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강선리 손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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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02회 작성일 2018-02-2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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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인호 (남, 79세, 강현면 강선리)
■ 면담일 : 2017.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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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군가를 가르쳐주시던 여선생님은 월남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고꾸민각꼬(국민학교) 1학년을 5개월 다니다가 해방이 되고 바로 인민학교 1학년이 되었는데 북쪽에서 내려오신 남○○라는 여선생님은 독립군이 부르던 노래라면서 우리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최후에 결전을 맞으러 가자 생사가 운명에 반 거리다.
나아가자! 나아가자! 굳게 뭉치어 승리는 우리를 재촉한다.
총칼매고 혈전의 길로 다 앞으로 동지들아 승리의 길은 우리 앞에 날린다.
다 앞으로 동지들아.
병정들이 나팔을 불며 발을 맞추어 나간다.
하나 둘 셋 넷 나팔 불며 나아간다.
그 후 남○○ 여선생님은 몇 달을 근무하고는 38°선을 월남하셨다. 당시 교과서는 없었고 자음(ㄱ,ㄴㄷ,ㄹ... )과 모음(ㅏ,ㅑ,ㅓ,ㅕ...)을 칠판에 써서 배웠다. 2학년 때는 깜장 열갱이란 별명을 가진 여선생님은 구구법을 가르치셨고 그날 배운 것을 외우지 못하면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다.
그 선생님도 역시 나중에 월남을 하셨다.



◆ 천주교 신자들은 야밤에 남몰래 세배를 다녔다.


우리는 할아버지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는데 이광재 신부가 오셔서 기도를 했다. 아버지가 속초읍 도문까지 걸어가서 대부(후견자)인 오재근님께 남들이 모르게 밤에 세배를 드리려 다녔다.
일제강점기 때는 천주교를 믿는 것이 자유스러웠지만 북한 정권에서는 1947년까지는 교회 믿는 걸 막지 않았는데 48년부터는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하였지만 숨어서 기도를 하였다.
1947년쯤 강현 중학교가 생기면서 아래 3칸은 인민학교, 위층은 중학생이 배웠는데 교실이 부족하니 강선리와 장산리 동사에 가서 공부하였다.
교과서는 2학년부터 있었다. 5학년 때 부 통학반장이 되었는데 우리 집이 외딴집에 살아서 구호 부르러 나오라하데 잘 나갈 수가 없었다.
물치 장날은 맨발로 자갈밭을 걸으면서 부르니 발이 많이 아프고 밤에도 구호를 부르러 가야 하는데 통학반장이“현물세를 바치자! 문맹을 퇴치하자! 김구, 이승만, 조만식을 타도하자!”하고 선창하면 다른 학생들이 줄을 서서 행진하며 따라 외치는 행사인데 나는 잘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부 통학반장 완장을 박탈당했다.



◆ 이놈의 세상 한탄 하다가 내무서 명단에 이름이 올랐었다.


1950년 6일 25일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중학교에 다녔는데 마을마다 세포위원장이 지도를 붙여 놓고 오늘은 대전, 그리고 다음에는 대구를 표시하며 인민군이 남조선을 해방시키고 있다고 선전했고, 학교에도 그렇게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허구한 날 인민회의에 매일 회의에 불려 다니니까 “이놈의 세상 언제까지 가려고 사람 못살게 구는지!”라고 푸념을 하였는데 그때 마침 뒤에 따라오던 처녀들이 내가 한 소리를 듣고 내무서에 고발 한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것은 얼마 후 국군이 들어와서 강현면 내무서 서류에서 우리 아버지가 사상이 불순한자의 명단에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그때 만약 국군이 조금만 늦게 들어왔더라면 아버지는 공산당에게 인민재판을 받고 최악에 경우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운 입장에 처해질 수 있었지만, 천만 다행으로 하느님이 보호해주셨는지 국군이 일찍 들어오는 바람에 살아날 수 있었다.
하루는 학교에 갔다 오는데 쌍가달 비행기가 정암리 낙산 기차정거장에 폭탄을 떨어뜨려 불이 났다. 거기에는 말에게 먹일 마초가리와 전쟁 물자들이 쌓여있었다. 불길과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놀라고 무서워 친구와 가시나무 숲에 들어가 숨었는데 집에 와보니 얼굴에 가시에 찔려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 방공호로 대피하니 빗물이 가슴까지 차 올랐다.


강현중학교에는 복도를 나서면 바로 방공호와 이어지게 교통호를 파놓았는데 비행기 소리가 나자 사이렌이 울려 방공호로 뛰어 들어가 대피하는데 비가 와서 물을 미처 퍼내지 못해서 빗물이 가슴까지 찼다.
어느 여름날 B29 폭격기가 양양철광산을 폭격하는데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산이 울렸다. 그때도 학생들은 방공호에 들어가 가슴을 조이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밤이면 대나무 죽창을 만들어 들고 중학교 1학년인 나는 3학년 백상집 형과 한조가 되어 보초를 섰다. 밤마다 그러다보니 공부는 할 수가 없었다.
다행한 것은 경상도 일부와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이 밀리는 위급한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의 지휘아래 연합군이 인천상륙에 성공하자 보급선이 끊기며 전세가 불리해진 인민군은 북으로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 불속에서 건진 예수십자가와 시계가 가보가 되었다.


전세가 반전된 유엔군은 국군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 겨울에 남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다. 이 때 남하하는 중공군과 인민군들이 임시라도 거처할 수 없도록 민간인 들이 피란 간 빈집에 국군과 치안대가 짚에 불을 붙여 초가집에 들이대니 불길이 순식간에 집에 불이 났다.
전 동네의 집을 태우는데 불길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여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강선리가 150호인데 100호는 타고 50호 정도는 안탔다고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때 물치와 정암리 역전도 탔는데 큰신작로에서 잘 보이지 않는 용호리, 정암리, 복골 등은 골짜기에 있어서 태울 때는 면할 수 있었으나 그마져 일부는 나중에
폭격으로 탔고 사람도 많이 죽었다.
우리 집도 그때 불에 탔는데 어머니가 불속에 들어가 시계와 예수 십자가를 가지고 나오셨는데 지금도 우리 집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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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속에서 꺼내온 시계와 예수 십자가>



◆ 현물세를 받으러 왔다가 불탄 쌀 먹는 걸 보고 그냥 갔다.


전쟁이 한창이다 보니 군인이 모자라게 되자 그때 동네 형인 이상익과 전상집 등은 인민군에 징집되어 나갔는데 이상돈도 인민군에 징집되어 나가려고 하였으나 체중이 모자라 뽑아가지 않아 다행이었고 나는 어려서 아주 제외되었다.
당시 인민군이 다발총을 매고 어깨에 별 같은걸 4개 붙인 인민군이 현물세를 내라고 했지만 우리는 집이 없어 움막에서 불에 타다 남은 쌀로밥을 해 먹는데 그걸 보고는 그냥 갔다. 그해에는 눈이 하도 많이 와서 눈에 나무가 많이 부러졌다.
그래서 나무를 베어다 김남성 집과 황현주네와 우리 식구는 위골에 방공호를 파고 동발을 세우고 굴을 팠는데 입구는 하나이고 들어가서는 세 갈래로 내서 세 집이 사용하게 팠는데 김○○세포위원장이 인민위원회사무실로 쓴다고 빼앗았다.
그래서 다시 뻐꾹산에 황돈태 네와 대충 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밤에는 내려와 불이 타지 않은 몇 집에 같이 비좁게 살아야 했다. 그때 인민군들이 식사하는 걸보니 쌀밥에 고등어 졸인 것을 반찬으로 먹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우리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서 피란을 못가고 집이 탄 방 고래위에 나무를 걸치고 이엉을 덮어 집으로 쓰고 살다가 2년 후에 토막집을 지었다.



◆ 국군 배낭을 지고 원암을 갔더니 또 가자고하여 막 울었더니 보내줬다.


우세한 미군의 공격무기인 비행기와 군함들을 앞세워 아군의 반격으로인민군들이 쫓겨서 북으로 들어가는데 긴 줄이 이어졌다. 이들은 큰 신작로로 후퇴해 들어가면 비행기에 노출되어 공습이 두려워 신작로를 피해 화일리에서 물갑리와 회룡리를 거쳐 복골 소금재를 넘어 북쪽으로 갔다.
나는 그때 13살 때 인데 마을 앞에 국군이 행군하는 걸 구경나갔다가 군인 배낭을 지고 가자고 하여 중도문리까지 따라가게 되었다. 쌍천을 지날 때는 하천에 지뢰를 묻어놔서 한 줄로 서서 잘 살피며 건넜다. 그런데 고성 원암까지 더 가야 한다기에 가지 않으려고 막 울었더니 돌아가라고 보내주었다.
그 후 국군이 들어와서 인공정치가 끝이 나고 자유 대한민국에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아프셔서 일 할 사람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다가 1952년도에 늦은 나이에 국민학교 6학년에 입학하게 되었다.
국민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 속초중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그나마 2학년을 마치고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드려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