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 역사와 문화재

양양의 역사 - 조선시대 (1392~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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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31회 작성일 2017-09-2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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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1392~1897)


@ 1397년 태조 6년 왕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양주부(襄州府)로승격하고 태종 13년에는 양주도호부(襄州都護府)로 개칭.


@ 1416년 태종 16년에 양양(襄陽)으로 고쳐 현재까지 존속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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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6년 세조대왕은 윤3월 12일에 거둥, 낙산사를 중창케하고 다음날 강릉 연곡리에서 농가경연을 열어 농가를
잘 부른 양양 관노 동구리(同仇里)에 포상하고, 악공(樂工)의 예(禮)로 어가(御駕)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양양문화원은 매년 전통민요 경창대회를 개최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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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0년 성종 21년에 강릉 안인포의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을 양양 조산에 옮기고 대포영(大浦營)이라 칭함.


@ 1520년 중종 15년 대포영에 높이 12척, 둘레 1,469척 석성을 축조 하였다가 인종 4년(1545)에 적합지 못해 혁파(革罷)함.


@ 1529년 양양인 이봉(李●)을 대포수군만호(정3품)로 임명된 사실이 지난 2011년 3월21일 양양지역 전주이씨 문중 선묘 이장 중 묘지석(墓地石)이 출토되면서 밝혀짐.


@ 1561년 악공 허억봉(許億鳳)은 장악원의 첨정 안상(安●)에 의해 적보(笛譜)를 만들었다. 허억봉은 양양관노로 10대 중반에 대금연주에 능함을 인정받아 악공(樂工)으로 불려가 장악원(掌樂院)의 최고지휘자이자 전악(典樂)을 수십 년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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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6년 선조 29년 이전에는 소솔령(所率嶺)이라 부른 것을 오색령(五色嶺)으로 개칭,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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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9년 양양부(襄陽府)에는 8월 25일 미시(未時)에 품관(品官)인 전문위(全文緯)의 집 앞에 세숫대야처럼 생긴 것이 나타나, 땅에 내릴 듯 하드니 곧 올라갔는데, 우레소리가 몇 번 나더니,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다가 그침.
《별에서 온 그대》는 1609년 음력 8월 25일 강원도에서 미확인 비행물체가 목격 되었다는〈광해군일기〉의 기록을 소재로한 공상 과학 SF 로맨스 드라마로 SBS에서 2013년 12월 18일부터 2014년 2월 27일까지 방영된 바 있음.


@ 1628년 양양부사 조위한(趙緯韓)이 노경복·최정립·이현일 등과 상의 조산리에 조인벽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충현사(忠賢祠)를 설립, 위패를 모시고 동명서원(東溟書院)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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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6년과 1683년에 강릉·원주에서 각각 강상죄 발생으로 강원도의 도호(道號)를 양양의‘양’자를 넣어 2회 개칭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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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2년 숙종 8년에 양양부사 최상익이 양양읍 구교리의 향교를 지금의 자리(林泉里)로 이건 함.


@ 1709년 양양부사 이해조(李海朝)는 김창흡(金昌翕)과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 시(詩)를 읊었는데 일명 양양별곡 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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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7년 유경시(柳敬時)는 양양부사 재임시 선정(善政)한 공로로 양양주민이 낙산사 이화정 앞 오동나무로 양양금(襄陽琴)을 제작 기증한 것을, 경상북도는 유형문화재 제314호로 지정, 창랑보(滄浪譜,악보)와 함께 안동시 소재‘한국국학진흥원 유교박물관’에 소장 전시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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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0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양양부사로 봉직할 당시 희대(稀代)의 목민관으로 공직기강확립과 이용후생의 생태정신을 발현 황장목 판교(黃腸木板橋)를 놓았고, 양양에서 녹봉은 1만 2천량을 받았는데“양양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에서 1만 냥을 받았고 녹봉으로 2천 냥을 받았다”는 경관녹봉론(景觀祿俸論)을 제시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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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 고종 33년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행정구역 명칭이 강릉부 양양군에서 강원도 양양군으로 변경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