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비화

(6) 명승고적의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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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408회 작성일 2016-03-2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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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명승고적의복구


육군 제1군단장 이형근52)장군은 6·25전란으로 피폭되어 완전히 소실된 낙산사를 중수하였다. 중건(重建)공사는 물치리에 거주하는 이진옥 도편수 주관 하에 건축공사를 실시하였는데, 공사기간은 1952년 8월 28일 착공하여 동년 11 월22일에준공을보았다.
당시 1군단참모장이면서 초대 15사단장을 지냈던 김병휘(金炳徽)장군의 증언을 참고할 수 있다. 김병휘 장군은 이형근 장군의 휘하에서 참모장으로 근무 하면서 낙산사 원통보전 중건을 비롯한 낙산사의 여러 상황을 직접 목격한 바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점안식(點眼式)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비롯해서미제8군사령관밴플리트, 유엔군사령관클라크, 이형근중장, 그리고 5사단장과 11사단장 등 당시 군의 주요 지휘자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한 다.
그리고 1군단 부군단장 최홍희 장군은‘원통보전’의 편액(扁額)글씨를 썼으며, 1군단 민사참모였던‘전형윤’은 원통보전의 주련(柱聯)을 썼다. 최홍희 장군이 썼던 편액은 그 뒤 경봉(鏡峰)스님의 글씨로 바뀌었고, 전형윤(全亨胤)의 주련은 그대로 걸려 있었으나 2005년의 화재로
없어졌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중창불 사점안식(點眼式:불교신앙의대 상에다 생명력을 불어넣는 종교 의식) 행사 참석 뒤에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어 있던 낙산사 동종을 타종했으며, 이어서낙산사에서운영하던고아원을방문하기도했다.
그런데 이 낙산사 동종은 6.25전쟁 직후 강릉포교당으로 가져갔다가 다시 회수해온것이다. 전시인탓에여러가지어려움속에서완성한원통보전의중건은 관음신앙의 성지인 낙산사가 새롭게 중창되었다는 의미와 아울러 참혹했던 전쟁의 상흔을 딛고 다시 한 번 일어서려는 국민 모두에게 하나의 희망이 되었다는상징적의미가있었다고하겠다.
낙산사는 이후 원통보전 외의 전각과 당우들을 하나씩 중건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관음신앙의 성지로 다시금 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형근 장군이 복원했던 원통보전은 2005년 대형 산화로 소실되었다가 2007년 다시 복원되었다.53)
간성의청간정은1953년5월5 일에 복구개수공사를 착수하여 불일성사[不日成事:단기간 내]로 공사를 완료하였다. 청간정의동쪽으로 청간정의 변천사를 약술한‘청간정중수기(淸澗亭重修 記)’가게판(揭板)되어있다.
이 중수기는‘단기 4286년 (1953) 5월 10일 청파(靑坡) 전형 윤(全亨胤) 병서(幷書)’라고 하 여60년전에작성되었음을밝혀 주고있다.
“청간정은 관동팔경 중의 하 나이다. 바람에 닳고 비에 씻겨 부식된지이미오래되어오더니 이승만대통령이 동해순방(東海巡訪) 중에 제1군단장 이형근(李亨根)장군이 맞 이한 자리에서 중수할 것을 명하니 군민정관(郡民政官) 박종승(朴鍾勝)과 면민정관 윤태병(尹泰炳)·함요근(咸堯根)씨가 즉각 호응하여 토성·죽왕 두 면민이 찬조가 답지하였다. 유지 이정길(李貞吉) 및 전임 김두경(金斗卿)이 협조하였으며 부군단장 김병휘(金炳徽)장군 감독하에 헌병대장 김정채(金貞彩)·병기대장 최병혁(崔炳革)·첩보대장 김동석(金東石)·58헌병대장 이종원(李鍾 原) 등이 서로 협조하여 3일 기한하고 공사를 했는데 5일 걸려 완수했다. 옛 것과비교하니늘려지은새정자더욱승경일세!
단기4286년(1953) 5월10일청파전형윤문장을짓고글씨를쓰다.


淸澗亭關東八景之一也風磨雨洗腐敗己久有時第一軍團長李亨根將軍●邀
大統領東海巡訪之機命重修郡民政官朴鍾勝面民政官尹泰炳咸堯根氏卽起相
應土竹兩面贊助踏至有志李貞吉氏先爲己任金斗卿氏挺身從事副團長金炳徽
將軍督之憲兵隊長金貞彩兵器隊長崔炳革諜報隊長金東石五八憲兵隊長李鍾
原氏互相協助奇哉三日期成五日完遂依舊增新亭翼景佳
檀紀四二八六年五月十日靑坡全亨胤幷書“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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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민사현황』(양양군, 4286(1953). 5) 최지훈(남, 81세, 양양읍 서문리), 면담, 2015 (6. 23)
52) 이형근(李亨根, 1920. 11. 1∼2002. 1. 13) 대한민국 군인으로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의 사위다. 1920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42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종전 후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신청을 하여 뛰어난 영어능력으로 UN으로부터 면제를 받았다. 1946년 1월 15일 1기로 임관하고 국방경비대 제2연대장을 맡았다. 유엔군사령부에서 각국의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의 국군의 상징인 군번1번이 되었으며 1946년 5월 1일 초대 조선경비사관학교 교장, 1946년 9월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겸 육사교장, 1948년 2월 통위부 참모총장, 1949년 6월 제8사단장을 맡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제2사 단장, 1950년 10월 제3군단장, 1951년 8월 교육총장, 1951년 9월 초대 휴전회담 대표, 1952년 1월 제1군단장으로 양양군 수복지구 총사령관을 맡았다. 종전 후에는 1954년 2월~1956년 6월 초대 합참의장, 1956년 6월 27일~1957년 5월 17일 제9대 육군참모총장, 1959년 8월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행정개혁조사위원장, 주 영국대사, 한국자유총연맹고문,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하고 1등 수교훈장,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일제만주국에서 끈끈한 군맥을 다져 해방 후 군부를 장악했으며, 5.16때 정치정면에 나서는 등 한국현대사에서 국군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평가되며, 군정당시 제1군사령관으로 양양에서 활약하였다.
53) 『신 낙산사』(낙산사, 2010. 1. 5, pp. 74~75)
54) 전형윤(全亨胤, 1895~1975):독립운동가,서예가. 함경북도 북청(北靑), 호는 靑坡, 또는 古泉이다.
55) 『현산문화』제23호 (양양문화원, 2011, 12. 28, p.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