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9호

[양양소식지 자료(숨어있는 향토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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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903회 작성일 2018-02-12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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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양양팔경가(襄陽八景歌)’는 중국 땅 조선 양양촌에도 있다!


양양팔경가는 강원도 양양에서 창작 처음 불리었는데‘산 좋고 물 맑은 양양 이라네’라는 첫 소절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청정(淸淨)함을 순수하게 표현하면서 전승(傳承)된 자랑스러운 신 민요다. 이 민요(民謠)는 발 없는 말처럼 흔적 없이 국경도 넘고 사상이나 이념을 초월하여 멀리 중국 땅 조선족사회에도 존재한다.
이 노래가 중국 동북지역 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와 중앙아시아까지 어떻게 퍼졌을까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이 노래는 북한에서 불리다가 1970년대 가사만 개사(改詞)되고, 곡조(曲調)는 여전히 북녘 땅에 남아 불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양양팔경가가 중국조선족 사회에 전파된 정확한 경로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북한과 교류가 빈번했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이를 수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한편으로 연변지구에 양양주민 집거마을이었던 조양촌〔朝陽村, 조선 양양촌〕주민들이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면서 부른 것이 전 연변지구에 전파된 것으로 본다.
이에 따라 양양팔경가는 1981년에 출간된『중국조선족민요집』에 수록된 것을 비롯하여 2009년 의무교육 조선족학교 5학년 음악 교과서 하권에 작사자, 작곡자, 가수를 밝히지 않은 채‘조선민요’로만 수록되었고, ‘중국 조선족민간음악집’에도 악보가 실려 있다.
양양팔경가에 대한 각계의 이론(異論)도 다소 있으나, 이종우 전 교장선생님의 중언에 의하면, 1947년 양양초급중학교 2학년 때 합창부 클럽활동에 참여하면서 양양팔경가 작사자(作詞者) 최용대 교장과 작곡자 김태선 선생께 직접 배웠다고 했다.
작사자 최용대(崔容大, 1901. 11. 22~)는 양양읍 조산 출신으로 1925년 양양신청년동맹을 시작으로 신간회 양양지회를 이끈 대중 운동가였다. 1937년부터 2년 동안 동아일보 양양지국장과 당시 양양초급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작곡자(作曲者) 김태선(金泰善, 1909~2000)의 호는 범소이며 양양군 서면 수리 태생으로 8·15광복 후 북한 공산치하에서 양양초급중학교 음악 교사로 재임 시 양양팔경가를 작곡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후 6·25한국전쟁 시 월남하였다가 수복 후 귀향하여 양양국민학교 교장(1953~1954)과 양양면장(1955~1956)을 역임한 바 있다.
양양팔경가는 곡조가 아름다워 부르기 쉬울 뿐만 아니라 맑고 깨끗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노래한 것에서부터 고향을 그리워한 해외동포들의 신민요조의 애향가로써 자리매김은 문화사적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1절>

산 좋고 물 맑은 양양이라네.
우리-자랑은 팔경이로다.
앞뜰엔 동해안 뒤뜰엔 설악산
해안을 끼고도는 낙산사로다.
에헤-좋구 좋다. 팔경이로구나.


<2절>

놀기 좋고 물색 맑은 양양이라네.
우리-자랑은 팔경이로다.
남으론 하조대 북으론 운봉산
청간정을 바라보는 의상대로다.
에헤-좋구 좋다. 팔경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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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역사에 길이 빛날 애국충절(愛國忠節)의 고장, 양양
- 3·1만세운동이 지방에서는 가장 치열했던 곳 -


◆ 만세운동 촉발제인 독립선언서를 들여온 분들!
이석범(李錫範, 1859 ~ 1932) 선생은 양양면 임천리 태생으로 기미년(1919년) 2월에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일본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풍문이 이곳에 나돌아 민족감정이 격앙된 가운데, 양양유림 10여 명과 함께 육로로 한성(漢城)에 올라갔다.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울의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뒤 양양만세운동 전개(展開)를 위해 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겨 오던 중 일본 군경의 검문검색(檢問檢索)을 받게 되자 이를 피하기 위해 검문소에서 소변을 보는 척 하면서 버선 속에 숨겨 무사히 일행과 함께 3월20일 귀향하였다.
조화벽(趙和壁, 1895 ~ 1975) 지사는 양양면 남문리 태생으로 양양교회의 본처전도사(本處傳道師) 조영순의 딸이다. 개성소재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이면서 비밀결사대 일원으로 3월 3일 개성의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휴교령이 내려지자, 독립선언서를 가방에 숨겨가지고 경원선 열차를 이용하여 원산에 도착한 후 다시 뱃길을 이용 대포항구에 도착하였다. 조화벽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경찰이 소지물을 전부 압수하고 나를 경찰서장 관사로 끌고 가 심문을 하였다. 그러나 가방의 버선목 솜 속에 숨겨놓은 독립선언서는 발각되지 않아 그것을 교회청년 김필선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 만세운동은 어떻게 전개 되였는가?
요약하면 1919년 4월 3일에 이석범은 양양면 임천리에서 각 면별로 치밀한 조직을 구성하고 다수군중의 참여를 위해 구장들과 손을 잡았고, 4월 4일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제작에 들어갔다. 반면 3월말 조화벽이 가지고 내려온 독립선언서는 면사무소 고용원 김필선과 등기소 고용원 김계호·김주호 등에게 인계 되어 양양면사무소 창고에서 촛불을 켜놓고 밤샘 등사한 유인물을 본부에 전달했고, 임천리에서는 이교정, 이건충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다가, 군속 심윤택의 밀고로 이동혁 군수가 현장에 출동하여 태극기 374매와 제작도구 등을 빼앗고, 이석범을 비롯한 주모 급 22명을 체포 하자 이들은 다시 양양면 성내리 뒷산의 곳집에서 5천여 개의 태극기(手旗)를 만들었고, 장날인 다음날 양양시장(襄陽市場)을 철시하였음에도 4월 4일아침부터 각 면에서 장꾼을 가장한 만세 시위 군중들이 양양장터로 모여들었다. 전날 연행된 22명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가평리 리장 함홍기(咸鴻基)는 경찰서장실로 뛰어 들어가 서장에게 화로를 던지려 할 때 일본 경찰에 의해 피살 되였고, 격분하여 뒤 따라 들어가 항거하던 간리의 권병연(權柄淵)과상평리의 김학구(金學九)도 일경에 의해 각각 피살되었다.
이에 분노한 만세시위대는 4월 4일부터 양양장터를 중심으로 물치장터 등에서 계속되었는데 4월 9일에는 현북면 하광정리 오익환, 김재한 등 1천여 명의 군중이 처음에는 양양면으로 가려했으나 수비대가 주둔해 있
어 인명피해가 많을 것이 우려된다는 정보를 입수 하고 계획을 변경 기사문리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하고 진출하던 중 미리 잠복중인 수비대와 경찰의 발포로 9명이 피살되는 참상을 입었다.


◆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 영원하리!
일제강점기 한국근현대잡지자료인 개벽42호(1923. 12. 1)에 의하면“己未年民族運動時에 江原道로는 襄陽이 제일 격렬 하얏다. 안이-江原道뿐 안이라 조선에 멧재 안이 갓섯다.”라고 기록하였듯이 양양군의 삼일만세운동은 지역 내 유림세력과 기독교계, 농민, 현산학교, 보통학교 졸업생 등 계층을 가리지 않은 전 군민의 항일운동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양양만세운동은 1919년 4월 3일부터 4월 9일까지 1주일 동안 군내 7개면 1백32리 중 6개면 82리 4천6백 명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참가자는 1만5천여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사상자는 총칼에 쓰러진 12명의 열사를 비롯해 43명, 체포인원은 1백42명, 옥살이를 한 사람은 73명이며 혹독한 태형(笞刑)을 받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하니 당시의 선열들의 독립만세운동이 얼마나 치열하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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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양양의 현산공원을 재조명(再照明)하다!


 양양군민의 애환(哀歡)이 서려있는 곳이다.
현산(峴山)은 일제강점기 오태환〔(吳台煥) 재임기간 1911~1913〕군수가 재임 중에 현산공원(峴山公園)으로 지정한 곳이며 장구한 세월 속에 양양군민의 애환(哀歡)이 서려있는 작은 진산(鎭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산이란 이름의 효시(嚆矢)는 조선 고종 원년(1864)에 김정호(金正浩)가 지은 우리나라 지리책인 대동지지(大東地志) 산수(山水)에 현산은 부(襄陽府) 북쪽 3리에 있다고 했다.
고려 목종 10년(1007)에는 현산에 양주성(襄州城)을 축성하고 주신(主神)인 장군성황신(將軍城隍神)을 모신 성황사(城隍祠)가 있다. 매년 국태민안과 풍농풍어 기원제(祈願祭)를 올렸는데 기원제는 일제강점기에 일시 중단하였다가 광복이후 계속 봉행되고 있다.


◆ 신성(神性)한 곳으로 매년 제례를 봉행한다.
현산공원의 상부에는 성황사가 있다. 여기에 주신(主神)으로 중앙에 將軍城隍神, 좌측에 梅花女城隍神, 우측에 南大川龍王神을 각각 모시고 매년 양양문화재 시 제례봉행 하고 있다.
성황사 앞쪽에는 충열사(忠烈祠)가 있다. 국가보훈처 자료에 의거 독립운동에 참여한 34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데 양양 3·1만세운동 시 일제에 항거하다 순직한 12위의 열사와, 22위의사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현산공원의 하부에는 충혼탑이 있다. 반공애국지사 106위와 6·25한국전쟁 및 월남전에서 전사한 영령187위가 봉안되어 있다. 그 외 각종 기념비 중 행정수복기념탑, 수복기념공병탑(독립문), 필승탑, 양양3·1운동기념비, 조선시대 관찰사, 부사, 현감 등 19기의 비가 현산공원에 보존 관리되고 있다.


◆ 몽골항쟁 시 산화(散花)한 넋을 기리자!

고려사에 의하면 1253년 10월 22일 동북면에서 남하한 몽골군이 통천 방면의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양주성(襄州城)을 진격하였을 때 양양의 부병(府兵)과 부민(府民)들은 결사 항쟁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양주성은 함락되었고, 부병과 부민은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당시 양주성(襄州城)에서 항전하다 돌아가신 수많은 부병과 부민들의 그 수효와 인적상황 기록은 없다하나, 몽골군과 맞서 싸운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고인들의 넋을 기리는 차원에서 몽골항쟁양주부민위령비를 현산공원에 건립하던가, 아니면 무명용사 위령제를 다른 제례 봉행시 함께 지내주어야 이 시대를 사는 후손들의 역할이 아닌 가 한다.
반면 현산공원은 주민의 보건 휴양 및 정서 생활의 향상에 기여하게 하는 본래의 성격보다는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현산추모공원 의미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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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양양지역의 청동기 시대

거석문화(巨石文化)를 살펴보다!


◆ 범부리에는 고인돌길(Dolmen Road)이 있다.
고인돌은 사전적 의미로“지석묘(支石墓, dolmen)로 크고 평평한 바위를 몇 개의 바위로 괴어 놓은 고대의 거석 구조물(Megalith)을 말한다.”라고 했다. 양양군은 지난 2010년 도로명 주소를 만들 때 서면 범부리에 소재한 청동기 시대의 유적(遺蹟)인 고인돌 2기가 있는 곳까지의 진입로 약1km를‘고인돌길’이라고 명명(命名) 고시했다.
흔히 역사는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전통문화의 고장임을 내심 강조하고 있지만, 이처럼 유적지가 소재한 곳을 불특정 다수인들이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쉽게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어휘를 구사(驅使)한 발상은 흔치 않은 일이다.
1970년대 초반 양양읍 감곡리 유물산포지(遺物散布地)와 서면 범부리 고인돌이 확인된 이래 최근까지 포월리, 기정리, 수여리, 금강리, 상양혈리, 밀양리, 포매리, 원포리, 지리, 임호정리, 입암리, 강선리 등에서 다수의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당시 주민들은 주요하천의 나지막한 구릉지대(丘陵地帶)를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가꾸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 발굴되어 남아있는 고인돌 8기의 보전실태는?
(1) 범부리 1호 고인돌은 덮개돌 밑에는 판석으로 크기는 길이 2m, 너비 0.8~1.45m, 두께 40㎝이다. 석관형의 하부구조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2) 범부리 2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둘로 갈라져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06m, 너비 0.7m, 두께 40㎝이다. 덮개돌의 하부구조는 1호와 마찬가지로 판석으로 구성된 석관형의 석실이다.
(3) 수여리 고인돌은 손양면 수여리 전314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이 고인돌은 마을에서‘칠성바위’로 불리고 있으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제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4) 금강리 고인돌은 손양면 금강리 고인돌로 알려져 왔으나 손양면 수여리 산 4-2번지에 위치한다. 7번국도변에서 오산리 방향으로 약 2.1㎞쯤 들어가다가 두 번째 고갯길 왼쪽 구릉 정상부에 도로방향과 나란히 놓여 있다. 고인돌 덮개돌은 장방형 판석으로 크기는 길이 2.5m, 너비 1.8m, 두께 40㎝ 이다.
(5) 기정리 고인돌은 양양읍 포월리 48번지 일대에 소재한다. 양양에서 속초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다가 좌측 포월리 마을 뒤쪽 낮은 구릉의 북서편 능선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덮개돌의 장축 모서리에는 정 자국이 있으며, 길이 2m, 너비 60㎝, 두께 50㎝이다.
(6) 포월리 1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주변은 작은 냇돌이 폭 1m 내외로 덮개돌 중간 부까지 쌓여있고, 덮개돌 밑으로 받침돌들이 보인다. 덮개돌의 방향은 남-북향이며 크기는 길이 2.5m, 너비 1.7m, 두께 20㎝이다.
(7) 2호 고인돌은 농공단지 공사 시 메몰 소실되었다.
(8) 3호 고인돌은 하부구조로 추정되는 석곽만 조사되었다. 석곽의 장벽은 3~4단으로 쌓았으며, 단벽은 1매 또는2매의판석을세워마감하였다. 현재강릉시립박물관으로이전원형대로복원하여전시중이다.


◆ 선조들의 혼이 서린 고인돌 함께 잘 보존하자.
지금까지 고인돌은 역사현장 보전 차원에서 나름 분포숫자 등 관리에 철저를 기하고 있다하겠으나 아쉬움이 있다. 향후에는 남아있는 고인돌은 물론 추가로 확대 발굴하여 현황과 위치 파악 등을 철저히 하여 더 이상의 도굴과 건설공사로 인한 훼손이 없도록 우리 모두는 관심을 가지고 향토문화유산 보전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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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조선의 천재음악가

許億鳳은 襄陽官奴였다!


◆ 권문세가의 자손 허억봉이 관노 된 사연은?
어린나이에 관노가 되였던 허억봉의 본관은 하양(河陽)이다. 조선시대 권문세가의 자손으로 그의 8대조는 세종대왕 때 좌의정을 지낸 허조(許稠, 1369~1439)였고, 그의 아들 허후(許●; 우참찬,예조판서)가 수양대군이 권력을 찬탈하고자 했던 움직임에 반대하다가 귀양살이 중 교형을 당했다. 교형을 당한 허후(許●)의 아들은 아버지의 산소에서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 발각되어 자결했다. 결국 그 집안의 직계 자손은 죽임을 당하고 그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의 노비가 되였다고『세조실록』에 기록 하고 있어 이때 양양관노가 된 것으로 본다.


◆ 뛰어난 대금연주로 장악원의 전악이 되다.
허억봉(許億鳳)은 10대 중반에 대금 연주에 능하여 악공에서 일약(一躍) 장악원(掌樂院)에 불려가 최고 지휘자인 전악으로 십 수 년을 재직하며 16세기 조선의 음악계에 대단한 명성을 떨쳤다. 조선 명종 때 예조 판서를 지낸 정사룡(鄭士龍)은 허억봉의 대금연주를 극찬하며“허억봉의 대금연주”라는 시(詩)까지 지어 그의 문집에 전하고 있다. 허균(許筠, 1569~1618)은 자신의 문집『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는 소싯적에 태평한 문물을 볼 수 있었다. 악공(樂工)가운데 허억봉(許億鳳)이란 사람이 있어서 대금을 잘 불었는데, 만년에는 현금(玄琴)을 잘 탔다.”라고 기록했다.


◆ 조선 최초로 대금악보(大樂譜)를 만들다.
조선 명종 16년(1561) 안상(安●)의 주도로『금합자보(琴合字譜)』를 만들면서 허억봉에게 대금악보인 적보(笛譜)를 만들도록 하였다. 안상은 장악원 첨정(僉正)의 자리에 있으면서 악인(樂人)들이 악기를 연습할 수 있도록 악보를 새로 만들게 하였는데, 그 악보가 현재 보물 제283호로 지정되었고, 선조 5년(1572)에 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안상은『금합자보(琴合字譜)』의 편찬 경위를 밝힌 서문에서 악공 허억봉은 적(笛: 대금)으로써 세상에 이름이 났다고 소개했다. 반면 그의 아들 허임(許任)은 신통한 침술의 대가로 75세 때에 평생 경험을 집대성하여『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을 저술하였다.


◆ 양양은 대금(大笒)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삼국유사』권2 기이편(紀異篇)에“적(笛,피리)을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오고 비 올 때는 개이며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도 평정(平靜)하여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한다.

양양지방의 해풍 맞은 대나무는 2000년대 초까지 대금을 만드는 재료로는 최고의 품질로 각광(脚光)을 받았다. 당시 양질의 대나무로 제작된 대금은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주로 서울에 소재한 악기점에 납품을 하였다고 전한다.
양양문화원은 조선의 허억봉(許億鳳)선생이 10대 중반의 어린나이에 이고장의 관노로 재직하면서 틈틈이 익힌 대금연주(大笒演奏)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일약 장악원(掌樂院)의 전악(典樂)이 된 것은 놀라운 일로, 이를 기념하고 기리기 위한 일환책으로 올부터 외부 전문 강사를 초빙하여 대금반(大笒班)을 개설 운영하는 등 저변확대와 대금의 고장임을 각인시키기 위해 다각도(多角度)로 노력을 기우리고 있다.


● 조선의 침뜸이 으뜸이라 책자
● 한국음악의 거장들 책자
● 대금 수강생모집 팜플릿
● 대금 개강식
● 최명호 대금강사 연주 모습
● 대금(쌍골죽), 소금
<별첨 사진자료들의 제목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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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襄陽鄕校는 고려와 조선이후
儒生을 위한 官學敎育機關이다.


창건(創建)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사』에는“인종(仁宗) 5년(1127) 3월에 조서(詔書)를 내려 모든 고을에 학교를 세워서 가르침의 도를 넓히게 하였다.”라 하였으니 이 시기를 향교의 설립기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말엽의 문인 안축(安軸)선생은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와서 양양에 향교를 중건(重建)한 것은 향토문화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충숙왕 17년(1330) 5월에 강릉도 존무사로 나가 충혜왕 1년(1331) 9월에 임기를 마치고 개성으로 돌아왔는데, 1년 4개월 재임 기간 동안에 남긴 문집 중 근재집(謹齋集)과 신중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학교>편에 수록된 양양신학기(襄陽新學記)는 다음과 같다.


“100여 년간 인제(人才)가 나지 않은 것은 양양의 수령(守令)이 행정에만 몰두하고 성학의 중흥에는 게을리 하였으니, 이제 곧바로 명하여 문선왕동〔舊校里〕옛 학교터에 학교를 중건(重建)케 했고, 양양의 주민들과 학교 준공의 기쁨을 같이하였다.”라 기록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여러 차례 중수(重修)를 거쳐 숙종 10년(1684년) 8월 20일에 최상익(崔商翼) 양양부사에 의해 진사 박호(朴灝)와 최상은(崔相殷)의 적극적인 협력과 양양주민들의 자조협동으로 흥학(興學)의 명당기지인 현재의 위치 임천리(林泉里)로 이건(移建)하였다.
시설은 전학후묘형(前學後廟型)으로 전면에 명륜당이 있고 그 다음에 동재(東齋)·서재(西齋) 그리고 내삼문(內三門)을 지나 동무(東●)·서무(西●) 그 위에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명륜당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동재·서재는 명륜당을 중앙에 두고 동서에 각각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형식의 건물이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10철(十哲)·송조6현(宋朝六賢)과 동무·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賢)을 합쳐 39위(位)를 배향(配享)하고 춘추로 석전(釋奠)을 봉행한다.
교생의 입학자격은 17세 이상의 소위 양반집 자제와 평민집 자제로서 신분이 분명하면 입학 가능했었다.
교육과정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숭덕광업(崇德廣業)이란 유교의 이념구현을 목표로 개인의 수양, 사회기강 확립, 인격도야에 힘썼다. 교과목은 사서오경(四書五經), 통감(通鑑), 사서(史書)등을 강독하고, 향교에서 행하는 향사례(鄕射禮), 거접(居接) 등을 체험케 하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8·15해방 전후까지는 향교 건물이 잘 보전되었으나 6·25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 1952도는 한국전쟁와중임에도 당시 제1군단장 이형근(李亨根) 대장의 적극적인 지원과 유림대표 이종하(李鍾夏)의 주선으로 대성전(大成殿)·동재(東齋)·서재(西齋) 등 건물들을 잇따라 복원함으로써 전화(戰禍)로 중단되었던 석전(釋奠)재개와 양양군의 지속적인 행정지원을 받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유림들은 1954년도 향교재단 자체자금으로 명륜당(明倫堂)을 중창(重創)후 명륜중학교(明倫中學校)를 설립하고 중등교육에 힘써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70년에는 명륜기술학교로 개편 발전을 모색했으나 재원 부족으로 1975년에 폐교되었다. 이로써 강학(講學)기능은 없어지고 제향(祭享)기능 중심으로 봄·가을에 석전(釋奠)과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한다.
성균관장정(成均館章程) 제12장 향교(鄕校) 규정에 의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수 명 등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1985년 1월 17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소장전적(所藏典籍)은 칠서(七書)를 비롯하여 많은 전적과 국보급 서화(書●) 및 유물 등이 있었으나, 6·25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거접록(居接錄)』1책, 『청금록(靑襟錄)』1책, 『학부수록(學府隨錄)』1책,『양양기구록(襄陽耆舊錄)』1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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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東溟書院은 朝鮮中期
趙緯韓부사가 세운 私學이다!


조선 인조 6년(1628)에 양양부사로 부임한 조위한(趙緯韓)은 이 지역에 서원(書院)이 없어 젊은이들이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예전의 양양읍 조산리에 소재한 대포영의 군용건물이 방치되어 장차 헐리게 될 것을 발견하고 이곳을 학사로 전용토록 한 것이 서원 건립의 단초(端初)가 되었다. 그 후 서원 건립을 위해 숭모(崇慕)의 상징이 될 만한 선현을 물색하던 중 전 정언(前正言) 노경복과 사림 최정립, 이현일 등의 향론(鄕論)으로 襄烈公조인벽이 추천되었으며, 이에 조 부사(趙府使)의 협조로 강당 뒤편에 사당을 건립하여 충현사(忠賢祠)라 명명하고 조인벽을 봉향(奉享)하였으며, 東溟書院으로 현판(懸板)하였다. 아울러 조위한 부사는 학도들과 유생들의 식사 제공을 위해 전답과 소금 굽는 가마와 어선 한척을 지급 전속시켜 서원 운영을 자급하도록 하였으며, 서원의 재산에는 세금을 면제하고, 학생들에게는 부역과 병역까지도 면제해 주어 공부에만 전념토록 했다.


◆  조인벽과 조사(趙師)를 배향한 연유는?
사림의 향론으로 동명서원을 창건하면서 조인벽을 奉祀하게 된 것은 이 지방의 문향(文鄕)을 열은 인물로 평가되는데다가 고려 말엽에 양양으로 낙향한 것이 계기이다. 조인벽의 본관은 한양으로 중국에서 귀화한 조원수(趙元壽)의 5세손이다. 그는 여말 충목왕(忠穆王)대 이래로 홍건적의 퇴치와 왜구의 격퇴에 공헌을 한 무관이었으며, 아울러 학문과 덕망을 갖춘 문인이었다. 그는 처남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였다.
그의 봉작은 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三重大匡龍源府院君(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삼중대광용원부원군)이었다.
조인벽은 이처럼 고려 말 신진세력의 중심부에 있었으나 이후 신진세력이 분열하면서 그는 양양으로 낙향한 이후 이곳에 海月亭을 짓고 산수간을 소요(逍遙)하면서 대자연과 함께하는 시예(詩藝)로 소일하였고 특히 후진을 양성하면서 학문과 도덕을 일깨워 이 지방의 풍속 순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동명서원이 창건된 이후 얼마 안 되어 양열공(襄熱公)의 넷째 아들 조사(趙師)가 배향(配享)되었는데, 조사는 정몽주의 문인으로서 양열공을 따라 낙향하여 지성으로 봉양하였으며, 양열공의 사후에는 치악산 가치천(嘉致川) 근처의 원천석(元
天錫)과 교유하였다. 조사는 사적으로 이태조의 생질이었던 관계로 通情大夫僉知中樞府使(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여 고려조에 대한 절의를 보였으며 이에 후인의 사표(師表)가 되었음으로 배향(配享)될 수 있었다.


◆  순흥 와란(臥蘭)에서 196년 만에 돌아오다.
동명서원의 소실(燒失) 연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재력의 부족으로 복구되지 못하였다가 정조 10년(1786)에 순흥와란(順興●蘭)으로 옮겨서 재건되었다. 와란은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로써 과거 조인벽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던 봉화와 양양 등지의 사람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아울러 이 시기의 동명서원에는 당시 봉화의 숭모상징인 趙貞이 追配되었다. 조정은 조인벽의 6세 손으로 정암 조광조(靜菴趙光祖)의 문인이다. 고종 8년(1871) 3월 20일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전국 700여 서원중에서 사액서원(賜額書院)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다. 광무 2년(1898) 강원도 관찰사 조종필이 동명서원을 창건하였던 조산리 옛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그 후 1982년 양양의 유림들과 한양조 문중(漢陽趙門中)이 중심이 되어 196년 만에 사당과 강당을 조산리에 복원하였는데, 그 기쁨이 체 가시기도 전에 2005년 4월 5일 대형 산불로 사당(忠賢祠)이 전소되어 2010년 복구공사를 재개하여 완공하고 2011년 4월 22일 사당복원 고유제(告由祭)를 올린 후부터 매년 3월 둘째 정일(丁日)에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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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조계종조 도의국사는
양양 진전사에서 은둔 수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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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道義)’는 신라 후기의 승려로, 법호는 명적(明寂), 시호는 원적(元寂)이며 도의는 법명이다. 성은 왕(王)씨로 북한군(北漢郡:漢城)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임신한지 39개월 만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의 출생과 입적의 연대는 알 수 없으며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가 생애였던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선덕왕 5년(784)에 해로(海路)로 당나라에 건너갔으며 오대산을 찾아가서 공중으로부터 종소리를 듣는 등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광부(廣府)의 보단사(寶壇寺)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고 조계(曹溪)로 가서 혜능(慧能)을 모신 조사당(祖師堂)을 참배하였는데, 조사당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고하며 이후 강서의 개원사(開元寺)로 가서 서당 지장(西堂地藏)에게 법을 물어서 의혹을 풀고 지장의 법맥을 이어받았다고 전한다.
또한 백장산(百丈山)의 회해선사(懷海禪師)를 찾아가서 법요를 강의 받았는데 회해는 말하기를“강서의 선맥이 모두 동국승(東國僧)에게 속하게 되었구나.”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도의국사는 3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무르며 선법(禪法)을 터득하고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도의국사는“경전이나 해석하고 염불을 외우는 일보다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며‘자심즉불(自心卽佛)’을 외치고 다녔는데, 당시 통일신라의 왕권불교는 왕즉불(王卽佛)의 엄격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은 곧 부처요, 귀족은 보살이고, 대중은 중생이니 부처님 세계의 논리와 위계질서는 사회구성체의 지배와 피지배 논리와 일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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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통일신라의 승려와 귀족들은 도의선사의 무위법(無爲法) 즉 선(禪)을 믿지 않았으며 그의 외침을‘마귀의 소리’라고 배격하였다. 이를 목격한 도의국사는 아직 선법(禪法)의 시기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북산북행(北山北行)을 향하여 신라 변경에 해당하는 설악산 진전사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40년 동안 수도에 전념하였다.
진전사의 장로(長老)로 주석(駐錫)하면서 제자인 염거화상(廉居和尙)에게 남종선(南宗禪)을 전하고 입적하였다. 염거화상은 제자 체징화상(體澄和尙)에게 선(禪)을 전하니 체징은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 기슭에 보림사를 창건하여 가지산파(迦智山派)의 도량으로 크게 선풍을 떨쳤다. 그리하여 도의국사를 선종의 1조(一祖), 염거화상을 2조(二祖), 체징화상을 3조(三祖)로 받들어 도의국사를 가지산파의 개산조사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보면 821년에는 이미 진전사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 시창(始創)은 늦어도 8세기후반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 되는 바 현지에 건립되어 있는 3층 석탑의 각부 양식과 기법을 고찰해 볼 때에도 8세기 후반에 건립된 석탑이므로 이때에 이미 진전사가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헌(宗憲)에‘본종(本宗)은 신라 헌덕왕 5년에 조계 혜능대사(曹溪慧能大師)의 증법손 서당 지장선사(曾法孫西堂智藏禪師)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고려의 태고 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를 중흥조(中興祖)로 하여 이하 청허와 부휴 양법맥(淸虛浮休兩法脈)을 계계승승(繼繼承承)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반드시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스님이 이곳 진전사에서 14세 때 머리를 깎고 득도(得度)했다는 사실이다. 이후 진전사에 어떤 스님이 계셨고, 언제 폐사됐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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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양양 선림원지(禪林院址)의
숨겨진 진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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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지가람(山地伽藍) 선림원지를 탐방(探訪)하다!
선림원지(禪林院址)는 양양군 서면 서림리 424번지 미천골(米川谷)에 있었던 사찰로 절터만이 남아있는데 지금은 선림원지라 부르며 강원도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삼
층석탑, 석등, 홍각선사탑비, 부도 등의 중요 국보급 문화재들이 분포하고 있다.
지난 1948년 이 절터에서 출토된 신라범종(新羅梵鐘)의 내부 명문(銘文)중에는 해당 사찰명이 아닌 약칭(略稱)으로‘당사(當寺)’즉 이 절로 표기하였다. 이에 따라 혼란스러운 것은
선림원지를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는 억성사(億聖寺)라 하고, 그 외 학자마다 사림사(沙林寺) 또는 선림원(禪林院)이라 학술지를 통해 주장을 하고 있어 하나의 사찰 이름이 셋으로 나뉘어 불러지고
있다.
지금의 선림원지는 명칭 상 문제의 소지가 많이 남아 있음에도 선림원지(禪林院址)로 고착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사찰 명칭에 대해 중국 당나라 때에는 사(寺)와 원(院)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즉 사(寺)는 사찰 전체를 가리키는 어휘로, 원(院)은 사찰 속에 있는 특정한 기능의 별사(別舍)를 지칭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받아 들여 사용한다.
선림원지(禪林院址)는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順應法師) 등이 창업하였다고 하는데 그 연대의 추정을 이 절터에서 신라시대의 범종이 출토되면서 주조연대가 애장왕 5년(804)으로 밝혀져 절도 이때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범종의 명문(銘文)에는‘당사(當寺)’라고 표기 되어 이 절은 선림원(禪林院)이 아니라 사(寺)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명문(銘文) 중에“이 절의 옛 종 쇠 이백 이십정을 밑천을 삼음이라한 것은 순응법사가 이곳의 범종을 주조하기 전에 이미 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보아도 크게 빗나간
추론은 아니라고 사료된다.


◆ 홍각선사가 이곳 절 이름을 명명(命名)한 것으로 추정하다!
이곳 사찰의 이름에 관한 문헌(文獻)은 여지도서, 양주읍지, 관동지 등 다수 지리지에 수록되어 있고, 양양부사를 지낸 명암 이해조(李海朝)의 1709년 재임 시 남긴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양양삼십경) 시(詩)에“사림사(沙林寺)”란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 대사헌을 지낸바 있는 홍경모의 관암전서에“신라 설악산 선림원 홍각선사비는 옛날 양양의 사림사에 있었다.”고 기록함으로써‘선림원’과‘사림사’두 절이 신라 하대에 이곳에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이 지은「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에는 신흥사·백담사·영혈사 등 사찰을 중수하거나 이전 복원 한 경우 기존의 사찰명칭과는 무관하게 개명한 것으로 기록 되였는데 이는 불교계의 불문율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홍각선사가 함통 말년(870)에 이곳 억성사로 다시 들어와 머물면서 퇴락한 절의 금당과 누대를 대대적으로 중창한 후 기존의 억성사(億聖寺)를 사림사(沙林寺)로 개칭하고, 별사[別舍,승방지]를 선림원(禪林院)으로 명명(命名) 하였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림사와 선림원이 대등관계가 아니라 사림사에 속한 선림원 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향후 호칭도‘사림사의 선림원’또는‘사림사 경내의 선림원’으로 불러야 한다. 왜냐면 그동안 잘못된 인식 때문에 신라 천년고찰의 명칭이 현재까지 우왕좌왕(右往左往)하고 있음에 대해 우리는 자성(自省)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으며 이 기회에 절 이름을 바로 찾아 소모적 논쟁을 불식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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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양양 하조대(河趙臺)는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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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유래와 정자각 건축연대를 알아보다.
하조대는 현북면 하광정리 산3번지 일대의 암석 해안으로 2009년 12월 9일 명승 제68호로 지정된 곳이다. 조선시대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의 고적조(古跡條)에“하조대는 부 남쪽 30 리에 있다. 해안에 닿아 있는 작은 산기슭의 험한 곳에 돈대(墩臺)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초기에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풍류를 즐긴 곳인 까닭에 이름 지어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자각은 조선 정종 때 최초로 건립한 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듭한바 있으나 퇴락하여 철폐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 현북면에서 기념사업으로 주민들이 팔각정(八角亭)을 건립하였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955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현재의 정자는 1998년에 해체복원한 건물이다. 양주읍지 형승조(形勝條)에는 정자각 앞 바위에‘하조대(河趙臺)’라 새겨 놓은 글자는 조선 숙종 때 대사헌과 양양부사를 지낸바 있는 이세근(李世瑾)이 각자(刻字)하였다고 전한다.


◆ 시인 묵객(詩人墨客)들의 제영(題詠) 시(詩)는?
■ 택당 이식(澤堂李植, 1584~1647)은 동부승지·우참찬 등을 역임했고 다음해에 대사간·대사성(大司成)·좌부승지를 지냈으며, 한 때 인조의 노여움을 사 간성현감으로 좌천되기도 했는데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하조대(河趙臺)>


臺名河趙自何年/ 대명하조자하년 / 하조대란 이 이름 시작된 게 언제 인고
形勝兼將姓氏傳/ 형승겸장성씨전 / 멋진 경치와 더불어서 성씨까지도 전해 오네
●●千尋爭巨浪/ 희희천심쟁거낭 / 엄청난 물결과 맞싸우며 천 길 우뚝 솟은 누대

灣●一曲貯深淵/ 만회일곡저심연 / 한 굽이 돌 때마다 깊은 연못 물 고이였네
草疑砥柱當橫潰/ 초의지주당횡궤 / 격류 속의 지주런가 처음에 눈을 의심타가
更覺桑田閱變遷/ 갱각상전열변천 / 문득 상전벽해 세월의 변천을 깨달았네
從古爽鳩遺此樂/ 종고상구유차낙 / 상구씨가 이 즐거움 물려준 뒤로부터
幾人陳迹逐風煙/ 기인진적축풍연 / 속인의 발길 그 얼마나 이 풍광을 좇았을 꼬


■ 명제 윤증(明齋尹拯, 1629~1714)은 학덕이 높아 현종 때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이후로도 우의정 등의 교지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하여 백의정승이라 불리며,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河趙臺(하조대)>


奇峰突兀入波心/ 기봉돌올입파심 / 파도 속으로 불쑥 솟은 기이한 봉우리여
十里松間冒雨尋/ 십리송간모우심 / 솔 사이 십리 길을 비 맞으며 찾아 왔네
遊子何知河與趙/ 십리송간모우심 / 나그네는 하륜과 조준을 어찌 알 것인가
倚巖空腹費莊吟/ 의암공복비장음 / 바위에 기대 부질없이 시 한수 읊었 다오


하조대와 관련된 위의 시 외에 양양부사를 지낸 현곡 조위한(趙緯韓, 1567~1649), 십청헌 김세필(十淸軒金世弼, 1473~1533),창녕군수 백헌 이경석(白軒李景奭, 1595~1671), 황해도관찰사,
학주김홍욱(鶴洲金弘郁, 1602~1654), 양양부사, 희암채팽윤(希菴蔡彭胤, 1669~1731), 저촌 심육(樗村沈●, 1685~1753), 대사성, 지퇴당이정형(知退堂李廷馨, 1549~1607), 대제학호음정사
룡(湖陰鄭士龍, 1491~1570) 등 기라성 같은 명사들이 시를 남겼는데 특별히 택당 이식과 백헌 이경석의 하조대 제영(題詠)시 두편이정자각내에편액(扁額)되어이곳을찾는관광객의발걸음을멈추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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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연암 박지원 부사가 남긴 교훈과
양양의 황장봉산 실태를 알아보다.


◆ 문란하고 해이한 공직기강을 다잡다.
연암이 양양에 부임할 당시 환곡(還穀)이 문란해 아전(衙前)들이 훔치고 포흠(逋欠)하여 창고에는 한 톨 비축 없이 장부로만 있었다. 그럼에도 전임 부사들은 아전들의 횡포에 밀려 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 이에 연암은 아전들이 스스로 포흠한 곡식을 되돌리도록 하기 위해“너희들이 걸핏하면 도망가 버리겠다고 한다는데, 참으로 딱하다. 고을 원이 할 일이란 군정과 전세와 환곡이거늘 창고가 텅 비어 있고서야 원은 두어 뭣 하겠느냐? 너희들이 달아나고자 한다면 모두 달아나라. 한 사람도 남아 있지 말고 모두 달아나란 말이다. 나도, 벼슬을 그만두겠다는 장계를 올려 죄를 청한 다음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겠다. 그러면 그만 아니냐?”하고 연암은 작은 방에 거처하면서 포흠을 되돌리기 전에는 공무를 하지 않겠다고 엄명을 내렸다.
그 후 부사에게 녹봉이 들어오자 직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니 녹봉을 받기 부끄럽다면서 이를 포흠한 환곡을 메우는데 사용토록 하였다. 이에 아전들은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고을의 부유한 백성들까지도 혹 비용을 내어 몇 달 만에 창고가 모두 채워졌고 이 후 비로소 동헌에 거처하며 공무를 살핌으로써 아전들의 포흠을 막고 환곡을 바로 잡았다.


◆ 백성을 위해 청렴을 몸소 실천하였다.
조선 후기에 박종채(朴宗采)가 지은 잡록인「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양양에는 벌목을 금하는 황장목(黃腸木) 숲이 퍽 많았다. 매번 조정에서는 감독관을 파견해 황장목을 베게 했는데 양양부사에게는 으레 사사로운 이익이 많이 떨어졌다. 비록 청렴한 수령이라 할지라도 황장목을 남겨 훗날 자신의 장례 때 쓰게 하려 했다. 연암이 양양에 부임하자 친지들은 황장목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러나 연암은 이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후일 나의 장례 때 황장목을 쓸 생각을 한다면 이는 내뜻을 크게 거스르는 일이다. 황장목은 감독관의 입회하에 벌목되어 대궐에 진상되었다. 그러나 진상하고 남은 널빤지들이 온 고을에 낭자(狼藉)했다. 아전들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연암은 아무아무 곳 시냇가에 옮겨놓으라고 하였다. 모두들 그 영문을 몰랐다. 며칠 후 몸소 그 시냇가에 가서 말했다. “여기에 다리가 없어 사람들이 다니는 데 괴로워한다. 이 나무로 다리를 놓으면 몇 년은 편리하게 지낼 수 있을 게다.”그리하여 널빤지를 깔아 다리를 설치하였다. 그 후 연암이 돌아가셨을 때 유언에 따라 해송으로 만든 널을 썼다. 그걸 보고 경탄(驚歎)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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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장봉산의 보전실태를 알아보다.
조선왕실에서 주로 관곽재(棺槨材)와 궁궐 건축에 쓰일 목재를 확보할 목적으로 황장목을 함부로 벌채하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이 내린 산을 황장봉산(黃腸封山) 또는 황장금산(黃腸禁山)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로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는 질이 좋은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고 하는데, 이 황장목을 금양(禁養)하는 산의 경계표시를 이르는 말이 황장금표(黃腸禁標)이다.
조선 후기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전국 지리지인 대동지지(大東地志) 양양부 토산편에는 황장봉산이 두 군데 있다고 했다. 법수치리 방향의 부연산 봉산은 둘레가 300리 이고, 갈천리 방향의 전림동 봉산은 둘레가 350리 로 기록되어 있다. 양양문화원부설향토사연구소는 지난 2013년 기존에 확보한 문
헌과 구전자료를 바탕으로 양양지역의 금표의 분포실태를 조사한 바 있다. 그 결과 총5개소(오색리 금표, 장리 금표, 원일전 금표, 어성전리 금표, 법수치리 용화사 금표)로 조사되었다.
이와 같이 황장금표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 조선시대 국가지정 황장봉산 2개소와 금표 각자(禁標刻字) 5개소가 확인됨으로써 전국에도 흔치 않은 일로 명실상부한 황장목의 고장으로써 긍지를 갖는다. 그러나 자성(自省)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달리 무분별한 산촌개발사업 등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훼손되어 현존하는 황장금표 각자(刻字)가 한곳도 없다는 것에 대하여 자괴감(自愧感)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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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숨어있는 향토사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갖는 소회(所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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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토사 연구원의 구성과 활동에 대해 알아보다.
양양문화원은 지난 한 해 우리 향토사를“숨어있는 향토사 이야기”라는 주제로 양양소식지에 연재(連載)하여 군민들에 잔잔한 감동(感動)을 주었다. 물론 자료수집이나 집필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지역 내에 유수대학이나 사학연구기관 한 곳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향토사에 대한 연구와 오래전부터 잠재된 오류(誤謬)를 고문헌의 전거(典據)를 통해 바로잡아 군민들에게 올바로 인식시켜준 역할에 보람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향토사(鄕土史)에 대한 정의는“특정지방에 관한 역사, 지리, 경제, 인물, 문화재, 민속, 풍물 등을 연구하는 것으로 지역사(地域史), 또는 지방
사(地方史)”라고도 하는데, 본 연구 활동의 중심에는 무보수로 봉사하는 향토사연구원이 있다. 이 고장 출신들로 교육계의 원로 두 분과 양양군청 실·과장으로 퇴직한 두 분 그리고 교육청과 지역의 자영업을 운영하는 분들로 지난 2011년에 위촉 재구성하였는데 최근 전 양양문화원 사무국장을 새로 위촉 모두 7분이 활동하고 있다.
연구원들은 매주 화요일 오후 2시에 양양문화원에서 마련한 회의실에 모여 각자 수집한 자료를 중심으로 3∼4시간씩 토론을 거쳐 군민에 알릴 필요가 있는 사항은 문화원에서 홍보용 책자를 만들어 문화원 회원들에게 배포하고, 심층 연구가 필요한 사항은 현지답사 및 발굴 작업을 병행하여 매년 1편의 연구 논문을 작성 향토사료(鄕土史料)로 관리하고 있다.
그동안 연구실적에 따른 수상내역을 살펴보면 한국문화원연합회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에 출품 2011년에는 논문부문 최우수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2012년에는 논문부문 대상(국무총리상)을 각각 수상한 바 있다. 또한 강원도 문화원연합회 주관 향토문화연구발표전에 논문을 출품 2012년에 최우수상, 2016년에 우수상, 그 외 장려상 3회를 각각 수상하는 등 전국과 도내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어낸바 있다.


금년도 향토사의 오류를 바로잡은 대표적 사례는?


◆ 양양향교지(襄陽鄕校誌, 1999)의 오류(誤謬)
양양향교지에는 고려 충숙왕 16년(1329) 강릉도 존무사 안축(安軸)의 명으로 구교리에 향교를 창건(創建)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근제선생집(謹齋先生集) 권지1(卷之一) 관동와주(關東瓦注)의 기문(記文)을 근거로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의 재직 시기는 고려 충숙왕 17년(1330)∼충혜왕 1년(1331)임으로 향교의 중건(重建)시기도 이 때로 보아야 한다.
최상익 부사 양양향교 이건문(移建文) 중“弘治三年道伯安軸實主張是而邑守朴君通州守陳公監●工役矣(홍치삼년도백안축실주장시이읍수박군통주수진공감동공역의)”의 해석은“홍치 3년(1490)에 도백 안축선생이 주장하여 읍(양양)수 박군과 통주(통천) 수 진공으로 하여금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다.”라 했는데, 여기서 홍치(弘治:명나라 효종의 연호)3년은 조선 성종 21년(1490)에 해당됨으로 천력(天歷:원나라 문종의 연호)3년이라야 고려 충숙왕 17년(1330)에 해당 된다.


◆ 동해신묘(東海神廟)의 위판(位版)에 대한 오류(誤謬)
고문헌에 동해신묘는 동해신(東海神)을 모신 사당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매년 1월 1일 해맞이축제를 맞이해 동해광덕용왕지신(東海廣德龍王之神)에게 제례를 봉행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고려 공민왕 19년(1370)에 천하 산·천·해·악(山·川·海·嶽)의 이름을 새로 정해 반포할 때 양양은 동해지신(東海之神)이라 했고, 세종 19년(1437) 예조에서 악·해·독(嶽·海·瀆)산천의 단묘와 신패의 제도를 상정할 때 양양부의 동해는 중사(中祀)이고, 사묘의 위판(位版)은 동해지신(東海之神)으로 쓴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