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정암리 장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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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87회 작성일 2018-02-2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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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용진 (남, 86세, 강현면 정암리)
■ 면담일 : 2017.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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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산 앞바다에 큰 배 한척에서 비행기가 날아와 맹폭격을 감행


공산치하에서 초급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2년을 배우고, 바로 양양고급중학교 2학년에 진학하여 로어를 배우고 다니던 중에 6 ․ 25전쟁이 났다.
그 때 양양고급중학교는 1회가 이미 졸업을 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학생들은 입대시키지 않고 평양 화학 공장 등에 배치되어 성냥과 탄알 등을 만들었는데 월급은 받지 않고 무보수로 노력봉사에 동원되었다.
1950년 한 여름이 되자 평양에 미군 비행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그때 여러 공장이 폭격을 맞아 불에 타자 공장근로자들은 우왕좌왕 갈 길을 헤매다가 이 공장에서는 일을 할 수 없어 다시 원산으로 와서 인민군 지원사업을 하였다. 거기서 하는 일은 매일같이 주먹밥을 만들어 전방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저녁때와 새벽이 되자 원산 석유공장도 폭격기가 와서 폭격을 하였는데 원산 앞바다를 내다보니 학교만한 배가 나타나 배에서 비행기가 떠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더니 폭탄을 비 오듯이 퍼 부니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 원산은 미군기가 맹폭을 하는데 낙동강에서는 인민군의 승전보를 홍보


원산에서는 비행기와 배에서 함포사격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인민군은 낙동강에서 계속 이기고 있다고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주먹밥을 뭉치고 있는데 제1중학교에 폭탄이 떨어졌고, 이웃 공장들도 폭격에 맞아 불타고 있으니, 책임자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그때 내려오다 보니 속초도 폭격을 맞은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기차 길도 끊어지고 차도 없고 걸어서 집으로 오면서 소비조합 식당에 들러 국밥을 사먹었다. 집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셨는데, 그때 밥값은 10원~20원씩 했고 3일 동안 걸어서 집에 왔다. 집에 온지 3~4일은 되었을까? 군인 모집을 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는 강제로 모집을 하였다.
군인 모집 장소인 낙산사에 가니 전쟁식량인 배급용 미숫가루가 당일 분량이 다 떨어졌다고 내일 미숫가루가 오니 내일 오라고 한다.
그때 아버지가 국군이 현북면 말곡리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군인 가지 말라고 하면서 피란을 가자고 하여 소를 끌고 상복골로 피란을 갔는데 상복골은 산 밑이라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곳을 택했다.



◆ 미 8군 커크랜드 부대원으로 입대


피란처인 상복골에서 오래 있을 수 없어 정암리 집에 오니 국군 수색대가 이미 들어왔는데 이튿날 만세 부르러 나오라고 하여 구경 겸 국도에 나가서 만세를 연호하며 국군을 환영했다.
그 때 국군들은 지금의 강현면 정암리 해수욕장에 있는 에바다 호텔 자리인 염전거리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우리들에게 건빵과 화랑담배를 나누어 주어 담배는 아버지에게 드렸다.
그때 건빵을 처음 맛보았으며, 국군이 무서울 줄 알았는데 인상이 좋아 보였다.
국군이 들어와 수복이 되자 6 ․ 25전쟁 전에 월남했던 사람들이 들어와 치안대를 모집하자 나는 동네친구인 최식록, 김봉달, 박만식과 같이 현 지서 자리인 강현면 치안대에 가입활동 하였다.
그때 나는 외근과에 군무했는데 대장은 용호리 사람으로 왜정 때 월남했다 돌아온 장복환 이었으며 대다수 대원들은 본적지가 이 고장 출신들로 월남해서 학도호국단으로 이미 가입된 대원들 이었다.
내 임무는 빨갱이들을 잡는 일이었다. 각 동네에 북한 공산당에 가입하여 마을사람들을 괴롭힌 사람들을 잡아 군 정보대에 넘기는 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치안대 일을 하고 있는데 미 8군에서 커크랜드 부대원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알아보니 그 부대는 보급품이 넉넉하다는 것이다.
마침 그 부대가 양양 정손리 마을에 주둔하면서 장병들을 모집했는데 신체가 건강하면 무조건 합격이다. 지원병 대부분이 예전에 월남을 해서 남한에서 학도호국단에 가입해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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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하는 장용진씨>



◆ 50여 명이 침투하였는데 살아온 대원은 3명뿐


모집된 훈련병들은 묵호에 가서 미군에게 훈련을 받는데 개인화기 사격훈련과 박격포 쏘는 법을 배웠는데 훈련병들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연대인원은 고작 50여명으로 12연대와 13연대가 같이 훈련을 받았는데 나는 12연대 2중대 1소대에 배속되었다.
내무반이 없어 1개 분대 6~7씩 개인 빈집에서 자면서 1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식사는 안남미 밥에 건빵과 C레이션 등이 고작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13연대가 고성 통천 알섬에 50여명이나 침투하였는데 살아서 돌아온 대원은 3명뿐이었다.
다음은 우리 부대가 침투할 차례인데 저녁때 술과 음식을 잘 차려놓고 회식을 시켜주면서 식사중인 대원들에게 연대장인 소령이 들어와서“너희들 도망가라! 침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는 또 다시 내일이라도 당장“비행기로 백두산지역으로 공수되어 침투를 할 각오가 되어있는 대원들은 남고 나머지는 다 가라!”고 한다.
연대장 말이 떨어지자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을 했던 학도호국단 아이들은 모두 도망갔는데, 그래도 남겠다고 하는 대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이북에서 나와 대원으로 들어왔던 아이들이었다.



◆ 헌병에게 차를 태워 달라고 하니 묻지도 않고 태워줘


그러나 부대에서는 가만히 있는 우리 친구들에게 7일 동안 먹을 식량을 주어서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로 입대 하러 걸어서 내려갔다가 삼척 지서에 가서 밥을 달라고 하니 무조건 준다. 당시 우리대원들은 상사 계급을 한 인민군복장을 한터라 북한으로 침투하는 HID소속으로 알고는 잘 대해주었다.
그런데 마침 삼척에서 아군의 패잔병들과 함께 신병들을 모집하는데 막상 거기를 들어가면 상사계급을 달고 바로 전투마당으로 가게 되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육본이 있는 대구 가서 정식으로 입대하는 것이 났겠다고 생각하고 대구로 내려갔다.
첫날은 묵호에서 자고 울진을 지나 대구를 못미처 경주역전에 가니 국군이 북진을 한다는 방송을 듣고 에이 도로 집으로 가자. 하고 마음을 먹고는 헌병한태 부탁해서 차를 타고 강릉까지 들어왔다.
당시 우리들은 인민군 복장에 상사 계급을 달고 다발총도 휴대하고 부대에 있다가 나왔으니 그때는 무법천지라 헌병들도 꼼짝 못하고 차를 태워달라고 하니 묻지도 않고 태워주었다.
강릉에서 고향집을 찾아 양양으로 들어오는 도중 예전에 피란을 나오면서 잠자던 집을 찾게 되었다. 그 때 묻어둔 쌀과 감자 김치 등이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그대로 남아 있어서 밥을 해 먹고는 다시 고향 집으로 들어오는 도중 집근처에 있는 조산리의 다리 밑에 다발총을 버리고 친구인 4명과 함께 정암리 마을로 들어오니 피란을 나갔던 가족은 물론이고 마을에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국군 공병대와 포병부대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대구에서부터 헌병에게 부탁해 차를 타고 들어 왔고, 피란민들이야 밤에는 겨우 눈을 붙이고 낮이 되어야 걸어야 하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6 ․ 25전쟁이 터지면서 국군들은 북진과 후퇴를 반복하다보니 국군 선발대는 인민군복장, 인민군선발대는 국군복장을 하며 행세를 하였고, 급변하는 전쟁 상황에 처해지면서 국군 선발대가 인민군 옷을 입고 마을을 지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인민군 복장을 한 국군을 환영을 하는데, 만약 그들이 민간인복장을 하고 민간인으로 가장한 인민군들이나 적색분자로 확인되면 처단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 집집마다 줄을 연결하고 M1탄창을 매달고 공비 출몰시 흔들어 딸랑딸랑 신호


수복이 되고 공비 토벌대로 처음에는 HID소속으로 입대하였다가 후에 양양치안대 설악대 대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치안대가 속초시 상도문에서 모집을 하였는데 임무는 설악산에 은거하고 있는 공비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모집된 대원들을 치안대로 개편하게 되면서 월급도 주었다. 치안대 본부는 상도문리에 두고 5명이 1개분대로 조직했는데 나는 화일리에 파견 되어 근무하였다. 그때 양양남쪽 수사대와 상도문은 설악대라고 했다.
그때 공비들은 밤에 민가에 내려와 쌀, 소, 장 등을 훔쳐가자 자주 훔쳐가자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집집마다 줄을 연결하여 M1총의 탄창을 매달아 놓고 공비가 출현하면 잡아당겨 딸랑 딸랑 소리가 나게 해 연락체계를 갖춰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비들이 나타났다는 신호가 와서 치안대원이 쫒아와 포위를 하고 이들과 30분간 교전 하였는데 영혈사 쪽으로 도망을 가 놓치고 말았다.
그 다음날 공비들이 도망 간 쪽을 수색하면서 살피던 중 연기가 나는 곳을 살금살금 가보니 밥을 해 먹고 잠을 자고 있는 공비들에게 총을 쏘아 5명중 1명을 사살하고, 엎드리고 있던 공비 1명은 생포하여 헌병대에 인계하였지만 나머지 3명은 도주하여 놓치고 말았다.
당시 생포한 공비가 소지한 망원경을 압수하여 집에 보관하였다가 나중에 HID 부대에 반납하고 포상금을 받아 대원들과 회식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한창때라 몸이 날래서 설악산을 잘 타고 다녔으며 공비를 사살한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상도문 지역에서 있었던 일인데 대원들과 함께 정찰수색을 나가 잠복근무중 공비들이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고 인민군을 생포해 HID에 인계한 적이 있다.



◆ 날은 춥고 땔감이 없어서 부처님의 좌대를 뜯어 불을 지폈다.


우리 상도문 설악대원들은 조산에서 창설된 ○○사단과 함께 백담사에서 약 10여리정도 들어가서 암자(영시암) 인근 지역으로 공비 토벌작전을 들어갔는데 암자 주변의 집은 불타고 드넓은 빈터에 논과 밭 그리고 감나무 등 과일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이 지역에서 얼마나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지 나중에 보니 시체가 즐비해 있었다. 그때 어떤 군인은 언제 준비해 왔는지 펜치 같은 연장으로 시체의 금니를 뽑아서 주머니에 넣는 대담한 군인도 보았는데 아무렇지도 않는 듯이 뻔뻔한 태도였다.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때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불을 지피려고 땔감을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자 일부군인들이 절의 부처님을 발로차서 넘어뜨렸는데 부쳐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부처님에 도금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부처님이 앉아있던 자리도 나무였는데 그 나무들도 뜯어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그 외 마루 밑에서는 책과 수저, 식기그릇 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많은 책들은 다 태웠다.
그러나 희생된 아군들은 물론 인민군도 어느 집의 귀한 자식일 텐데 산골에서 이름 없이 죽어 쉬파리가 대드는 것을 보니 마음이 무척 아팠다.
그 후 설악산지구 공비토벌이 끝나자 나는 낙산파견대에 다시 돌아와 근무를 했었다.
설악대에서 2~3년 근무하다가 경찰시험을 보려고 하였으나 연령 미달로 응시를 못하였다. 휴전 후 수복이 되고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이 되자 징집1기로 논산 훈련소 입대 601999 군번을 받고 김해 공병학교 갔다가 인제에 있는 3사단 군수과에서 근무하고 제대를 했다.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아내는 예전에 설악대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중매 결혼을 하였는데 그 때 내 나이는 23세였고 아내는 20세 아가씨 이였다.
당시에는 얼굴도 마주 못보고 중신으로 결혼하여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오순도순 살고 있다.
그리고 참고적으로 알려줄 사항은 왜정 때 면사무소는 강현초등학교 밑에 있었고, 주재소는 현재 물치 이동영씨 부근의 약국 위쪽으로 예전에 손철영씨 집터이며 지금은 공터로 남아있다.



◆ 장용진 씨 부인이 전하는 남편의 짧은 이야기


장용진씨의 부인은 남편이 젊은 시절“설악대에 근무할 때 우리 남편은 몸도 날씬하여 설악산을 번개같이 잘 다녀서 주위에서는 장용진이 나서면 설악산이 벌벌 떨고 있었다.”라고 남편 이야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