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2) 교육의 재건(敎育再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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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325회 작성일 2016-03-2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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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육의 재건(敎育再建)

국군이38°선을돌파한1950년10월1일이후국민학교로개칭하면서일제히 개교는 하였으나 학교 건물들은 전화로 소실되어 교육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각 학교마다 교사와 교재도 없는 상황이어서 말이 개교이지 학생들이 수업을 받을수없는처지였다.
심지어교장적격자가없어읍면의유지들이도맡아학교를운영해야하는어 수선한 분위기이었다. 그런 와중에 1951년 1·4후퇴 당시 국군이 후퇴하면서 많은가옥과공공건물및학교건물이화재를입어학교는또휴교에들어갔다.
1951년 6월 국군이 양양을 재탈환 하면서 또다시 개교는 하였으나 학교건물이 없어서 마을 동사나 교회, 마을의 큰 건물, 심지어 나무 그늘에서 자리를 깔고 공부를 하거나 미군 군용텐트에서 공부를 하였다. 당시의 교육 실상을 다음과같이증언하였다.56)



손양면학포지역의경우어린학생들을위한교실이없어화재를 면한 학포리 박세환 씨 집 마구간에서 공부를 하였는가 하면, 손양면 주리마을의 경우도 윤병규 씨 집 마루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군정이 실시되면서 교사의 보수는 매월 쌀 소두 4말과 보리쌀 소두 4말을 받고 교사로 근무했다. 교사는 월급도 없이 학생을 가르치 고학생의가정에서15일씩숙식을제공하는학교도있었다.57)
수복지구 교육은 1951년 자치위원회에 학무계를 두고 교육감을 군수가겸임하고학무계를군수산하에두었다. 교사가부족하여공산치하때교사경력이있었던자도공산주의에빠지지않은교사와, 고급 중학교 2,3학년 학생에게도 교사로 임용했다. 또 교사를 충원하기위해48명을 단기간(1개월) 강습을 시켜 군단장 명의로 자격증을수여했다.58)



남한에서가져온교과서가부족하여교사가내용을칠판에쓰면학생들은교 과내용을 베껴가며 공부를 하였다. 공책이 없어서 백로지[품질이 낮은 종이]를 칼로잘라노트를만들어썼다. 책가방도없어서여학생은책보를사용했고, 남학생은 포탄을 넣었던 가방에 책을 넣어 메고 다녔다. 교육내용은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59)의 정신에 입각한 애국애족 교육을 강조하였고, 일제 잔재를 없애고 반공교육을 중시하였다. 피란살이 고생에 시달리면서도‘아는것이힘, 배워야산다.’라는일념으로자식을학교에보냈다.
각계각층으로부터 학교 재건에 대한 물심양면의 적극원조가 있기는 하지만 교수재료와비품이없는것은가장큰곤란이다.“ 생도들이책상이없다!”이소리를 들으신 1군단장 이형근 장군은 미제8군에 연락하여 포탄상자 약 4,000개를 군민정관(郡民政官)에게 기증하여 그것으로서 훌륭한 책상과 걸상을 만들었다. 자! 이제는 교사(校舍)가 낙성되고 아동들의 책상 걸상까지 완비되었으니 대한의 자녀로 자질을 배양하여 야하겠다.
유엔교육시찰단 일행이 시찰을 하고 난 뒤에도 수복지구에서 이렇게 훌륭한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놀라운일이라고감탄한바가있다.
군단장의군정방침가운데있어서도교육의재건을주창한바있거니와이장군은 교육의 근본정신을“배워서 우리민족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이 민족의 결점을 보족하기 위하여 궐기하여야 하며 이로서만 우리민족의 급진하고도 획기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굳은 신념하에 방침을 세운 것이다.60)
수복지구 교육을 위하여 부족한 교원확보는 단기 양성소(1개월)를 설치하여 교원을확보하는등수복지역교육을위해많은노력을하였다.
수복 후 새로 설립한 학교는 송포국민학교(1951년), 한남국민학교(1952년), 상운국민학교(1953년), 남천국민학교(1953년) 4개학교와분교를개교함으로써 양양관내의 학교수는 1953년 5월 1일 현재 국민학교 14개교, 중학교 3개소, 고등학교2개교계19개학교에남녀학생수12,792명, 교직원257명이었다.61)
당시에양양에는고등학교가없어서속초리4구에설립한속초고등학교에다녔다. 그러나 양양의 유지들이 이형근 장군에게 양양에 고등학교 설립을 건의한바이를수락함으로써양양고등학교가설립하여개교62)
함으로써이지역학생들에게는통학에따른불편해소는물론인제양성에큰 도움이되었다.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 일반 행정 및 교육행정에서 특별한 조치가 취해졌는데 즉 읍·면에 대한 경비와 교육에 관한 경비일체를 국고에서 지원하였고군수가교육감의직무를대행하였다. 이때에졸업한학생부터대한민국 학제에 의해 제1회부터 3회 졸업생까지는 군정졸업생이고 1955년부터는 민정1회로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어 학교마다 1~3회 졸업생이 두 기씩 나뉘어야 하는괴리(乖離)현상을낳게되었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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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중학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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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이종우(남, 82세, 손양면 수여리), 면담(2015. 11)
57) 김동소(남, 91세, 양양읍 남문리), 면담(2014. 9)
58) 오제정(남, 90세, 양양읍 군행리,당시교사), 면담(2014. 9)
59)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함. 단군의 건국이념으로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 교육의 최고 이념으로 삼고 있다.
60) 『현산문화』제23호(양양문화원, 2011. 12. 28, pp. 27~28)
61) 『양진도상의 수복지구』(양양군, 수복지구 건설위원회,1953. 7)
62) 『양양군지』2010. 상권 (양양군지편찬위원회, p. 608)
63) 이철수(남, 72세, 강현면 전진1리) 면담(201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