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9호

[향토사료] 東海神廟의 祭享에 관한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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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44회 작성일 2018-02-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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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료]


東海神廟의 祭享에 관한 考察


향토사연구소 소장 이규환

  

 

 

. 머리말


인류는 예전부터 하늘과 땅 악((() 그리고 조상의 넋 등에 제사하는 풍속(風俗)이 있었는데 이것이 제례나 축제 형식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통일신라·고려 및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하는 각종 제사에 관한 규범이나 규정이 있어서 그 규모에 따라 대사(大祀중사(소사(小祀)로 나뉘어 봉행하였고, 오례의(五禮儀)제사(祭祀)의 예()는 천신(天神)에게 사()라 하고 지기(地祇)에게는 제(), 인귀(人鬼)에게는 향(), 문선왕(文宣王)에게는 석전(釋奠)이라 한다.”1)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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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신묘(東海神廟)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58권에서 찾을 수 있으며 양양에는 동해신사가 있다.2)라 했는데 국가 제사처(國家祭祀處)인 중사(中祀)로 관리되어 온 곳이다. 매년 나라에서 왕이 향과 축을 내려 보내 세수(歲首)에는 별제(別祭), 2월과 8월은 상제(常祭)로써 관찰사가 동해신(東海神)에게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풍농풍어(農豊漁)를 빌던 제사 장소로 조선말까지 제향과 관련된 기록이 전한다. 동해신묘는 역사성과 정체성 차원에서 고려시대부터 명명된 동해신사(東海神祠)로 호칭되어야함에도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동해신사당(東海神祀堂)3), 동해신단(東海神壇)4), 동해묘(東海廟)5), 동해신묘(東海神廟)6)로 변천(變遷)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인 전거(典據)를 통해 살펴보면고려사에 동해신사가 개경의 정동인 양양 땅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조선왕조실록에도 태종 때부터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현종, 영조, 정조, 철종, 순종 때까지 양양 땅에 동해신묘가 있었다는 기록뿐, 역사적으로 동해신묘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순종 2(1908) 1226일에 일제의 우리민족정신말살정책에 의하여 일제 통감부 훈령에 따라 당시 양양군수 최종락(崔鐘洛)이 동해신묘를 훼철(毁撤)하였는데, 구전에 의하면 동해신묘 훼철 후 3일 만에 급사했다고 전한다. 정조 24(1800) 강원도관찰사 남공철이 신묘를 중수하고 지은 글인 동해신묘중수기사비(東海神廟重修紀事碑)’마저 허리가 잘려 나가 그림 1.에서 보듯이 시멘트로 이어 붙여야 했던 비운(悲運)의 시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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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동해신묘



아시아경제(2016. 10. 22)신문에일제 강점기 때 남해신당(海神堂)은 철거되고 제사는 폐지됐다. 폐허가 된 남해신당은 2001년 복원돼 2003년부터남해신사제례보존위원회주관으로 매년 봄과가을에해신제(海神祭)를봉행하고있다.”고하였다.

태조 3(1394) 1028일 나라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으로 고치고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함에 따라 방위가 달라졌다. 고려시대는 개경의 정동은 양양이었지만, 조선시대는 한양의 정동은 강릉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세조 2(1456)집현전 직제학(直提學) 양성지(梁誠之)24가지 시무책(時務)을 제시하면서동해·남해·서해의 신사는 모두 개경을 기준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방위(方位)가 어긋난다면서 동해신(東海神)을 강릉에, 서해는 인천에, 남해는 순천에, 북해는 갑산에 이제(移祭)하고 일대의 사전(祀典)을 새롭게 할 것으로 상소하니, 임금이 듣고만 있었다.”7) 라 하였다.

그 후 4해의 어느 신사도 이전하였다는 기록이나 새로운 지역에 신사가 있었던 기록은 전무 하다. 이로 볼강릉 정동진에서 양양으로 동해신묘를 옮겼다는 일부주장은 허구(虛構)라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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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2. 동해신묘중수기사비


동해신묘는고려사등에도 분명히 고려시대 이래 양양 땅에 있었다고 하였음에도 국가기관인 문화재청의 기록에는 조선시대로만 표기되고 있어 국가사적이 아닌 강원도 사적 제73호로 등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지 자괴감(自愧)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동해신묘 제향은 종묘제례 다음가는 국가의 제사처로 세종실록 오례의(五禮)에 시일(時日재계(齋戒진설(陳設행례(行禮) 등에 대해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