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7호

문화원 회원 교육(특강) - 양양의 역사 연혁과 명칭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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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792회 작성일 2016-03-2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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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 회원 교육(특강)

 

양양의 역사 연혁과 명칭 유래

강릉원주대학교 사학과 朴道植

 

1. 머리말


양양은 예로부터 익현(翼峴), 이문(伊文), 익령(翼嶺), 덕녕(德寧), 양산(襄山), 양주(襄州), 현산(峴山) 등으로도 불렸다. 양양이란 명칭은 본래 중국 호북성(湖北省) 한수연안(漢水沿岸)에 있는 지명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지리적 환경이 양양과 유사하고 사람들의 품성 또한 자연의 섭리에 감모(感慕)하는 기개가 잠재하여 사대부의 문헌이 찬란하고 풍습이 선미하다고 하여 양양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오늘날‘양양’이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불렸을까? 이에 대해서는 태종 16년(1416)에 양양(襄陽)으로 개칭됨으로써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을 뿐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가 없다. 그런데 충숙왕 복위 5년(1336)에 세워진「충선왕비순비허씨묘지명(忠宣王妃順妃許氏墓誌銘)」에‘양양군(襄陽君)’이라는 봉작명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양양이라는 명칭은 태종 16년(1416) 이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2016년이면‘양양(襄陽)’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양양의 명칭 유래를 살펴보는 것도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본고에서는 양양의 역사 연혁과 명칭 유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양양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2. 양양의 역사 연혁


삼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양양지방에는 동예(東濊)라는 초기국가가 있었다.1) 동예에 대해서는 3세기 후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 큰 바다[大海]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동예의 위치는 북으로 함경남도 정평에서 남으로 강원도 영동지역에 걸치는 동해안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이 형성되면서부터 영동지방은 신라와 고구려의 영향을 차례로 받기 시작한다. 신라는 일찍부터 영동지방으로 진출해 오기 시작하였다. 양양일대가 언제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시기는 내물왕 42년(397) 이전의 어느 시기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북변의 하슬라(何瑟羅, 강릉)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왕이 죄수들을 놓아주고 1년간의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2)
내물왕대(재위 356∼402)에 신라는 고구려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신라가 377년에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할 때 고구려의 사신과 동행한 것이라든가, 381년에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위두(衛頭)를 파견한 것, 고구려와의 우호의 대가로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낸 것은 이를 말해준다. 400년에 왜병이 신라 왕경을 침범해왔을 때에는 광개토왕이 보병·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해주기도 하였다.3) 그러나 눌지왕대(재위 417∼458)에 들어와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이에 대비한 나제동맹의 체결 이후 양국 사이에서 파열음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눌지왕 34년(450, 장수왕 38) 7월에 하슬라 성주(何瑟羅城主) 삼직(三直)이 고구려의 변장을 실직(悉直)들에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신라왕이 사과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4) 그후 자비왕 7 년(464 장수왕 52)에 신라군이 경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인 100명을 살해한 사건5)을 계기로 양국 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고구려는 장수왕 56년(468)에 말갈 군사와 함께 신라의 실직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장수왕 69년(481, 소지왕 3)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동해안 일대를 점령하기에 이른다.6)
이러한 사실은『삼국사기』지리지에 통일신라 때 명주를 구성한 간성·고성·영덕·흥해·울진·청하 등 동해안 지역과 임하·영월 등 영서의 일부 지역들이 본래 고구려의 군현(郡縣)이었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양양은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이라 하였고, 동산(洞山)은 혈산현 (穴山縣)이라 하였다.
신라가 고구려에 빼앗긴 동해안 영토를 다시 수복하는 것은 6세기 초 지증왕 때 와서이다. 지증왕 6년 (505)에 주군현(州郡縣)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실직주를 설치하고 거기에 신라에서 가장 명망 하는 인물인 이사부를 군주(軍主)로 파견하였고,7) 7년 후에는 실직보다 북쪽에 위치한 하슬라주(강릉) 군주로 파견하였다.8) 진흥왕 17년(556)에는 비열홀주(比列忽州, 지금의 안변)를 설치하고, 사찬(沙●) 성종(成 宗)을 그 군주(軍主)로 삼았다. 그러나 비열홀주가 설치된 지 12년 후에는 이를 폐지하고 달홀주(達忽州, 지금의 고성)를 설치하였다.
무열왕 때부터 시작된 신라의 통일전쟁은 문무왕 때에 이르러 원산만과 대동강을 잇는 그 이남 지역을 확보하였다. 그 결과 신라는 백제의 영토 모두와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게 되어 영토와 인구가 이전에 비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신라의 중대 왕실은 신문왕대(재위 681 ∼692)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다. 9주의 분포를 보면, 옛 고구려 땅에 3개 주, 옛 백제 땅에 3개 주, 소백산맥 이남 원래의 신라 땅에 3개 주를 두었다. 오늘날 강원도는 삭주(朔州)와 명주(溟州)에 속해 있었는데, 영동지방은 명주에 속해 있었다.
명주는 강릉을 주치(州治)로 한 직할지와 곡성군·야성군·유린군·울진군·내성군·삼척군·수성군·고성군·금양군 등 9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9) 지금의 행정구역에서 보면, 영동지방 대부분과 평창군·영월군·정선군, 경상북도 북부의 해안쪽 대부분, 함경남도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지금의 양양은 익령현(翼嶺縣)으로 편제되었으나 독립된 현이 아니라 수성군(守城縣)의 속현(屬縣)이었다. 수성군은 관할 영역은 오늘날 고성군에서 양양군까지로 추정된다.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는 하대로 들어오면서 서서히 쇠망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대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 4년(768)에 일어난 대공(大恭)의 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대공의 반란은 전국의 96각간이 3개월 동안 서로 싸웠다고 전할 정도로 일찍이 보지 못한 대란이었다. 이는 신라 중대 왕실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10)
싸움의 양상은 현 집권자인 혜공왕파와 반(反)혜공왕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전자의 대표적 인물이 김지정 (金志貞)이었고,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 김양상(金良相)·김경신(金敬信)이었다. 여기에서 반혜공왕파가 승리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37대 선덕왕(780∼785)이다. 선덕왕은 무열왕계가 아니라 내물왕 10세 손이었다. 이러한 방계 출신인 선덕왕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무열왕계가 왕위를 계승하던 중대는 종언을 고하고 하대가 시작되었다.
신라는 하대에 들어 150여 년 사이에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대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분열과 대립이 격화되었고, 이에 따라 중앙의 정치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귀족과 사원은 권력·고리대 등 불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탈점해서 전장(田莊)이라 불리는 대토지를 소유하였다. 『신당서』신라전에는“재상의 집에는 녹(祿)이 끊이지 않고 노비가 3천 명이나 된다. 갑병(甲兵)과 소·말·돼지 등도 이와 맞먹는다. 가축은 바다의 산에 방목을 했다가 필요할 때면 활을 쏘아서 잡는다. 곡식을 남에게 빌려주어서 늘리는데 기한 안에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았다”고 한 것은 당시 귀족들의 농장경영 실태를 말해준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떠돌아다니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진성여왕3년(889)에 조세독촉을 계기로 농민봉기가 발발하였다. 최초의 봉기는 사벌주(지금의 상주)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이끄는 농민군들이었다. 당시 농민군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왕명을 받고 출동한 영기(令奇) 는 그 위세에 놀라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농민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틈을 타 각처에서 몇몇 지도자들이 세력의 구심점을 형성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 죽주(竹州, 안성)의 기훤(箕萱), 완산(完山, 전주)의 견훤(甄萱), 명주(溟州)의 김순식(金順式) 등이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연출되어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 그리고 종래의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9세기말 명주는 궁예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궁예는 한 때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당시 영토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였던 인물이다. 특히 명주는 궁예가 세력을 구축하는데 기반이 된 곳이기도 하다. 궁예가 명주에 들어올 때의 군사는 600여 명이었으나 명주에 도착한 후에 3,500명으로 불어났다. 즉 궁예는 명주 땅에서 명주호족과 농민, 승려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기에 원래 그의 군사보다 5배나 늘어났던 것이다. 궁예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양양을 거쳐 저족(猪足, 인제)·성천(●川, 화천)·부약(夫若, 김화)·금성(金城, 김화)·철원(鐵圓, 철원) 등을 정복하였고, 얼마 후 왕건 부자와 패서(浿西, 평양 이남 예성강 이북) 일대의 호족세력의 귀부(歸附)를 받아 서쪽과 남쪽 방면으로 진출하여 공주에서 영주를 잇는 선의 이북 지역을 거의차지하는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궁예는 901년에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고려’를 건국하였다.
왕위에 오른 초기에 궁예는 사졸(士卒)들과 침식을 같이하고 상벌을 공평하게 하는 등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전제적이고 급진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신라에 대한 극심한 적대의식으로 신라를‘멸도(滅都)’라 부르고, 신라에서 오는 자를 모두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지식인과 호족들이 서서히 그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 사회의 중간계층이었기 때문에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궁예 휘하에서 동궁기실(東宮記室)까지 지냈던 박유(朴儒)는 산속으로 숨어버렸으며, 장주(掌奏)의 직책에 있던 최응(崔凝)은 궁예가 왕건에게 모반 혐의를 뒤집어씌울 때 왕건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궁예는 결국 왕위를 왕건에게 내주게 되었다.
918년에 궁예의 세력기반을 물려받아 새 왕조의 창시자가 된 태조 왕건은 국호를‘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천수(天授)’라고 정하였다. 그러나 왕건 앞에는 허다한 난관이 가로 놓여 있었다. 왕건이 즉위한 5일째 되던 날 혁명 내부세력 가운데 왕건의 왕위를 넘보고 왕권에 도전한 반(反)혁명 사건이 발생하였고, 얼마 후 궁예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청주지역 호족들이 모반을 꾀하여 왕건에 저항하였다.
이와 같이 왕건은 즉위한 후에 궁예를 지지하고 있던 각 지역 호족세력들의 반발과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정세를 관망하고 있던 호족세력들이 후백제로 기울어짐에 따라 정치적 불안이 가중 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후백제 영역과 근접한 지역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명주장군 김순식도 왕건이 즉위한 후에 불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건이 해야 할 일은 먼저 궁예정권 하에서 궁예와 결합했던 호족들을 회유·포섭하는 것이었다. 이에 왕건은 제도(諸道)의 호족에게 사절을 보내 후한 예물을 주며 말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겸양의 덕을 발휘하여 호족들을 포섭하였다. 그러자 각지의 호족들이 해가 거듭될수록 고려에 많이 귀부해 왔다. 왕건은 귀부해 오는 호족에게 토지와 저택을 주기도 하고 관리의 등급[官階]을 수여해주면서 그 통치권을 인정해 주었다. 왕건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들과 결혼하기도 하였다. 이는 왕건이 호족의 딸들과 정략결혼을 통해 집권은 물론,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활용한 측면이 강하다. 이로 인해 정권의 안정은 이루지만 왕건 사후에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중요한 호족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왕씨 성을 하사하여 가족과 같은 대우를 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많은 호족들이 귀부해 왔다. 왕건은 명주호족 김순식을 귀부시키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하였다.
김순식의 귀부는 3차에 걸쳐서 진행된다. 태조 5년(922) 7월에 왕건이 순식의 아버지 허월을 보내어 타이르니, 순식은 그의 장자 수원(守元)을 보내어 1차 귀부하였다. 이 때 왕건은 수원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고 전택(田宅)을 주었다. 그러나 순식의 이러한 귀부는 왕건에게는 매우 소극적이고 불만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왕건은 순식 자신의 완전한 귀부를 위해 더욱 노력하였을 것이다. 1차 귀부를 한 지 5년이 지난 태조 10년(927) 8월에 순식은 다시 아들 장명(長命)과 군사 600인을 보내서 고려 궁궐을 숙위하게 하였다. 이에 태조는 순식의 소장(小將) 관경(官景)에게 왕씨 성과 관계(官階)를 수여하고, 그 아들 장명에게는 염(廉)이란이름과 원보(元甫)라는 관계를 주었다. 김순식 본인이 몸소 휘하 세력을 이끌고 왕건에게 완전히 귀부하는 것은 태조 11년(928)에 들어와서이다. 이때 왕건은 순식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고 대광(大匡)이라는 관계를 주었다. 대광은‘크게 나라 일을 바로잡을 만한 위치’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대광은 살아있는 인물에게 주었던 관계 중 최고위였다. 태조대에 대광의 관계를 수여한 예는 재경세력(在京勢力) 중에는 몇몇 있었으나, 지방세력 중에서는 순식이 최초였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볼 때 당시 김순식의 위치가 얼마나 컸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왕건은 명주호족 김순식과 김예로부터 군사적 도움을 받아 태조 12년(929) 12월부터 시작된 고창군(안동)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이 전투의 승리로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110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의 세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김순식과 김예는 태조 19년(936)에 후백제를 공멸(攻滅)할 때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통일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순식은 얼마 안 가서 중앙정계에서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태조 19년 이후부터 순식에 관해 전혀 자료가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가문이 그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가 도태되었거나, 아니면 광종의 호족억압책으로 제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김예 계열은 건재하였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를 갖추고 출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신라 말이래 강력한 지방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초기에는 한동안 지방세력의 자율적 지배를 인정했고, 지방관을 파견 하여 중앙정부의 의사를 지방에 직접적으로 관철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국초에는 다만 서경(西京, 평양)을 비롯한 몇몇 요지에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관리를 파견하였고, 조세수취를 위해 금유(今有)·조장 (租藏)과 전운사(轉運使) 등으로 불린 비상주 관원을 파견하였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50년 가까이 지난 성종 원년(982) 6월에 주요 거점지역에 12목(牧) 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11)
12목은 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해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황주였다. 성종대에 12 목에 목사를 파견한 것은 민정적(民政的) 지방행정관 파견의 시초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며, 이는 지방 호족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통제에 나서게 된 것을 의미한다.12)
지금의 강원도 지역은 12목에서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지방호족의 세력 하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 된다.
성종 14년(995)에는 처음으로 전국을 10도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12목이 설치되었던 큰 주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이보다 작은 주에 도단련사(都團練使)·단련사(團鍊使)·자사(刺使)·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였다.13)
그러나 목종 8년(1005)에 절도사만 남고 양계지방을 제외한 지역에서 도단련사·단련사·자사는 혁파되었다. 10도제가 실시되면서 양양은 익령현으로 삭방도(朔方道)에 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도기를 거쳐 현종 9년(1018)에는 전국을 5도와 양계(兩界)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경(京)·도호부(都護府)·목(牧)을 위시하여 군(郡)·현(縣)·진(鎭)에 지방관을 상주시키는 형태로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5도의 위치와 관할지역 범위는 양광도가 지금의 경기도·충청남북도와 강원도 영서지방의 남부지역 일부를 포함하며, 경상도가 지금의 경상남북도, 전라도가 지금의 전라남북도, 교주도가 지금의 강원도의 영동지방을 제외한 영서지방의 대부분 지역, 서해도가 지금의 황해도 지역이었다. 양계 중 북계(北界)의 관할 범위는 천리장성 이남의 평안남북도 지역이었고, 동계(東界)14의 관할 범위는 지금의 영동지방 대부분과 함경남도 정평(定平) 이남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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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의 관할 하에는 1도호부(都護府)·9방어군(防禦郡)·10진(鎭)·5현(縣)이 있었는데, 25현은 주현이 8 곳이고 속현이 17곳이었다. 익령현(양양)은 동계의 행정구역 가운데 준남도지역에 속해 있었다. 동산현은 본래 고구려 혈산현(穴山縣)이었으나 통일신라 경덕왕 때 동산현으로 고쳐서 명주(溟州)의 속현으로 하였던 것인데, 현종 9년(1018)에 익령현의 속현으로 하였다. 익령현은 고종 8년(1221)에 몽골군을 격퇴시킨 공으로 양주(襄州)로 승격되었으나, 고종 44년(1257)에 적에게 항복한 사건으로 덕녕현(德寧縣)으로 격하되어 감무가 파견되었다. 원종 원년(1260)에 다시 양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 지방제도의 정비는 태종대를 전후한 15세기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고려의 다분히 신분적이고 계층적인 군현체제를 명실상부한 행정구역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속현과 향·소·부곡 등 임내(任內)의 정리, 규모가 작은 현의 병합, 군현 명칭의 개정 등 지방제도의 전반적인 개혁을 단행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군현은 토지와 인구의 규모에 따라 주·부·군·현으로 구획되었고, 거기에 대응하여 부윤(종2품)·대도호부사(정3품)·목사(정3품)·부사(종3품)·군수(종4품)·현령(종5품)·현감(종6품)이 파견되었다.
양양은 태조 6년(1397)에 태조 이성계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종3품의 읍격(邑格)인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태종 16년(1416)에 양양(襄陽)으로 개칭됨으로써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양양도호부는 광해군 10년 (1618)에 역난(逆亂)에 연루되어 양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인조 원년(1623)에 양양도호부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인조 6년(1628)에 역난으로 재차 양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인조 15년(1637)에 양양도호부로 복구되었다. 정조 7년(1783)에 역적 이경래(李京來)가 양양 임천리에 거주하였던 사람이라 하여 양양현으로 강등되 었다가 정조 16년(1792)에 양양도호부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 강원도를 대표하던 강릉과 원주가 정치적·사회적 사건으로 일시 격하될 때에는 도의 이름을 원주와 양양의 머리글자를 딴‘원양도’, 또는 강릉과 양양의 머리글자를 딴‘강양도’로 바뀔 정도로 도를 대표 할 만한 위치로까지 부각되었다.
강원도의 도명은 태조 4년(1395)에 도내의 거읍(巨邑)인 강릉의‘강(江)’자와 원주의‘원(原)’자를 취하여 명명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릉과 원주의 읍호 승강(昇降)에 따라 도명이 무려 10여 차례의 변경과 복칭이 반복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불효(不孝)·패륜(悖倫)·역모(逆謀) 등 강상(綱常)에 위배되는 중죄인이 발생 하였을 때 그 죄인 뿐 아니라 그 지방 군현의 등급까지 강등하였기 때문이다.
현종 8년(1667)에 강릉지방에서 박귀남(朴貴男)이라는 사람이 전염병이 걸리자 그의 처와 딸, 사위가 공모하여 그를 산곡(山谷)에 생매장한 일이 발각되어 딸과 사위는 처형되었으며, 부사는 파직되고 강릉대도호부는 강릉현으로 강등되었다. 그리하여 강원도는 강릉의‘강’자를 빼고 대신 양양의‘양’자를 취하여 원양도로 개칭되었다가, 9년 후인 숙종 2년(1676)에는 다시 강원도로 복구되었다. 숙종 9년(1683)에는 원주에서 강상죄가 발생하자 이번에는 강원에서‘원’자를 빼고 양양의‘양’자를 취하여 강양도로 개칭되었으나, 동왕 14년(1688)에 양양이 역적의 태향(胎鄕)이라고 해서‘양’자를 빼고 춘천의‘춘’자를 넣어서 강춘도로 개명 되었다가 동왕 19년(1693)에 이르러 강원도로 복구되었다. 이 같은 읍호(邑號)의 승강(昇降)으로 도명의 개칭은 있었지만, 도명은 대개 10년 이내에 복구되었다.
1895년 지방관제가 바뀌어 전국이 23부로 편성되면서 강릉부 관할 양양군으로 편제되었다. 1896년 다시 지방관제가 개편되어 전국이 13도로 나뉘자 강원도 관할 양양군이 되었다. 1919년 5월 15일에는 간성군이 고성군으로 바뀌면서 그 관할 하에 있던 토성면(土城面)과 죽왕면(竹旺面)이 양양군으로 편입되었다. 1945 년 광복되면서 현남면·현북면과 서면의 일부가 강릉군에 편입되었다. 1954년 10월 21일「수복지구임시행 정조치법」에 따라 현남면은 명주군에, 현북면과 서면은 양양군에 복귀되었다. 1963년 1월 1일에는 속초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어 나가고, 죽왕면·토성면이 고성군에, 명주군 현남면이 양양군으로 환원되었다.


 

3. 양양의 명칭 유래


조선초에 편찬된『세종실록지리지』와『고려사』지리지에는 다수의 지명별호가 나타난다. 전자에는‘순화 소정(淳化所定)’·‘성종십년신묘소정(成宗十年辛卯所定)’·‘성종소정(成宗所定)’의 별호로 되어 있고, 후자에는‘성묘소정(成廟所定)’의 별호로 되어 있다.15)‘성종소정’은 성종 때 제정된 군현의 별칭인‘성묘별호 (成廟別號)’를 나타낸 것인데, 이는‘순화별호(淳化別號)’16)와 같은 성격으로 파악된다.
성묘별호의 제정에 대해서는『세종실록』지리지, 경기 광주목 세주(細註)에“성종 10년(991) 신묘에 주군 (州郡)의 별호를 정하였는데, 광주를 회안(淮安)이라 한 것은 곧 송나라 태종 순화(淳化) 원년이다. 뒤에 무릇 순화에 정한 바라 한 것은 모두가 이와 같다.”고 하였다.17) 그런데『고려사』지리지에는 광주의 별호를‘회안(淮安)’이라 한 점은 같지만 군현 말미에‘성묘소정(成廟所定)’이라고 부기되어 있을 뿐이다. 이 때의 개편에 대해『고려사』에는 성종 11년에“주부군현(州府郡縣)과 관역강포(關驛江浦)의 명칭을 고쳤다”고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성종 10년이라 한 것은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의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즉위년칭원(卽位年稱元)으로 인한 오차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필자는 성묘별호의 제정을 성종 11년이라본다.18)
성묘별호는 대개 중국의 지명을 그대로 채용하거나 아화(雅化)된 명칭이었다. 예컨대 경주는‘낙랑(樂浪)’, 춘천은‘수춘(壽春)’이라 하였다. 그런데 성묘별호의 제정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따라서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려 성종대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19)
성종대에는 유교적 체제 확립과 중국제도의 수용이 진행되고 있었다.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경관(京官) 5품 이상의 신하들에게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하는 글을 올리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가 올린 시무책을 대부분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유교정책을 펴 나갔다. 성종은 즉위년(981)에 팔관회를 폐지하였고, 성종 2 년(983)에는 처음으로 적전례(籍田禮)를 지냈으며, 성종 7년(988)에는 오묘(五廟)제도를 정하였다. 성종 10 년(991)에는 토속신앙을 줄이는 사직제(社稷制)를 마련하였다. 성종의 유교정책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종묘(宗廟)·사직(社稷) 등을 설립하고 여기에서 유교의례에 따라 국가의식을 거행했다는 점이다. 고려말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이제현이 성종의 치적을 평가하는 가운데“입종묘 정사직(立宗廟定社稷)”을 제일의 업적으로 꼽았던 것도 이에 기인하는 바이다.20)
고려의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당(唐)이 멸망하고 5대(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가 교체되고 주변지역에서는 10국의 흥망이 거듭되는 혼란기였다. 고려와 중국과의 통교는 고려 태조 6년(923)경에 후량과의 교빙이 열리기 시작하여 그 후 후당과도 교빙이 자주 행해졌다. 후주로부터 선양의 형식을 취하여 960년에 건국된 송(宋)과 고려와의 국교가 처음 열린 것은 광종 13년(962)이었다. 그것은 고려 측에서 광평 시랑 이흥우(李興祐)를 파견한 데 대해 송이 이듬해 책명사(冊明使) 시찬(時贊)을 보내 답빙(答聘)함으로써 열리게 되었다. 성종대의 외교는 12년 5월 거란 침입이 있기 전까지 송나라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 다. 양국 간의 교섭은 공식적인 접촉뿐만 아니라 비공식적 혹은 무역을 통한 접촉도 매우 빈번하였다. 그 과정에서 송의 문물이 활발히 입수되어 집권세력이 주도한 유학적 체제정비의 방향이 중국을 모델로 삼은 화풍(華風)의 형태로 추진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성묘별호는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성종 때 중앙에 진출하여 있던 관인들이 당대(唐代)의 군망(郡望, 어느 지방의 명망 있는 가문)정책을 모방하는 선상에서 그들의 출신(出身) 기반의 명칭을 등재하여 둘 필요에서 성묘별호를 추진하였을 가능성 도 상정할 수 있다.21)
성묘별호는『고려사』지리지에 모두 53개가 기재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모두 47개가 기재되어 있다. 전자에는 없으나 후자에 기재되어 있는 별호 2개를 합하면 모두 55개이다.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 < 표-2>와 같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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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별호가 부여된 곳의 읍격(邑格)은 대개 주(州)였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의 29비(妃) 출신지로서 주 (州) 이상의 지역은 성묘별호가 있었다.23) 성묘별호가 수록되지 않은 주(州)들은 다음의 몇 가지 근거를 통해 성묘별호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고려사』식화지 조운조에 보이는 성종 11년의 조선 수경가(漕船輸京價) 기사와 성종 14년 주-현체계 하에서 사용된 현명(縣名)이다. 성종 11년의 조선 수경가 기사는 조운이 이루어지는 각 포구에서 개경까지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의 수송비를 10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규정한 것이다. 이 기사에는 해당 포구의 소재지가 군 또는 현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명칭 중에는 성묘별호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성종 14년의 군현제 개편에서는 절도사·단련사·자사 등의 외관이 주(州) 단위로 설치되었는데, 이들 주(州)는 대개 성묘별호를 가지고 있다. 이상의 명칭 중에는 성묘별호가 직접 반영되어 있으므로 이를 통해 성묘별호를 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수경가 기사는 주로 경상남도에서 황해도 이르는 연해지역과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내륙지역에 한정되어 있어 양양의 성묘별호를 추정할 수가 없다. 양양의 성묘별호는 봉작명을 통해 추정할 수 있 다.
고려시대 봉작은 종실(宗室)과 이성제군(異姓諸君)에게 수여되었다. 종실에 대한 봉군(封君)은 태조 때부터 등장하고, 이성(異姓)에 대한 봉군은 경종 5년(980)에 최지몽(崔知夢)이 동래군후(東來郡侯)로 봉해진 것이 최초이다. 종실에 대한 봉작은 주로 개성국공(開城國公)·진한후(辰韓侯)·낙랑백(樂浪伯)·평양공(平壤 公) 등 국명 내지 지명과 연관된 공·후·백의 봉작명이 주어졌고, 이성제군에 대한 봉작은 동래군후(東來郡侯) 청하현개국남(淸河縣開國男)과 같이 군현과 연관된 공·후·백·자·남의 봉작명이 주어졌다.24) 고려시대 자료에서는 정식 지명이 봉작명에 쓰인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성묘별호가 쓰인 것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양양이라는 정식 명칭은 조선 태종 16년(1416)에‘양양부’라고 칭하면서 비롯되었는데, 그 이전에 이미 봉작명으로 양양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A-① 황원(皇元) 후지원(後至元) 원년 을해년(충숙왕 복위4, 1335) 모월 모일에 고려국왕의 순비 (順妃)가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65세이다. 성은 허씨(許氏)이며, 공암군(孔巖郡) 사람이다. 증조 경(京)은 검교상서우복야 행예빈소경 지제고(檢校尙書右僕射行禮賓少卿知制誥)를 지냈고, 조부 수(遂) 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한림직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禮部尙書翰林直學士 承旨)를 지냈다. 아버지 공(珙)은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를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며 충 렬왕 묘정에 배향되었다.…아들 셋과 딸 넷을 두셨다.…맏딸 영복옹주(永福翁主)는 양양군(襄陽君) 김대언(金臺彦)에게, 둘째 딸 연희옹주(延禧翁主)는 중서좌승(中書左丞) 길길반(吉吉反)에게 각각 출가했다( 『忠宣王妃順妃許氏墓誌銘』).
A-② (현종의 증손) 왕선(王瑄)이 양양군(襄陽君)에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 왕규(王珪)는 수연군(壽延君)에 책봉되었다가 공양왕 4년(1392)에 먼 지역으로 유배갔다( 『고려사』권90, 열전3 宗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양양’이라는 명칭은 태종 16년(1416)에 정식 명칭이 채용되기 이전인 충숙왕 복위 5년(1336)에 세워진「충선왕비순비허씨묘지명(忠宣王妃順妃許氏墓誌銘)」과 고려 말에‘양양군(襄陽君)’이라는 봉작명을 부여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양양’이라는 명칭은 성묘별호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는 강릉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강릉이라는 정식 명칭은 충렬왕 34년(1308)에‘강릉부’라고 칭하면서 비롯되었는데, 그 이전에 이미 봉작명으로 강릉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B-① 예종 12년(1117)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문하시랑 감수국사 상주국 강릉군개국후(開府儀同 三司守太保兼門下侍郞監修國史上柱國江陵郡開國候) 김연(金緣)에게 식읍(食邑) 1,300戶에 식실봉 (食實封) 300戶,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하였다( 『고려도경』권6, 延英殿閣).
B-② 인종 계해 21년(1143) 6월 임자일에 광평후(廣平侯) 왕원(王源)을 수태보(守太保)로, 광평공(廣平公) 사도(司徒) 왕온(王溫)을 수태위(守太尉) 강릉후(江陵侯)로 각각 임명하였다( 『고려사』권17, 인종세가).
B-③ 의종의 장경왕후(莊敬王后) 김씨(金氏)는 종실 강릉공(江陵公) 온(溫)의 딸이다. 의종이 태자로 있을 때에 비(妃)로 맞아 들였는데 인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서를 내리고 예물을 주었다.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덕궁주(興德宮主)로 봉하였다. 그는 효령(孝靈) 태자 왕기(王祈)와 경덕(敬德), 안정(安 貞), 화순(和順) 세 궁주(宮主)를 낳았다( 『고려사』권88, 열전1 后妃).

위의 기사 B-①은 예종 12년(1117)에 김연(金緣)을 강릉군개국후(江陵郡開國候)에 봉한 내용이고, B-②는 인종 21년(1143) 왕온(王溫)을 강릉후(江陵候)에 봉한 내용이다. 전자는 이성제후에 대한 봉작이고, 후자는 종실에 대한 봉작이다. B-③은 의종의 왕비 장경왕후 김씨가 종실 강릉공(江陵公) 온의 딸이라는 내용이다. 이들 기사는 예종대부터 명종대에 걸쳐‘강릉군개국후’·‘강릉후’·강릉공’이라는 봉작명을 부여한 사례이다.
부인의 봉작은 책봉 때의 부(夫)나 자(子)의 관직과 부(父)의 본관에 따라 그 지명이 부여되었다. 부인의 봉작 사례를 제시하면 다음 <표-3>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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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례에서「옥구군부인송씨준호구」에는 문종 7년(1053)에 최충의 모친 김씨가‘강릉군부인’에 봉해진 것을 비롯하여 문종 8년(1054)에 건립된「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국사의 모친 방씨가‘강릉군부인’에 봉해졌고, 인종 15년(1137)에 건립된「정항묘지명」에는 정항의 아내이며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 事) 경렬공(景烈公) 국모(國●)의 딸 왕씨가 거듭‘강릉군부인’에 봉해졌다. 의종 16년(1162)에 건립된「최윤의묘지명」에는“최용의 어머니는 강릉군대부인 왕씨이다”고 하였다. 이들 사례는 문종대(1053)부터 의종대 (1162)에 걸쳐 부인(夫人)에게‘강릉군(대)부인’을 부여한 봉작명이다.
이상의 사례에서 보듯이‘강릉’이라는 명칭은 충렬왕 34년(1308)에 정식 명칭이 채용되기 이전에 이미 봉작명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강릉’이라는 명칭은 성묘별호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는 양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그러면‘양양’이라는 별호가 지리지에 기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지리지 정리과정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컨대『고려사』지리지는 읍호 선정이나 연혁의 삽입 등에서 일정한 기준을적용하고 있는데, 성묘별호의 선정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별호가 뒤에 정식 읍호로 사용되는 경우가 주목된다. 정식 읍호가 따로 있는 상황에서 해당 이칭(異稱)은 별호로 간주되겠지만, 일단 연혁에 포함되면 이것은 더 이상 별호로 분류될 수 없다. 실제 성묘별호가 연혁 중에 등장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봉작명 등에 자주 사용되는 칭호가 연혁 중에 포함되어 있는 양주-양양의 경우에는 누락이 아니라 별호에서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고려사』열전과 묘지명(墓誌銘·탑비명(塔碑銘) 등에는 해당 인물의 출신지 내지 본관(本貫)을 밝혀놓았는데, 그 표기는 보통 해당 인물의 몰년(沒年)을 전후한 시점의 지방행정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강릉이라는 정식명칭을 사용하기 전에는 출신지와 본관을‘명주인’이라 하였다.25)

C-① 스님의 휘는 결응(決凝)이고, 자는 혜일(慧日)이며 속성은 김씨(金氏)이니, 그의 선조(先祖)는 명주인(溟州人)이다( 「부석사 원융국사비」, 문종 8년<1054>).
C-② (강릉군대)부인 김씨는 그 선조가 해동(海東) 명주인(溟洲人)으로, 신라왕의 자손이다( 「崔湧妻 金氏墓誌銘」, 의종 3년<1149>).
C-③ 김의광(金義光)은 명주인(溟州人)으로 증조 양황(陽皇)과 할아버지 상기(上琦)는 문하평장사(門 下平章事)를 지냈고, 아버지 고(沽)는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으며, 어머니 유씨(柳氏)는 문하시중 류홍(柳洪)의 딸이다( 「正覺首座義光墓誌銘」, 의종12년<1158>).
C-④ 공의 이름은 영석(永錫)이고, 자는 □□이며, 명주인(溟州人)이다.…아버지는 배향공신(配享功 臣)이자 수대부 문하시중 판상서이형부사(守大傅門下侍中判尙書吏刑部事)인 인존(仁存)이고, 조부는 수대위 문하시랑평장사 판예병부사(守大尉門下侍郞平章事判禮兵部事)인 상기(上琦)이다( 「金永錫墓誌 銘」의종 21년<1167>).
C-⑤ 문한경(文漢卿)은 명주인(溟州人)인데, 그의 조부 문유보(文儒寶)는 우복야(右僕射)를 지냈다 『( 고려사』권101, 열전14 문한경).

그리고 관직명과 성곽명은‘명주부사’·‘명주성’이라 하였다.

D-① 고종 14년(1227) 11월 계사일에 정공수(丁公壽)를 남경유수로, 조염경(趙廉卿)을 명주부사(溟 州府使)로 각각 강직시켰다( 『고려사』권22, 세가22).
D-② 태학박사 노보여(盧寶璵)가 울주방어부사(蔚州防御副使)가 되었다. 이때 송유인은 외관(外官) 은 문무관을 교대로 배치하는 것이 성법(成法)으로 되어 있는데 현임 울주 판관이 문관이므로, 또 노보여를 제수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명주부사(溟州副使)와 관성(管城) 현령이 모두 문관이며 이부에서도 문관을 판관(判官)과 위(尉)로 임명하였고, 성(省)에서도 이미 서명하였었다. 노보여는 이러한 실례들을 들어 송유인에게 질문하니 송유인이 노하였다. 그러나 이미 잘못 서명하였으므로 사세가 성에서 왕에게 제의할 수는 없었던 만큼 중방(重房)을 부추겨 가지고 왕에게 반대 제의를 하였다. 이리하여 노보여와 명주판관(溟州判官)과 관성위(管城尉)가 모두 다 부임하지 못하였다( 『고려사』128, 열전41 반역2 정중부).
E-① 덕종 3년(1034)에 명주성(溟州城)을 수리하였다( 『고려사』권82, 지36 병제2 성보).
E-② (김취려가) 적을 추격하여 명주 대관산령(大關山嶺)에 이르러서는 장졸들이 겁을 먹고 열흘 동안이나 머물다가 진군하니 적군은 이미 영을 넘어간 뒤였다. 중군, 좌군, 전군이 다시 적을 추격하여 명주 모로원(毛老院)에 이르러 교전하여 적을 격파하고 옥대(玉帶), 금(金)·은패(銀牌), 무기 등을 노획하였다. 적군이 명주성(溟州城)을 포위하고 있으므로 4군이 적을 추격하기로 하였으나 후군이 미처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강주(剛州)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고려사』권103, 열전16 김취려).

위의 사례 C~E에서 보듯이 강릉이라는 정식명칭을 사용하기 전에 출신지 내지 본관은‘명주인’, 관직명은‘명주부사’,‘ 명주판관’, 성곽명은‘명주성’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충렬왕 34년(1308)에 읍호가 강릉부로 개정되면서 출신지와 본관 표기는‘명주인(溟州人)’에서 ‘강릉인(江陵人)’으로 바뀐다. 이는 관직명과 성곽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실은 충선왕 원년 (1309) 8월에 세운「삼일포매향비(三日浦埋香碑)」에 지강릉부사(知江陵府事)와 (강릉)판관(判官)이 매향(埋香)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과 고려말 이곡(李穀)이 지은「염양사중흥기(艶陽寺重興記)」에 박징(朴澄)이 그의 어머니 분묘를 강릉성(江陵城) 북쪽에 장사를 지낸 뒤에 폐찰 염양사를 중건한 것에서 확인된다. 이는 양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4. 맺음말


양양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는 것은 태종 16년(1416)에 양주에서 양양으로 개칭하면서이다. 조선 초에 편찬된『세종실록』지리지와『고려사』지리지에는 중국의 군현 명칭을 그대로 채용하거나 아화(雅化)된 명칭인
다수의‘성묘별호’가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성묘별호’가 고려 성종 11년(992)에 제정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그 제정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런데『세종실록』지리지와『고려사』지리지에는 양양에‘성묘별호’를 부여하였다는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양양의‘성묘별호’는 봉작명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 봉작은 종실(宗室)과 이성제군(異姓諸君)에게 수여되었다. 종실에 대한 봉작은 주로 국명 내지 지명과 연관된 공·후·백의 봉작명이 주어졌고, 이성제군에 대한 봉작은 군현과 연관된 공·후·백·자·남의 봉작명이 주어졌다. 양양이라는 명칭은 태종16년(1416)에 정식 명칭이 채용되기 이전인 충숙왕 복위 5년(1336)에 세워진「충선왕비순비허씨묘지명(忠宣王妃順妃許氏墓誌銘)」과 고려 말에‘양양군(襄陽君)’이라는 봉작명을 부여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양양’이라는 명칭은 성묘별호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양양’이라는 별호가『고려사』지리지와『세종실록』지리지에는 기재되지 않다. 그 이유는 지리지 정리 과정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정식 읍호가 따로 있는 상황에서 해당 이칭(異稱)은 별호로 간주되겠지만, 일단 연혁에 포함되면 이것은 더 이상 별호로 분류될 수 없다. 실제 성묘별호가 연혁 중에 등장하는 경우 가 전혀 없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봉작명 등에 자주 사용되는 양양의 경우에는 누락이 아니라 별호에서 제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사』열전과 묘지명·탑비명 등에는 해당 인물의 출신지 내지 본관을 밝혀놓았는데, 그 표기는 보통 해당 인물의 몰년(沒年)을 전후한 시점의 지방행정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강릉의 경우 정식명칭이 채용되기 전에 출신지와 본관 표기는‘명주인(溟州人)’, 관직명 표기는‘명주부사(溟州府使)’·‘명주판관(溟州判官)’, 성곽명 표기는‘명주성(溟州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충렬왕 34년(1308)에 읍호가 강릉부로 개정되면서 출신지와 본관 표기는‘명주인’이‘강릉인’으로, 관직명과 성곽명 표기는‘명주부사’·‘명주성’이‘강릉부사’·‘강릉성’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양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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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趙東杰, 1968 「江陵地方의 先史社會硏究一江陵濊地說의 史的背景」『春川敎大論文集』5-1. 金澤均, 1997 「江陵濊國說과 관련하여 一」『江原文化硏究』
2)「 (奈勿王)42年秋七月北邊何瑟羅旱蝗年荒民飢曲赦囚徒復一年租調」『(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3) 「광개토왕릉비」광개토왕은 왜병을 격퇴한 후 그 군대의 일부를 신라 영토 내에 계속 주둔시켜서 왕위계승과 같은 신라의 內政에까지 간섭하였다. 「충주고구려비」에는 신라 영토 내에 고구려인 幢主가 주둔하며 군사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이 확인된다(鄭雲龍, 1989 「世紀高句麗勢力圈의 南限『史叢』35, 26쪽).
4)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눌지왕 34년 7월조.
5) 『일본서기』권8, 雄略天皇8년 2월조.
6) 李明植, 2002 『5세기 新羅의 對高句麗關係』『大丘史學』69, 225∼229쪽.
7) 『삼국사기』권35, 지리지2.
8)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지증왕 13년조.
9) 『삼국사기』권35, 지리지2.
10) 이하는 박도식, 2010 『양양군지』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11) 『고려사』권3, 세가 성종 2년 2월조.
12) 邊太燮, 1968 「高麗前期의 外官制」『韓國史硏究』2; 1971 『高麗政治制度史硏究』;, p.122.
13) 尹京鎭, 2001 「高麗성종 14년의 郡縣制改編에 대한 연구」『한국문화』27, p.112.
14) 동계는 성종 14년(995)에 삭방도(朔方道), 정종 2년(1036)에 동계(東界), 문종 원년(1047)에 동북면(東北面), 명종 8년(1178)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 원종 4년(1263)에 강릉도(江陵道), 공민왕 5년(1356)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 공민왕 9년(1360)에 삭방 강릉도(朔方江陵道), 공민왕 15년(1366)에 강릉도로 이름이 바뀌었다.
15)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 다룬 연구로는 浜中昇, 1977 「10世紀末おける高麗州·縣制の施行」『朝鮮學報』84. 北村秀人, 1978 『高麗初 期の漕運について」『古代東アジア史論集』上. 江原正昭, 1979 『高麗朝外官の歷史的展開』『;朝鮮歷史論集」上(旗田巍先生古稀紀念論 叢). 具山祐, 1993 『高麗成宗代의 鄕村支配體制강화와 그 정치·사회적 갈등』『韓國文化硏究』6이 있고,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로는 禹太連, 1987·1988·1989 『高麗初地名別號의 制定과 그 運用』(上·中·下) 『慶北史學』10·11·12. 尹京鎭, 2002 『고려 성종 11년의 읍호개정에 대한 연구』『역사와 현실』45가 있다.
16) 淳化는 990년부터 994년까지 사용된 宋太宗의 연호이다. 이는 고려 성종 9년부터 13년에 해당된다.
17)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성종 10년 신묘에 州郡의 別號를 정했다고 하면서 그것을 宋太宗淳化元年이라 하였는데, 이는 지리지 편찬자의 착오에서 기인한다. 왜냐하면 성종 10년 신묘는 淳化2년이기 때문이다.
18) 성묘별호의 제정에 대해서는 성종 11년의 邑號개정과 구분하여 보는 견해와 이를 동일시하는 견해가 있다. 禹太連은 성묘별호 제정과 성종 11년의 邑號개정은 직접 상관이 없다고 보았으며, 구산우는 성묘별호 제정을 근간으로 하여 11년에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浜中昇은 성묘별호 제정과 성종 14년의 지방제 개편을 동일하다고 하였다. 한편 北村秀人은 성종 10년은 성종 11년의 잘못이라 하였고, 江原正昭와 尹京鎭은 성묘별호 제정과 성종 11년의 읍호 개정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19) 이하는 박도식, 2008 「강릉의 명칭유래」『강원민속학』22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20) 『익제난고』권9下, 史贊成王.
21) 李樹健, 1984 「土姓硏究序說」『韓國中世史硏究』, p.12.
22) 尹京鎭, 2002 앞의 논문, pp.163~165.
23) 성종은 태조 이래 공신의 우대를 강조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한 그들의 후손을 위무하기 위한 정책상의 필요에서 그들의 출신지에 別號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24) 종실에 대해 國名이나 地名을 부여한 것은 중국의 天子가 諸侯國에 봉한 것과 같이 고려에서도 국왕이 왕실을 제후국으로 봉한다는 分封制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중국 봉건제도가 고려에서는 부분적이고 형식적이나마 중국의 축소판으로 행해졌으며, 중국의 천자가 고려 국왕을 봉한 것처럼 고려 국왕도 功臣이나 王室에 대해 책봉의 형식을 취하였다.
25) 명종 20년(1190)에 건립된「文章弼墓誌銘」에는 문장필의 출신지를‘江陵郡人’이라 표기된 경우도 있으나, 그 외 거의 대부분은 ‘명주인’이라 표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