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정암리 김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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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42회 작성일 2018-02-2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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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수 (남, 85세, 강현면 정암리) 대한민국 6 ․ 25참전유공자회 양양군지회장
■ 면담일 : 2017.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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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선을 본 아가씨와 38°선을 넘어 월남을 했다.


양양 영덕에 살았었는데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38이북은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몰수당해서 불만이 가득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라 밤마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는데 불려가서 비판 받고 하는 그런 것이 싫어서 1949년 5월 월남을 결심했다.
그때 용호리에 사는 장씨 아주머니가 정암리에 18세의 얌전한 처녀가 있다고 중신을 서서 몇 번 만나 양가에서 결혼하기로 승낙을 받았지만 혼례도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영덕으로 데리고 왔다가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그 아가씨와 함께 38°선을 넘어 홍천에서 부자로 살고계시는 큰아버지집으로 갔다.
그때 나는 집을 떠나면서 나중에 부모님을 모시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영덕의 38°선은 인민군과 로스케가 지키고 있는데 도로가에만 지키고 숲속은 철조망도 없고 지키지 않아 월남이 수월했다.



◆ 우리부대가 주둔한 중청봉 건너에 인민군과 대치했다.


홍천에 가서 나는 마침 나의 형님인 김재수가 서림 호림부대 유격대대장 이어서 호림부대에 지원하여 훈련을 처음 받았는데 총을 쏘는 법과 수류탄 던지는 법을 배웠다.

우리 유격대원들은 백골부대인 3사단 23연대 8중대 포대에 군번도 없이 배속 받고, 1950년 설악산에 침투하였다가 화채봉 전투에서 실패하고 후퇴하여 부대를 정비하여 오색 약수터 근처에 최○○하사와 함께 전방에 보급품을 지원해주는 업무를 맡았다.
카빈소총을 지급 받고 인부 20명을 인솔하여 설악산을 하루 2번씩 보급품을 지고 올라갔다. 그때 우리 부대는 중청봉에 주둔해 있었고 인민군인적은 바로 건너편에 대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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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중인 김근수씨>



◆ 중공군은 10명중 1명만 소총을 가지고 있고 수류탄을 2개씩 달고 있었다.


그 후 유엔군의 참전으로 국군이 반격하며 북진을 할 때 우리가 철원까지 갔을 때가 12월쯤인데,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암록강변 초산까지 진출했던 미군과 국군이 밀리면서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부대가 인제군 귀둔리에 주둔해 있는데 안개가 자욱한 날씨에 헬리콥터에서 보급품을 떨어뜨리고 갔는데 우리가 그 보급품을 수거하려고 하는데 어디서 왔는지 인민군들이 습격하여 왔다.
우리는 놀라 보급품도 제대로 수거하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 그때 보급품은 전투식량인 미국제 씨레이션으로 고기가 든 캔과 과자, 커피, 담배, 껌과 그리고 쌀과 부식재료들이었다.
다시 후퇴가 계속되는데 보급품이 떨어지니 굶으면서 걸었는데 헬리콥터에서 공수했던 씨레이션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강물만 마시고 사흘을 굶었는데 어지럽고 비틀거리며 앞사람을 잡고 걸을 지경이었다.
홍천 남면까지 갔는데 또 중공군들이 북을 치고 괭가리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멀리 중공군이 보였다. 중공군은 10명중 1명만이 소총을 가지고 있고 수류탄은 2개씩 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중공군들이 새까맣게 몰려오니 너무 무서워 공포에 떨었다.



◆ 보트를 타고 2명씩 조를 짜서 북 고성 통천 앞 알섬으로 침투했다.


우리 대원들은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들의 공세에 쫓겨 대열을 정비할틈도 없이 어찌할 바를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23연대는 어디 갔는지 찾을 수도 없이 혼자가 되어 주문진까지 걸어서 후퇴하다가 마침 현지에 주둔하고 있었던 8240부대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 이름이 켈로 부대라고했고 한국군과 미군이 훈련을 시켰다. 훈련을 마치고 보트로 북 고성 통천 앞 알섬으로 침투하기로 명령이 내렸다.
소지품은 권총과 실탄 9발, 단도 1개 주먹밥 2개다.
권총은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니면 쏘지 말고 단도는 사살용이나 자살용으로 사용하라고 한다. 어두운 밤 고속 보트에 7명이 타고 알섬에 닿았다.
우리끼리도 서로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여기서 부터는 2명씩 짝을 지어 조장은 고성 지리를 아는 사람이 맡아 허름한 농부차림으로 부대에 접근하여 적의 부대를 탐지하고 내일 날이 밝기 전인 새벽4시에 배로 돌아와야 하고 만약 돌아오니 않으면 보트는 떠난다고 한다.
우리가 어둠을 뚫고 들어가니 적의 부대가 여단 이상의 부대로 병력이 대단히 많았고 주위 경계가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 제시간에 도착해 보니 다른 조는 보이지 않고 우리만 돌아온 것 같았다. 다른 대원은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주문진 부대에 무사히 도착하니 1주일간은 푹 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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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시절>


◆ 헌병대에서 귀향증을 써주고 미군이 안남미를 한 자루씩 주다.


1주일 후 다시 집합을 시키더니 이번에는 속초 지역으로 침투한다는 것이다. 속초 지역은 내가 지리를 잘 알고 있는 터라 내가 조장이 되어, 장사동 바닷가 갯벌에 내려 밤에 고성 운봉산 뒤로 잠복해 들어갔다. 이번에도 인민군 주둔지를 정찰하고 제 시간에 2개조 모두 찾아 돌아왔다. 그 다음은 우리 대원들에게 낙하산 훈련을 시킨다.
정암리 해변에서 미군이 훈련을 시켰고 한국군은 통역을 하였다. 그런데 훈련을 마치고 출발하기 전날 밤 회식을 시켜주었다. 그때 한 소령이 들어와 내일 적지에 낙하산으로 투입되면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오늘밤 도망가라고 한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우리 유격대원들은 현지 입대나, 아니면 집으로 가거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현지 입대하면 우리가 달고 다닌 중사나 상사의 계급장을 그대로 인정해 준다고 했다.
전쟁에 시달리던 나는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헌병대에서‘귀환증’을 해 주며 미군이 안남미 20kg들이 한 자루씩 주는 것을 가지고 왔다. 영덕으로 갔는데 아내는 내가 밖에 나갔다가 고향으로 들어오지 않는다하여 처가가 있는 정암리로 가 살고 있었다.
당시 호림유격대원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오로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공산주의정권의 인민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나는 속초 설악산 비선대로 가는 길옆 적지에서 싸우다 산화한 군번도 없는 전우들의 호림유격대 위령비와, 또 고성군 통일 전망대 전적비에도 매년 9월 27일이면 찾아가 추모의 예를 올리고 돌아오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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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씨 현역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