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정암리 김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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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32회 작성일 2018-02-2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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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래 (남, 75세, 강현면 정암리) 전 강현면우체국장
■ 면담일 : 2017.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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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밥 구경은 명절 때나 제사 때만


아버지(김남한)께서 살아계신다면 현재 나이로 107세이다. 당시 양양철광산에서 광차 레일 점검반에 근무하셨는데 8 ․ 15해방이 되면서 처가가 있는 강현면 정암리로 이주하였다. 우리 속담에 겉보리 서 말 만 있어도 처가살이를 안 한다는 처가살이를 한 것이다.
해방 후 북한 공산당은 지주들의 논밭을 몰수하여 땅이 없는 농민에게 분배를 하는데 아버지는 광산에 다녀 농민이 아니므로 어머니가 친정에 다니며 농사일을 도운 것이 참작이 되어 논 서마지기인 약 600여 평을 분배 받았다.
그때는 비료가 없으니 짚이나 풀 등을 쌓아놓은 두엄 밭에서 흘러나온 오장물이나 소똥 등으로 썩혀 퇴비를 만들어 논 거름으로 사용했고, 밭에는 짚에 인분과 불을 때고 남은 재를 섞어 재거름을 만들어 농사를 짖다보니 지금의 절반정도 밖에 수확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11식구가 농사를 지어보았자 현물세로 수확량의 반을 공출로 내고 나면 1년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현물세 계산은 분배 받은 전체면적에서 논둑과 도랑을 포함하여 600평에서 벼가 잘 된 곳을 골라 사방 6자를 측정해서 1평 정도에서 나온 수확량에 600을 곱한 다음 그중 절반을 계산하여 공출로 걷어가고 남는 쌀 2.5가마 정도가 1년 식량이어서 쌀밥은 명절이나 제사 때만 맛 볼 수 있었다.
그 외에 날에는 나물과 잡곡에 쌀을 조금 넣고 죽을 쑤어 먹으며 11식구가 살아야 하니 그 곤궁함이란 상상을 하기도 싫다. 그러나 다행히 형님이 글씨를 잘 써서 현 양양농협중앙회자리에 있었던 양양소비조합에 다녀서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 인민군에 간 형님은 낙동강 전투 후 지금껏 감감 무소식


그때는 형님이 걸어서 양양을 다녔는데 하루는 형이 땀에 흠뻑 젖어 집에 들어와서는 바로 쓰러지셨다. 이유인즉 낙산 눈 고개를 넘는데 호랑이가 모래를 끼얹어 돌아보지 않고 뛰어 오다보니 진땀이 났다고 한다.
그 후 형님은 결혼하여 양양에 살았다. 그러던 형님이 전쟁이 나면서 젊은 청년들과 인민군에 징집되어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고 하는데 지금껏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망한 것 같다.
아버지는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고 민주당에 들었는데 마을에서는 민주당 사람들은 끌려가서 많은 사람들이 맞아 죽었다고 했다. 다행이 우리 아버지는 형님이 마을에서 서기를 보다가 소비조합에 다니는 바람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동네 청년들은 저녁마다 마을에 모여서 학습을 하는데 안 나가면 큰일이 난다. 저녁밥은 못 먹어도 저녁 학습에 나가서 사상교육을 받고 비협조적이면 끌어다 매질을 하고 비판을 받는다. 이를 주도하는 사람은 인민위원장과 청년위원장이 하는데 대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와서 교육을 담당한다.
카드백이(애꾸눈)라고 하는 김○○ 민청위원장은 동네에서 예쁘게 생긴 이○○ 아가씨가 같은 마을에 사는 마○○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민청위원장인 자기가 가로채려고 마○○을 물푸레나무로 만든 도끼 자루로 어깨고 머리고 때렸다.
그때 이○○ 아가씨가 민청위원장을 가로막아 그 사이에 마○○총각이 도망을 치는 사랑싸움도 있었는데, 그때 그들의 나이는 대부분 18~19세였다.



◆ 인민재판이 심해 공포생활


또 김○○ 아저씨는 공산당에 안 들었다고 어떤 핑계를 만들어 복골에 있는 방공호 속으로 끌고 가서 박달방망이로 때려서 죽어서 돌아왔다. 당시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을 잘 하 면 땅을 많이 분배받을 수 있었고, 당에 가입하지 않으면 분배 토지도 적게 주고 자기네 마음대로 데려다 일을 시키는 등 공산당원들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농민 인민위원장 이었던 김○○는 농사를 잘 지어 공을 세우려고 밭에 육산 모 못자리를 만들었다. 지금처럼 비닐도 없이 볍씨를 뿌리니 냉해를 입어 실패하여 문책성으로 인민재판을 받았다.
그는 후에 처벌이 두려워 바지 끈으로 목을 매어 죽었는데 그때 나이 30세였고 아이들도 3명이나 있었다. 이렇듯 북한사회에서는 인정사정도 없이 무지막지한 인민재판으로 공포에 떨면서 살아야만했다.
1950년 어느 날 부터인가 동네 사람들에게 마초를 베어오라고 했다. 마초는 그 집 식구 대로 목표량이 할당되면 풀을 베어 말려서 지게로 지고 현 코레일 연수원 자리에 있었던 낙산역에 가져가면 검사원이 속까지 파
헤쳐보며 썩은 것과 덜 말린 것 등을 검사하고는 산더미 같이 쌓아 놓았다.
이는 소련군이 타고 다니려는 말에게 먹일 사료로 사용하려고 주민들에게 의무적으로 할당하여 모은 것이다. 그러나 전쟁 초 미국 비행기가 폭격을 하여 그 마초 가리 더미가 불이 붙어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그때 우리는 비행기에서 폭격을 하여 죽을 수도 있었는데 아랑곳 하지않고 마초가리가 불타는 것을 구경하려고 언덕에 올라갔을 때였다. 비행기의 기총사격으로 총알이 근처에 수십 발 박히는 상황에서도 겁 없이 구경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철부지 한 짓들이다.



◆ 큰 누나를 남의 집 민며느리로 보낸 사연은


당시 이북에서는 미군 비행기들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라고 했다. 나는 그때 어린 나이라 6 ․ 25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몰랐다. 마을 뒷산위에 나무 4개를 박아 전망대를 만들고 비행기 소리가 날 때 마다 종을 치면 방공호로 들어갔다.
바다에서는 미군이 설악산을 향해 함포사격을 하였는데 포탄이 집 위로 날아 다녔기 때문에 외조부가 돌아가셨음에도 문상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야간에는 석유 남포등이 없어서 고작 명태 애 기름으로 빼꼼이 불을 켜놓거나 소깽이(관솔:소나무 옹이)불을 켜고 어두운 밤을 지새웠다.
외조부님이 돌아가시자 부모님 두 분과 우리 삼남매 그리고 형수와 조카이다. 당시 부모님은 16살 큰 누나를 보고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서면 황이리에 민며느리로 보내려는데 안가겠다는 것을“거기 가면 밥은 실컷 먹을 수 있으니 아주머니 따라 가거라”하여 용호리 친척 아주머니를 따라 민며느리 시집을 보냈다.



◆ 소똥 냄새가나도 마구간이 있어 참 다행


국군이 후퇴할 때 우리 집 7식구는 먹을 식량과 이불 등을 나누어지고 삼척까지 갔다. 피란길은 대체적으로 구 철길로 과거 동해북부선으로 폐허가 된 철길에 바닥은 자갈밭이다. 기차 길 위에는 레일이 없는 곳이 있었으며 받침목만 남아 있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수, 누님, 그리고 동생은 어머니가 업고, 형수는 우선 필요한 필수품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조카까지 업고 걸었다.
피란길은 괴롭고 힘들었으며 신발이 없어 변변한 고무신 한 켤레도 없으니 인민군이 버리고 간 통다비(통일화)를 주서 신고 출발했으나 어른 신발이라 아홉 살인 내발에는 맞을 리가 없다. 끈으로 묶고 그도 없으면 짚으로 새끼를 꼬아서 발을 묶고 걸어가니 얼마 못가서 끈이 끊어져 가족들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다.
부모님들은 빨리 안 따라온다고 야단이시니 울고불고 피란길은 참으로 고생스러웠다. 피란행렬은 길고도 길어 한번 떨어지면 부모님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산인해인 피란민행렬 속으로 계속 걷고 또 걸어야만 했고, 발이 부르터 피가 나고 물집이 생기는 고행 길을 걷다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는데 과연 6 ․ 25전쟁은 누가 저질은 전쟁이며, 미국인가? 소련인가? 어린 나에겐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모진 고생과 험난한 피란길을 걷다보니 삼척 남양동에 장동환 이라는 친척이 살고 있다고 해서 거기를 찾아 갔으나 묵을 집은 없고 잘 곳도 없어 소가 없는 마구간에 들어가 머물게 되었다.
소는 전쟁 통에 없어졌는지 알 수 없었고 소가 마구간 벽에 설사 똥을 싸 놓아 말라붙은 그 소똥 냄새도 아무렇지도 않았고 그나마 잠 잘 수 있는 곳이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 밥을 더 얻으려고 아버지와 따로 따로 동냥


그러나 무엇보다 가지고 간 쌀이 다 떨어지니 배고픈 설움이 당장 눈앞에 닥쳤다. 할 수 없이 마을에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면서 밥을 동냥해 와야 했다. 아버지와 함께 가면 한 몫만 주니 한몫을 더 얻기 위해서는 따로 따로 다니자고 아버지가 말씀하셔서 그대로 하여 얻은 밥으로 가족들의 허기를 면하기도 하였다.
전쟁 중에는 집에 아무리 논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농사꾼이라 한들 피란살이 도중에는 거지가 되었는데, 기술이 있는 사람은 쌀을 쌓아두고 사는 것을 보고 기술이 제일이라 생각했다. 그 기술자들은 미군이 쓰다버린 빈 깡통이 많은데 가위로 잘라 밥그릇도 만들고 쓰레받기와 양동이도 만들고 그 깡통으로 지붕도 덮으니 그 기술을 밑천삼아 쌀이나 좁쌀을 바꾸어 잘 사는 집을 보았다.
고향에서 배웠다고 하는 사람은 피란살이를 하는 지역에 와서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동사무소에 가서 사무도 보고 하는데 기술이 없으니 밥 동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은 꼭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모질게 피란생활을 이어가던 중 반가운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젠 고향으로 들어가도 된데”라는 이 말이 얼마나 듣고 싶어 하던 말이었던가? 이젠 살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 모판이 없어 논 두럭에 버린 모를 주어다 심다.


손양면 도화리 굴다리에 왔을 때 왠 군인 차가 오더니“짐 내려놔!”라고 하더니 아버지를 차에 태워 어디론지 갔다. 남은 식구들은 항의도 못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지고 가던 짐을 나누어지고 중간지점 또는 멀리 보이는 곳까지 지고 가서 땅에 내려놓고 다시 와서 또 이어지고 왔던 자리를 다시 되돌아가 왔다가 갔다가를 반복하여 짐을 겨우 옮기며 집에까지 왔다.
결국은 같은 길을 두 번씩 반복해서 짐을 지고 운반한 셈인데, 이를 ″전체짐″이라고 불리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정암리 집 마을 앞 논에는 모내기가 끝났다. 피란을 나가지 않았던 이웃 노인들이 가까운 논에 못자리를 만들어 놓고 가족들이 먼저 들어오자 모내기를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도 안계시고 논도 없고 하여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주인 없는 논을 일구어 남의 논 두럭을 다니며 모내기 하고 남은 모를 주어다 모내기를 하였다. 논은 아버지가 안계시고 소도 없으니 갈 수도 없어 작년에 모를 심고 벼를 베고 난 벼 글거리 옆에 모을 심었다.
그리고 집에서는 10살인 내가 장정 역할을 하여야 했다. 그러니 논 거름도 못하였으니 심은 벼가 잘 자랄 수가 없었다. 수확을 해야 많지 않으니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제사 때에 축도 쓰고 읽어야하니 너는 서당에 나가라


다행이 아버지는 9개월 만에 돌아오셨는데 많이 수척해 있고 발바닥이 굳은살 딱지가 앉아 잘 걷지도 못하시고 일도 할 수 없으셨다. 적지에 가서 주먹밥을 싸가지고 다니며 호도 파고 탄알을 져 나르기도 하고 보급품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고 하셨다.
군인은 참호 속에서 전쟁을 하는데 짐꾼들은 보급품을 나르다보니 군인보다 짐꾼들이 더 많이 노출되어 보급품을 차단하려는 적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어 많이 죽었다고 한다.
또 후퇴하는 사람은 헌병들이 뒤에서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여 도망 갈 수도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1년이 지난 후 건강이 겨우 회복되어 학교에 보내주니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강현국민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김동욱 담임선생님께서 아버지를 찾으시고“충래는 가르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중학교에 보냅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이놈을 학교에 보내면 내가 농사를 다 못 해 일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여 나는 중학교에 못가고“너는 커서 제사 때 축이라도 쓰고 읽어야하니 서당에나 다녀라.”하셨다.
그 후 나는 벼루와 붓을 지고 논골 최성길 훈장님께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석 달 만에 천자문을 띠고 무제시,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배워나갔다.



◆ 해산물을 영 넘어 사람들과 곡식과 바꾸미로 연명


전쟁 전과 휴전 후부터 바꾸미라는 것이 있어서 정암리 염전거리에서 만든 소금과 바다에서 나는 미역과 그리고 꽁치와 고등어 등을 소금에 절여 지게에 지고 구룡령, 조침령, 북암령, 박달령, 오색령 등을 넘어 홍천과 인제를 다니며 영 넘어 에서 많이 나는 굴암(도토리), 옥수수, 콩, 감자 등을 바꾸어다 식량으로 사용하니 많은 사람들이 바꾸미에 나섰다.
이 바꾸미는 해방 전후에도 행해졌고 인공치하 때도 국군초소와 인민군초소를 피해 다녀야 했는데 특히 인민군 초소 인근지역을 통과 할 때에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기척 없이 피해 남북을 오가면서 물물교환을 할수 있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웃 용호리는 전쟁으로 다 타서 집을 새로 지었는데 우리가 사는 징 바위는 아직도 옛날 집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징 바위는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가 좁아 도로에서는 잘 안보여서 국군이 후퇴 때도 다른 동네는 다 탔는데 징 바위는 타지 않아 피란 곳이라 불렀다. 나중에 국군이 반격을 할 때 마을 인민위원장 집 문이 열려있어 가서 살펴보니 집이 비어 있었는데 누구 말로는 북으로 피란을 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