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정암리 김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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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61회 작성일 2018-02-2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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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금녀 (여, 83세, 강현면 정암리)
■ 면담일 : 2017.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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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소년단 분단장과 교실 벽보 주임을 하였다.


친정은 속초 논산리이다. 어렸을 때에는 대포공립국민학교 논산 분교를 3학년까지 다녔다. 12살 때 해방이 되고 대포인민학교에 들어가니 곱셈뺄셈 등은 배울게 없었지만 그러나 한글은 잘 몰랐다.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잘하니까 월반을 시켜서 5학년까지 올라갔다.
나는 소년단 분단장도 하고 벽보담당을 하였는데 하는 일은 교실 뒤에 있는 벽에다“김일성 환영하자, 이승만 타도하자, 스탈린 대원수 환영하자”등을 써 붙이는 일이다. 그때 나는 그림을 잘 그려서 모양도 예쁘게 만들어서 붙였다.
그렇지만 나는 반역자 가족이라고 하여 높은 자리는 주지 않았다. 오빠가 월남을 하여 우리를 반동분자라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없이 수풀에 앉은 새처럼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는 줄을 서서 가는데 5학년 동네 반장이 인솔해 갔다.
신발은 짚으로 만든 짚신과 천이 없어 옷도 제대로 입지 못 했는데 그래도 나는 우리 어머니가 길쌈 솜씨가 좋아서 옷 입는 게 나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옷이 형편이 없었다.



◆ 청대산 샘에서 물동이로 20~30분 걸어서 물을 여 날랐다.


공책은 벽지를 바르기 전 먼저 벽에 붙일 때 쓰는 마분지 같은 초지를 잘라서 만들었는데 글씨를 쓰다가 잘못되어 지우개로 지우면 종이가 잘 찢어져 애를 먹었고, 책은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녔다. 교과서는 국어, 산수, 리과(과학), 음악, 미술책 등이 있었다.
겨울에는 학교에서 주는 나무가 모자라 땔감이 없어 산에 가서 솔방울을 주어다 피우는데 솔방울을 학급마다 주어가니 산에는 마른 나뭇가지나 솔방울이 남아나지 않았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물동이를 이고 한번에 20~30분 걸리는 청대산 밑에 있는 샘물에 가서 물을 5~7번 길러다 물두멍(물독)에 부어 두고 썼다. 그때 청초호 는 물이 맑아서 그물을 놓으면 고기가 잘 잡혀 생선도 잘 먹었다.



◆ 기차에 말, 탱크, 대포 그리고 소련 사람들까지 싣고 나갔다.


내가 5학년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났다. 우리는 전쟁이 났는지 몰랐는데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철길에 나가면 기차가 지나가는데 기차에 말, 탱크, 대포, 그리고 소련사람까지 싣고 남쪽으로 나간다.
그때 나는 저 탱크를 왜 실고 갈까? 하고 생각했고, 얼굴이 시뻘건 소련 사람들이 무섭게 생겼었다. 그들이 말 타고 마을에 오면 무서워 도망 다녔다. 당시 동네 오빠들은 인민군대로 들어갔다.
어른들이 인민군이 남반부를 해방시킨다고 했다. 그런데 8월이 되면서 비행기가 폭격을 하기 시작했다. 길을 가다가도 비행기가 보이면 비행기가 안 보일 때까지 어디든지 숨어야 했다. 아버지가 산에다 굴을 파고 문은 거적으로 만들어 가리고 낮에는 그 굴속에서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나와서 밥을 해 굴속으로 가지고 들어가 먹었다.
비행기 폭격이 무서웠고 먹을 것이 없으니 더 고통이었다. 머저리 비행기(정찰기)가 지나가고 난 후 조금 있으니 쌕쌕이 폭격기가 폭격을 해 댄다.



◆ 서북청년단 청년이 나를 군인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애원했다.


경상도까지 내려갔다던 인민군이 갑자기 북으로 후퇴를 할 때 나는 친구들과 밖으로 나가보니 조밭에 팔에 완장을 찬 서북청년단이란 청년이 몸에서 피가 꿀럭 꿀럭 흘리는데 그는“나를 군인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였다. 우리는 무서워 도망가서 어른들께 알렸다.
동네 어른들이 올라가니 이미 죽어있어서 산에 묻어주었는데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나중에 주문진에서 왔다는 그의 가족인 부모가 찾아와 시신을 파내가며 동네사람들에게 2만원을 주며 막걸리를 사 먹으라 했다고 했다.
9월이 되어 국군이 들어와 마을 앞 소야 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은 논산리 마을 앞에 있었고 인민군은 건너 만천동에서 건너다보고 총을 쏘아 대는데 콩 볶는 것처럼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난다.
그때 사람들은 무서워서 굴속에 숨어서 소리만 들었다.‘드르륵 드르륵’하고 나는 소리는 인민군 총소리고,‘따콩 따콩’하는 소리는 국군의 총소리라 했다. 여기서 인민군과 국군도 많이 죽었다.



◆ 가갸 거겨’만 알고도 사상만 새빨가면 승승장구 출세했다.


이북 정치는‘가갸 거겨’만 알고 많이 배우지 못해도 사상만 새빨가면 승승장구 출세하고 형제간에도 3인조, 5인조 감시 조가 있어 신고하면 자유비판, 호상비판으로 여러 사람 앞에 나가서 비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내가 잘 못했으니 비판하시오, 하면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니, 가족끼리도 마음 터놓고 말을 할 수 없는 사회다.
저녁마다 학습하는데 저녁이 늦으면 설거지도 못하고 간다. 우리 어머니는 호랑이라고 부를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며느리가 저녁학습에 늦을까봐 신경을 써서 나가라고 하였고 나는 어머니 대신 나갔다.
학습내용은 소련이 어떻고, 김일성의 업적을 배우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비판을 받는데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만약 안 나가면 지서에 까지나가서 비판을 받는 큰일이 생기기전에 누구도 나가야 한다.



◆ 자아비판에는 집안 어른도 필요 없고 친구도 소용이 없이 두드려 팬다.


행사 때도 마찬가지다. 해방 행사(광복절)때는 동네를 지키려고 순행을 도는 사람만 남겨두고 모두 나가 현재 속초 시청 앞 운동장이 모자랄 정도로 많이 모이는데 여기를 안 나갔다가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궐기대회가 자주 있었는데 벽돌공장 김○○조부는 잘못한다고 총 개머리판으로 입을 맞아 이가 몽땅 다 빠지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매질을 한 놈이 그 집안 놈이라 했다. 오죽하면 주위사람들이 집안 어른을 매질을 한 그놈을 통일이 되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정도로 찾아가 때려죽인다고까지 했을까.
증바우(정암리)에 있는 ○○○는 동사에서 궐기대회를 하는데 김일성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써 달라고 하는 것을 인민위원장도 있고 세포위원장도 있는데 왜 나를 쓰라고 하는가. 라고 말하다 잡혀가서 얼마나 맞았는지 정신을 잃자 찬물을 뿌리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친구는 문초를 받으러 나가니 매를 때리는 놈이 다른 놈도 아닌 학교 친구였다. 그래서“야! 너 누구자니?”하자 그래도 그 친구는 물푸레 작대기로 인정사정도 안 봐주고 때렸다.
용호리 장복한씨는 굴속에 숨어 지내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문초를 받으러 나오게 되었는데 마침 친척 할머니가 공수전으로 재가하여 낳은 아들이 인민군 장교가 되어 왕별을 달고 나왔다.
그때 그 장교가“너, 여기 왜 왔어!”라고 묻자 나는“왜 왔는지 저도 몰라요?”라고 했더니 나가라고 해서“나 허리띠가 없어 못가요.”하니 졸병을 시켜 허리띠를 구해주어 매고 나왔다고 하면서 공산당사회도 백이 있으니 좋더라고 말했다.



◆ 언니는 길게 땋은 머리를 뒤로 올리고 남편이 군인을 갔다고 했다.


우리 오빠는 나보다 2살 많은데 강습 간다고 집을 떠났다. 어느 날 오빠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봉투가 없어 공책을 뜯어 풀로 만들어 붙인 것인데 뜯어보니 연필을 가늘게 갈아서 쓴 글씨로 내가 속아서 왔다고 써져 있었다. 강습을 갔다는 오빠는 인민군에 간 것인데 그 후로 소식이 없었다.
인민군이 북으로 밀리고 있을 때 우리 동네에 무슨 국군부대가 주둔했는데 우리 큰집이 부대장 숙소로 사용되고 있어서 그런지 사병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못해 단련을 덜 받았다. 그때 언니는 길게 땋은 머리를 뒤로 올리고 남편이 군인 갔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조카딸은 군인들의 밥을 잠깐 동안 해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될 무렵인 20세 때 남편 얼굴도 못보고 증바우로 시집을 왔다. 그때 남편은 23세로 치안대원으로 상도문에 주둔하고 설악산 공비토벌을 다녔고 이따금씩 집에 왔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시어머니가 3년 만에 돌아가시고 남편은 치안대에서 나오고 바로 징집1기로 국군에 입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