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정암리 이계영

페이지 정보

조회 1,087회 작성일 2018-02-22 17:05

본문

■ 이계영(남, 83세, 강현면 정암리)
■ 면담일 : 2017. 10. 8


313.jpg



◆ 비행기가 나타나 방공호에 들어가니 물이 허리에까지 찼다.


강현 인민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장산리에 있는 강현중학교 1학년 때 6 ․ 25전쟁이 났다. 7월 들어 비행기 공습을 피하기 위해 지하 통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3학년은 2명씩 전망대에 올라가 망을 보고 있다가 비행기나 군함이 보이면 종을 치면 학생들은 통로를 통해 방공호로 뛰어 들어가는데 방공호 굴 한 곳에는 10명에서 15명씩 들어가 숨었다.
그리고 방공호 굴 지붕은 나무로 걸치고 흙을 덮고 풀을 심어 위장하였다. 비행기가 지나가면‘해제!’하고 소리치며 종을 치면 다시 교실로 들어가 공부를 하였는데 항상 불안하였다. 여름에 비가 오면 방공호에 물이 허리까지 찼다.
비행기가 나타났다고 종소리가 나면 옷이 다 젖어도 방공호로 뛰어가야 했다. 학생들은 학교를 지킨다고 목총을 지급받아 4~5명씩 짝을 지어 총검술, 총을 쏘는 연습을 하였다.



◆ 낙산역에 말먹이용 마초가리가 폭격으로 다 타버렸다.


그러다 3학년은 군에 입대하였다. 철길에는 기차로 말을 싣고 계속 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을마다 말을 먹일 풀을 베어 정암 2리에 있는 낙산역에 쌓아 놓았는데 폭격으로 다 타버렸다.
형이 두 분인데 모두 인민군에 입대하였다. 부모님은 형들이 돌아온다고 피란도 안 가고 기다렸다. 인민군들이 마을에 들어와 행패를 부릴 때도 형들이 인민군에 갔다고 건드리지 않았다.
1 ․ 4후퇴 시 정암 1리는 불에 타지 않아 우리 동네는 피란처라 하였다.
국군이 들어오기 전에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고 숨어 살았는데 그때 비행기 폭격으로 몇 집만 불에 탔었다.
그리고 인민군이 나왔을 때 인민재판을 하는데 사람을 꿇어앉혀놓고 물푸레 작대기로 때려서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때 우리 아버지도 끌려갔는데 형들이 인민군에 갔다고 매를 안 맞고 살아 돌아왔다.



◆ 군함이 좌초되어 파도에 밀려 아주 귀한 아스피린도 밀려나왔다.


군함이 폭파되었는지 좌초되어 바닷가에 나가면 옷, 깡통, 담요, 목재들이 파도에 밀려나와 주어다 모아 놓았는데 뒤에 따라 오던 사람들이 가져 가기도 했고 아주 귀한 아스피린도 있었다.
그때 바다에서 통이 밀려 나왔는데 누가 잘못 말해서 총이 나왔다고 신고를 하여 용호리 내무서에 잡혀 굴속에 데리고 가더니 총을 들이대고 쏴죽인다고 하며 어디다 숨겨놓았느냐고 대라고 했지만 모른다고 하니 솔직히 말하면 보내준다고 하였다.
몇 시간을 총을 철커덕 거리며 협박하였으나 나는 총을 본적이 없다고하여 풀려나왔다. 바닷가에서 주어온 약품, 깡통들을 굴속에 숨겨놓았더니 북에서 온 사람들이‘이것은 미국 놈의 군수품이니 몰수해 간다.’고하면서 모두 빼앗아 갔다.



◆ 박격포탄을 지고 둔전리로 해서 설악산으로 올라갔다.


국군이 다시 들어와 강선리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였다. 나를 오라고 하여 갔더니 군복을 입히고 걸방을 만들어 짐꾼이 되어 박격포탄을 지게하고 설악산으로 들어가 국군들과 같이 일주일을 다녔는데 때마침 후퇴명령이 내렸다.
총도 안 매고 밤새 걸어 강릉을 지나 삽당령 부근까지 가서 시골 학교에 들어가니 교실은 3개였다. 강릉서 며칠을 주둔했다가 다시 진격명령이 내렸다.
강릉에서 3~4일간 걸어서 손양에 왔다. 여기서 또 60mm 박격포탄을 지고 둔전리로 해서 설악산으로 올라갔다. 산에서 잠잘 때는 낙엽을 긁어 우의로 하늘을 가리고 잤다. 야간에 이동할 때는 앞사람을 잡고 가는데 졸다가 낭떠러지 굴러 떨어지는 사람도 있어 장교들이 정신을 차리라고 몽둥이로 때리며 행군을 재촉했다.
군인들은 다시 신흥사로 이동하여 절 앞에서 1주일을 묵었는데 식량이 다 떨어져 민간인들이 묻어놓은 감자를 파내어 먹었다. 몇 끼를 굶다가 보급품을 수령하러 갔을 때 생고구마를 먹으니 눈이 번쩍 뜨였다.



◆ 군인들이 머물다 간 빈 마을에는 쌀, 감자, 김치는 남아나지 않았다.


그때 신흥사에는 아주머니 한분이 남아서 절을 지키고 있었다. 설악산에서 후퇴할 때 항고에 밥을 하는데 인민군이 뒤쫓아 온다고 하여 불을 끄고 이동하다가 또 인민군이 추격하여 몇 번을 이동하다가 밥을 하니 죽이 되었지만 너무 맛있었다.
집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쉬는 시간은 잠에 빠졌다. 부식 공급이 없어 밭을 지날 때면 밭에 남아나는 것이 없이 다 뽑아갔고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지만 군인들이 지나가면 쌀, 감자, 김치는 남아나지 않았다.
장산리에 가니 젊은 사람은 모두 노무자로 끌려갔거나 피란을 가고 노인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신흥사 앞에서 이틀을 지내는 동안 설사가 나고 토하기 시작하여 치료도 할 수 있는 약도 없어 병세가 심해지니 집으로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