기억된다 .

풀벌레 베짱이처럼 생긴 공병대 덤프트럭 ( 일제 도요다 ) 뒷 문짝도 떨어져나간 트럭 맨 뒷자리에 걸터앉아 대포소리 , 기관총소리 요란한 동부전선 전방으로 향한다 . 날씨는 흐려 금방이라도 눈이 펑펑 내릴 것만 같은데 우선 도착한 곳이 죽왕면 문암역 광장이다 .

그 곳 북쪽마을 삼포리 앞산 언덕이 민통선이란다 . 한참을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한다 . 민통선 통과를 위한 수속 절차로 머문 듯 했다 .

날은 어두워졌는데 눈은 내리고 캄캄한 저녁 불빛이 새어나오는 천막 앞에서 차를 멈추고 일행은 천막 속으로 들어가니 제법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했으니 우리 군의 여유도 느껴보면서 장교의 안내 설명을 듣는다 .

저 대포소리 , 기관총소리는 건봉사지구 전투 중임을 알리는 것이라며 곧바로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고 말을 마친다 .

다시 승차하니 나는 역시 맨 뒷자리 떨어질까 봐 양손을 바닥에 잔뜩 힘주어 밀착시키고 얼마를 간지 모르겠는데 물 흐르는 소리는 반대방향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소리 , 대포소리 , 기관총소리는 뒤쪽에서 점점 멀어진다 .

이거 어쩐 일인가 ? 전세 불리하여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 ? 불길하고 착잡한 생각에 잠겼는데 트럭은 정차하고 하차 명령이 떨어진다 .

내 어디냐고 물으니 지명은 대지 않고 장교의 말이 지금 새벽 2 시라고만 대답 한다 . 하늘을 쳐다보니 희미하게 구름 속에 달의 형체가 보이는 데 눈은 내리지 않은데 하얀 눈 위에 천막 3 개가 있다 .

나는 첫 번째 천막에 들어가서 자는 둥 마는 둥 날이 밝아 일어나보니 인제군 북면 용대리 용바위 바로 앞쪽 미시령 방향 제법 넓은 곳이었다 . 날이 밝은 아침 점호하는데 나는 1101 야공단 103 대대 3 중대 1 소대 1 분대에 배속된다 . 내가 거처하는 천막 속 내 자리는 입구통로 좌측 첫 번째 자리 바로 취사용구 옆이 되다보니 깔아놓은 멍석자리도 지지하게 젖은 자리다 .

세끼 때마다 밥은 흰쌀밥이나 배식 량은 항고 속 뚜껑 반이 좀 넘을 정도에 부식은 콩나물국 때로 김치가 곁들인다 .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건빵은 10 알씩 나눠 먹고 화랑담배도 열 가치 씩 나눠 준다 . 이마저 제때에 보급되지 않으니 도로 보수 작업 중 미군 트럭이 지나 갈 때 미군들이 버리는 담배꽁초도 서로 다투어 주워 한 모금씩 빨곤 한다 . 나는 당초부터 담배하고는 벽을 쌓았으니 담배와는 무관했으나 등가죽과 뱃가죽은 마주 닿는다 .

눈길을 보수하면서 용대지구에서 눈 속에서 산열매를 찾아 따먹고 계곡의 너래 반석에 떡을 친 자리를 발견 말라붙은 조각들을 긁어 먹기도 하면서 나는 산에 올라 미군용 도끼 , 낫 , 톱으로 나무를 잘라 내려 굴려 운반하는 일도 하고 , 작업 중 하도 추워서 도로변 초가 3 칸 오막살이집을 도끼로 한쪽 기둥을 쳐 넘어 뜨리고서 불을 질러 몸을 녹이면서 현역병과 똑같이 복무에 임했다 .

이렇게 추운 지역에서 복무하다보니 감기가 덮친다 . 의무병이 이따금 순회하고 있으나 감기약이란 아스피린 겨우 2 정 , 잠자리는 과하게 말해 질펀하니 감기는 찰떡 친구 내 몸에서 떠나지 않으니 내 몸이 먹여 살린다 . 내가 전에 미시령에서 복무 할 때보다 더 힘들고 고생스러웠다 .

이 같이 힘들게 복무하고 있는데 날보고 현지 입대하란다 . 현지 입대가 다 뭐냐 . 나는 기회만 있으면 미시령을 넘어 부모님이 계시고 동생들이 있는 집으로 도망 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 바른 판단이 었는지 모르겠다 . 왜 ? 야전공병이기는 하나 전투에는 임하지 않을 테니 , 만약 현지 입대하였다면 지금은 참전용사의 대우를 받고 있을 테니까 .

부대에서도 엄동을 극복하기 위하여 진부령 방향 고성군과 인제군의 경계표지가 있는 인제 땅 산비탈에 온돌 움막 세 개를 만들어 놓고 그곳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천막을 철수 할 때 나는 천막 밑에서 아기 주먹만 하게 부풀고 곰팡이가 허옇게 피어있는 건빵 한 개를 발견하고 남들이 볼 새라 얼른 입에 넣고 꿀컥 삼켰다 . 아무 탈 없었다 .

그날도 눈길 도로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 오후에 대대본부에서 온 군인이“이종우 ! ”부른다 . 앞에 나가니“너는 지금 대대본부로 차출된다 . 나를 따라 간다 . ”

하지 않는가 . 내 대답“나 혼자서는 안 간다 . 내와 같이 온 이준식과 같이 가면 가겠다 . ”하니 그렇게 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 그리하여 그날 석양 무렵 인솔 자와 우리 둘은 트럭에 올라 진부령을 넘어 간성 쪽으로 향하는데 아찔아찔하게 내리막이 긴 구배 ( 오르막 ) 길을 내려오다 트럭이 고장을 일으켜 움직이지 못한다 .

운전병은 차를 지키고 우리는 인솔자를 따라 진부령을 걸어 내려오면서 천야 만야한 벼랑 밑을 내려다보니 미군 GMC 트럭이 무려 8 대나 계곡 눈 속에 박혀 있다 . 물론 미군 트럭뿐이 아니겠지 ! 그 먼저 며칠 전 진부령 간성 쪽 첫 오르막 에서 한국군 쓰리코터 1 대가 추락했었는데 육군 소장 1 명과 운전병이 즉사한 현장도 보았으니까 .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더니 어두컴컴하여져서야 대대본부 [ 간성향교가 있는 마을 건봉사로 들어가는 길목 도로변 넓은 곳 ] 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을 다 마친 시각 인솔자의 저녁밥은 있었으나 우리 둘의 저녁밥은 있을 리 만무하다 . 그렇 다고 우리 둘을 굶기지는 않았다 .

천막 속 식당은 장교 식당이라 먹다 남은 밥을 모아 주는데 그 양이 용대리 3 중대에서 먹던 양의 3 배는 된다 . 그 때 대위 한분이 들어와 야전용 식탁 앞 야전 의자에 앉으니 취사병이 양은 식기에 불룩하게 담긴 밥상을 차리니 그 장교는 다른 곳에서 저녁을 먹고 왔다 하면서 그 밥식기의 밥을 잔반통 ( 구정물 ) 에 버린 다 .

그것을 본 내가 벌떡 일어나 오른팔소매를 걷고 그 밥을 건지니 취사병이 달려와 그 밥 못 먹는다 . 라면서 빼앗는다 . 나는 먹어야 한다고 하니 주위에 있던 장교들이“제들이 얼마나 배를 곯았으면 저러겠나 ? ”하니 취사병이 맑은 물에 헹궈서 주무로 그 밥도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 그 날 밤부터 며칠 동안 장교 막사에서 생활하고 났는데 어느새 우리 둘이 기거할 1 칸 남직한 온돌방을 하나 꾸려준다 .

낮에는 뜨끈뜨끈하게 장작불로 방바닥을 달구고 쉬기만 하고 밤에는 반코트에 실탄을 장착하지 않은 M-1 소총을 메고 도랑 건너 북쪽을 주시하면서 동초에 임했었다 .

동초 슬 때에 몸을 데우기 위해 동초 슬 자리에 낮에 미리 장작불을 피워놓는다 . 밤에는 불을 못 피운다 . 그 이유는 낮에는 대한민국 세상 , 밤에는 인민군 세상이란다 . 북쪽에서는 대포소리 기관총소리 여전한데 저녁때가 되면 남쪽 전라도 지방에서 동원된 노무자들이 각종 전략물자를 짊어지고 서쪽 능선을 따라 북쪽 방향으로 열을 지어 가는 광경은 지금도 선하다 .

이렇게 3 개월간 복무하다가 농사철이 되어 우리 둘은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돌아왔다 .

* 면서기로 있다가 준 교사자격증을 취득 강현학교로 초임 발령을 받다 .

- 농사에 종사하면서 새로 가옥을 마련하다 .

1952 년 4 월경 전방 지역에서 군무에 복무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버지를 도와 농업에 종사했다 .

소로 논갈이 밭갈이 논농사 밭농사 모내기 김매기 정말 힘든 나날이었다 .

제일 힘들었던 일은 모내기 때 우리는 정조식이라 상노인은 못줄을 붙들고 나는 복판 차지에 손길은 약삭빨라 모는 빨리 잘 심는데 허리가 아무리 아파도 펼 사이도 없었지만 일어서지도 못하게 한다 . 그 시절 모내기의 허리 통증이 지금 되살아나는 것인가 ? 세월 탓인가 ?

그럭저럭 농사를 지으면서 뙤짱 ( 뗏장 ) 함석집에 기어드나들면서 살수는 없는 일 ,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의논하여 서면 용천리 광주 노씨 문중의 산판에서 재목감이 될 소나무를 구입하여 우리 마을에 와 살던 고성 피난민들을 대리고 작동하여 용천리 물레 방앗간이 있던 곳 바로 옛 가평 보 아래에 운반하고 그 곳에서 부터는 남대천 물길을 이용 작동한 나무를 물에 띠워 수여리 뒤까지 끌고 내려와 미리 줄을 메어놓은 곳에 걸린 목재를 건져 지게로 목도로 운반하여 건조시킨 후에는 피난민 중에서 녹고 [ 붕어톱 ] 기술자를 구하여 각자를 만들고 역시 고성피난민 중에서 목수 2 명을 구하여 번듯한 8 간 초가집을 수여리에서 처음 짓고 나니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

- 손양면사무소 면서기가 되다 .

평생 힘든 농사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 . 다른 길을 찾기 위해 학업을 계속하려 마음먹었으나 아버지의 노령에 집안은 가난하니 내가 맏이로서 가정을 지켜야 겠다는 생각에 정주영씨와 같은 생각은 못하고 , 1954 년 당시 속초 부월리에 있던 1 군단사령부 민사처에 이력서를 제출하였더니 나오라는 통보를 받고 당시 손양면장 고연재씨와 부면장 이면수씨를 만나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손양면서 기로 취직시키겠다고 나오라 하기에 너무 감사하여 그 다음날 손양면사무소 서기로 임명되어 산업지도요원으로서 손양면사무소 산업계에서 업무를 보게 된것이다 .

이런 행운 속에서 나는 농촌 현장에 나가지 않을 때에는 자리에 앉아서 주로 펜 글씨 연습만 하였으며 이때 손양면에서는 손양면승람지 ( 巽陽面勝覽誌 ) 를편찬 발행하였는데 나는 옆에 앉아 구경은 잘하였다 .

당시 손양면사무소의 위치는 지금 손양면사무소의 직전자리로서 내가 앉은 자리 뒤편 우측방향에선 천막 속의 손양초등학교 아동들의 왁자지껄 소리와 이 형근 대장이 기증하였다는 일제 야마하오르간 소리가 날 안절부절 하게 했었다 . 자꾸만 선생님이 되어 달려오라는 소리 같이 내 고막을 때린다 .

그 무렵 내 앞에는 박태송씨가 설립 경영하는 유일한 군정하의 수복지구 양양 지방의 유일한 소식지인 동해일보에 교원을 모집한다는 기사가 내 눈에 띠었 다 .

- 단기교원양성소를 수료하고 국민학교 준교사자격증을 획득하다 .

나는 인재고갈시기인 군정 하에서 교원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고나서 망설임 없이 손양면장 고연재씨와 부면장 이면수씨 에게 신문기사내용을 보이면서 이에 응시해봄이 어떻겠느냐고 여쭈니 망설이지 말고 응시해 보라고 권하므로 용기를 얻어 당시 양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후배를 찾아가 우선 내가 공부하고자하는 교과서를 비롯하여 참고도서를 빌려 번갯불에 콩 볶듯 며칠간 밤새워 공부하고 원서를 접수시키고 모집시험에 응시했더니 1 번으로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

 

<양양군 제2차 단기교원 양성소 수료 기념 4287(1954).5.19>


이어 손양면장에게 사직서 를 제출하고 양양군단기교원양성소에 입소하여 교사가 되기 위한 33 일간의 수련 과정을 거치고 1954 년 6 월

19 일자로 양양군단기교원양성소장 겸 양양군수 김주혁( 金周赫 ) 명의의 제 44 호 수료 증서를 받고 수료했으며 또한 어렵게 제 73 호의 초등학교 준교사자격증을 획득하였다 .

군정시기 준교사자격증 획득자중 1 기생으로 양양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전광식 ( 全光植 ) 선생 1 명뿐 이었고 , 2 기생 중 양양출신은 내가 유일하며 피난을 나온 함경북도 청진사범출신 김모 ( 金某 ) 와 단 2 명이라 했다 .

이 과정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오르간 실습을 못하고 오르간 건반을 종이에 그려 운지법을 익힌 점과 검정고시에서는 논문시험과목이 있어 처음대하는 것이어서 매우 당황한 점이었었다 .

후대에 참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 1954 년 6 월 19 일자로 양양군단기교원양성소 수료자 명단과 제 2 기 수료자 중 1 차 임용자를 다음과 같음을 공개하는 바이다 .


第二期短期敎員養成所修了者名單 (自 4287. 5. 17 ~ 至 6. 19)

No/ 本 籍 /住 所/ 姓 名 /生年月/日 出身學校 /備考

1 襄陽 甘谷 襄陽甘谷 鄭南敎 67. 12. 25 襄高二年 -
2 咸南,高原,上山,內洞 襄陽南門 崔寅相 61. 10. 5 高原高卒 -
3 咸南,端川,龍峴 束草大浦 金成圭 60. 6. 2 城津醫專 準
4 咸南,元山,新洞 襄陽連昌 金元一 55. 8. 5 淸津日鐵工 -
5 咸南,高原,上山,樂泉 降峴上福 金振鄕 65. 8. 10 元山工專 準
6 襄陽 舊校 襄陽舊校 徐一洙 69. 10. 29 厚浦高 -
7 咸北,吉州,金松 西面水上 金三龍 58. 2. 7 吉州土木專 準
8 咸南,新浦,東里 束草溫井 金厚情 64. 12. 4 北靑高卒 -
9 巽陽 上水余 巽陽水余 李鍾● 68. 12. 18 襄高 準
10 襄陽 南門 降峴前津 李在豊 70. 8. 9 江陵師中 -
11 咸南,安邊,安道.於雲 束草四區 金東柱 60. 8. 17 安邊高卒 準
12 咸南,安邊,瑞谷,陵 束草論山 李義京 63. 4. 27 文川高卒 -
13 高城,外金剛,梓月 束草3區 崔星洵 67. 3. 6 高城高 -
14 咸南,新浦,新浦 束草3區 金貞潤 62. 4. 6 咸興師卒 -
15 巽陽 下旺道 降峴間谷 金鳳達 59. 10. 17 襄中 -
16 高城,巨津,盤岩 巽陽鰲山 李昌福 65. 6. 10 - -
17 巽陽 柯坪 巽陽柯坪 咸準鎬 67. 6. 10 襄高 -
18 高城,杆城,塔洞 竹旺野村 咸貴鎬 57. 2. 25 高城高 -
19 巽陽 柯坪 巽陽柯坪 孫鍾燮 68. 3. 9 - -
20 高城,內峴,麻車津 束草外瓮峙 趙恒九 60. 4. 11 元山工專 -
21 巽陽 密陽 巽陽密陽 尹禹重 66. 9. 5 襄高 -
22 咸南,咸州,宣德,新興 束草里 李筆在 60. 4. 7 서울高啓中 -
23 巽陽 下陽穴 巽陽下陽穴 金根洙 65. 3. 10 縣北中 -
24 高城,內峴,草島 束草4區 張弘奎 66. 5. 20 서울培材高 -
25 咸南,永興,古寧,新坪 束草4區 安冕洙 67. 12. 4 咸興醫專 -
26 西面 上坪 西面上坪 金周興 67. 12. 23 - -
27 咸北,明川,下古,荷坪 束草里 金 玄 55. 3. 24 咸師講習科 -
28 西面 龍泉 西面龍泉 金順起 67. 10. 1 襄中 準
29 咸南,北靑,新浦,三里 束草4區 金瀅碩 54. 1. 17 北靑農校 -
30 咸興市豊湖里 束草1區 朴璟錫 60. 4. 24 咸興中卒 準
31 咸南,利原,文星 束草4區 許 淵 55. 2. 5 間島東興中 -
32 高城,杆城,沙上 竹旺三浦 南基義 68. 5. 12 杆城中卒 -
33 高城 中里 巽陽上旺道 崔相機 63. 9. 23 高城高 -
34 黃海,長淵,樂道,三川 降峴降仙 李成鎭 59. 3. 18 海州師卒 -
35 高城,縣內,明波 束草4區 黃得培 56. 3. 28 서울高等英數 -
36 高城,外金剛,長○ 土城我也津 金鎭錫 56. 5. 9 金剛中卒 -
37 西面 上坪 束草1區 金明濟 62. 7. 16 서울漢城高 -
38 束草1區 束草1區 姜順五 67. 7. 10 襄高卒 準
39 西面 上坪 西面上坪 趙洪植 65. 10. 11 襄高 -
40 咸南,咸州,雲興 束草4區 韓炳卨 65. 12. 25 咸農專 準
41 咸南,安邊,瑞谷,上一 土城城垈 嚴仁善 59. 8. 13 元山工專 -
42 襄陽 月里 襄陽南門 安貞姬 69. 5. 17 襄中卒 -
43 咸南,文川,長白 竹旺松岩 金順姬 69. 4. 29 東光中卒 -
44 降峴 金風 降峴金風 林貞玉 70. 4. 3 襄中卒 -
45 高城,巨津,龍下 竹旺松岩 卓仙玉 69. 11. 9 東光中卒 -
46 高城 東里 襄陽南門 徐順禮 67. 12. 17 高城高 -
47 襄陽 造山 襄陽造山 崔瓊姬 68. 11. 29 襄高 -
48 高城,巨津,草溪 竹旺三浦 李順姬 68. 4. 9 東光中卒 -
49 元山 臥牛 束草2區 韓永基 67. 11. 8 元山女高 -
50 西面 龍泉 降峴釘岩 李貴姬 69. 12. 2 襄中卒 -
51 竹旺 野村 竹旺松岩 金順德 69. 6. 18 東光中卒 -
52 降峴 沕淄 降峴沕淄 金基順 62. 8. 24 平壤師大 -
53 巽陽 上水余 巽陽水余 李順姙 68. 3. 16 襄中卒 -(專任講師)

長箭 土城 天津 金 淳 寬 東光中學校

降峴 降峴 枕橋 金 南 珏 襄 國 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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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수료자 중 1차 임용된 자(1954. 6. 30) >

양양국민학교 김성규 강현국민학교 이종우 김순덕

도리국민학교 조항구

속초국민학교 박경석

천진국민학교 김동주

백촌국민학교 임정옥

오호국민학교 서일수 안면수 김 현

이상 11명



- 교직생활

1954 년 6 월 30 일자로 국민학교 준교사로서 강현국민학교에 초임하였었다 .

강현국민학교에 부임한지 3 일째 되는 날인 7 월 3 일이 거군적 ( 擧郡的 ) 행사인 연구발표회가 개최되는 날이었다 . 장학진에서의 주문은 성공적인 연구발표회를 위하여 촉박하게 특별히 발령한 것이니 최선을 다하여 기대에 부응해 달라고 거듭 당부함으로 나는 호랑이도 무서워 할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와 다름없었다 . 첫날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밤을 새워가면서 시키는 일은 물론이고 나름대로 참신한 아이디어로 실내 환경을 정리하니 일신된 환경을 선보이게 했다 .

결과론적으로 성공적인 연구발표회가 되었다고 강평하니‘신임교사 이종우의 역할이 한몫 있었다 . ’고 찬사를 한다 . 이후 나는 이 말을 되새기면서 고개는 들지 않고 어린이들의 눈빛만 주시하면서 백묵가루만을 날렸다 .

당시 장학사는 최경하 ( 崔慶夏 ) 교장은 김주형 ( 金周亨 ) 선생이었으며 이형근 1 군단사령관이 기증한 오르간으로 음악수업을 전개하니 설레게 하던 회포가 슬슬 풀려갔었으며 방과 후 활동으로 합창부원 지도에서 2 부합창도 지도하였다 .

8 · 15 광복기념행사 등 국경일기념행사와 면단위 행사는 강현학교 교정에서 거행하는바 국민의례에는 반드시 내가 오르간 반주로 애국가를 제창하게 하였다 .

나는 물치천 제방 밑 물치리 첫 집에 하숙하고 있었는데 1954 년 9 월 13 일 큰 홍수로 육군 공병대에서 설치한 물치천 콘크리트교량의 교각이 주저앉았으므로 헌병이 민간인의 통행을 통제하고 있을 때 , 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리를 건너가 물에 잠겨가는 학교에 가야한다고 애원하여 통행을 허락받아 다리를 건너 헤엄치다시피 하여 학교 교무실에 들어가 탄피상자로 제작한 학적부 함과 태극기함을 내려 광목천으로 만든 창문 커튼을 벗겨 단단히 묶고서 멜빵을 만들어 짊어지고 장산리 쪽으로 올라가려고 운동장에 나오니 , 당시 장산리 비행장 위쪽에 주둔하고 있던 수송부대의 중장비를 실어 나르는 크고 기다란 대형추래라가 내려오다가 학교정문 앞에서 정차하더니 우의를 입은 장교 1 명이 내게 다가 와서 상항을 물어보므로“태극기와 학생들의 학적부 유실을 방지하고 영구보존 하게하기 위하여 장산리 쪽으로 대피시키는 길이다 . ”라고 하니“학교가 떠내려 갈 상태는 아니니 되 교무실에 드려 놓고 나와 차를 타자 . ”고 권하므로 내가 짊어졌던 것을 교무실 다른 서상 ( 書箱 ) 위에 올려놓고 나와서 그 장교와 같이 차를 타고 무사히 철길 둑 밑 배수로를 넘어 왔었다 .

나로서는 이 일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기에 나의 뇌리에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고 깊이 박힌 것이리라 . 15 명의 교직원 중에서 나만의 행위였다 . 그 누구보다도 애국심 , 애향심 , 애교심 , 교육신념이 강했다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누추한 교단생활이라 하더라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

당시는 전화의 잿더미 속이라 모든 물자는 귀했으며 구하기도 어려웠었다 .

그러므로 피복은 검정물들인 군복을 입었었고 , 보수는 교원 공무원 공히 소두 ( 小斗 ) 로 쌀 4 말 , 보리쌀 4 말이 전부로서 면사무소에서 배급받아 하숙비도 지불 하고 그 나머지로 생활했다 .

그 해 7 월 3 일 연구발표회가 끝난 후 군의 지원으로 학교교사를 증축하는데 지원부대는 공병대로 1 개 소대병력이 파견지원 했는데 그 부대 소대장 김모 ( 金 某 ) 소위와 가까이 지냈었다 .

나도 병력의무를 필해야 교직생활도 계속 영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김소위에게 육군 장교가 되는 길을 물으니 광주보병학교에 입교하는 길이 있다고 자세히 안내하기에 그 중에서 가장 부족한 과목인 영어 실력을 기르고자 고교 영어교과서를 구하여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얼마가 지났을까 ?

1954 년 11 월 17 일 군정이 막을 내리고 대한민국으로의 민정이양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 민정이양으로 군정이 마감하니 교육환경과 교육인사에 대변혁이 이루어졌다 .

군정시기 수복지구에서 나름대로 헌신하던 대부분의 교직원들은 명예도 없이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

새롭게 대한민국 문교부장관의 교원임명장을 받은 교사들은 나를 비롯하여 준교사자격증을 소지한 몇 명 , 대한민국 국군으로 참전했던 교사 몇 명 , 춘천사범과 강릉사범 출신 교사 몇 명 , 일제강점기 훈도출신 간부교원 몇 명 , 여교사들만 임시교사로 임용되니 이들 교육인력으로는 수복지구 양양의 교육을 감당 할 수는 없었으므로 38 °선 이남에서 부족 교원을 충원하여 양양교육의 기틀을 새롭게 펴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