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물치리 노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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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32회 작성일 2018-02-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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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좌현 (남, 81세, 강현면 물치리) 전 양양군 유도회장
■ 면담일 : 2015.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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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끼리 땅굴을 파고 짐승처럼 살았고 그 속에서 애기까지 낳았다.


1950년 12월 말에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후퇴하면서 마을의 집들을 적군의 손에 넘길 수 없어 온 마을을 불태워버리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집집마다 처마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전시의 작전이라는 위압감에 누구하나 불만 한마디 못하고 내 집이 타는 모습을 지켜보고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피란가라고 했다.
그러나 추운겨울이고 비행기는 연신 폭격을 퍼 부으니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 하고 마음대로 나 다닐 수도 없었다. 피신을 하려고 숙소 마련을 위해 소나무가 무성한 산골짜기를 찾아 이웃끼리 땅굴을 파고 집처럼 그 속에서 온 가족이 짐승처럼 살았으며, ○○집은 땅굴 속에서 애기를 낳기고 했다.
봄이 되면서 전쟁은 점차 소강상태로 들어가 한집 두 집 옛 터에 돌담이나 움집을 지었는데 재목은 타다 남은 목재로 기둥을 세워 임시 거처를 마련하면서 삶에 터전을 넓혀왔다.



◆ 두 어른의 인자한 심성 덕으로 사상적 보복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51년 2월 두 번째 양양을 탈환하여 북한 치하에 2개월 동안 남한에 협조한 사람들을 지명만 하면 때려죽였다는 소식이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들려왔다. 이웃 동네라도 마음대로 왕래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소식을 빠르게 들을 수 없었다.
남과 북의 정치성 보복행위로 서로간의 인명살상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교리는 두 어르신의 인자하신 성심 때문에 단 한건의 불상사도 없이 난을 잘 넘겼다. 두 어른은 공산치하의 인민위원장인 ○○○과 대한민국 정치하의 ○○○이장 어른으로 두 분은 죽마고우이시다.
두 어른은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누군가는 마을지킴이가 있어야 되지않은가 하시면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며, 우리 동네는 그런 일이 절대 없어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그것은 전쟁 전에 남쪽의 호림부대 대원이 마을 외딴 기와집 다락에 숨어서 얼마를 보냈는데 후에 발각 되어 여럿이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사건도 있었다.



◆ 그때는 손가락질 만해도 상대방을 잔인한 앙갚음을 가하였다.


김창희씨는 정미소를 하였는데 내가 마을에서 야학을 할 때 병을 가져 가면 남포 불(등불)을 켤 석유를 넣어 주시곤 하시어 항상 고마워했다. 그리고 당시 우리 형 두 분은 최은규와 인민군에 입대하였다가 국군이 고성까지 진격했을 때 셋이 도망쳐 집으로 나오는데 큰형이 회룡리에 왔을 때 미처 철수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에게 잡혀 죽을 정도로 맞아 쓰러진 것을 마을 사람들이 업고 와서 살았고 작은 형과 친구는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적군이 마을의 소 2마리를 끌고 갈 때 김씨 어른이 인자하신 설득으로 그냥 돌려보내고 소를 찾아왔다. 또한 한 여성을 보고 여자 책임자라고 잡아 가려고할 때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고 설득을 하여 무사했다. 그때는 손가락질 만해도 서로 때려죽이고 반죽음을 시켜 놓았다. 한쪽이 그런 짓을 하면 반대편이 득세하면 마을 사람끼리 사정없이 패는 사건이 다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