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상월천리 조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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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31회 작성일 2018-02-2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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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진구 (남, 83세, 현남면 상월천리)
■ 면담일 : 2017.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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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군이“내일 모래면 통일이 되는데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6 ․ 25전쟁이 나자 마을 청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전쟁 났다고 가르쳐주어 주위에 있는 동네 대여섯 가구가 남보다 먼저 피란을 나갔다.
첫날은 주문진 장덕리에 있는 절에 가서 유숙을 하게 되었는데 그 절의 스님이 이런 일이 두 번 더 있어야 평화가 온다고 말하였다. 이튿날 다시 남으로 피란길을 재촉하는데 인민군들이 피란길을 막아서 할 수 없이 더이상 남으로 피란을 나갈 수 없게 되어 주문진 삼교리를 지나 하월천 마을에 접어드니 밭두렁에 인민군이 새까맣게 늘어져 있었다.
그때 인민군들이“어디 갔다 오느냐?”고 묻자 피란을 갔다 옵니다. 라고 말을 하니 그들이“내일 모래면 통일이 되는데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라고 한다. 집에 돌아오니 인민군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돌아다닌 발자국이 사방에 나 있었다.
1 ․ 4후퇴 때는 강릉 모전리까지 피란을 나가 빈 집에서 자는데 바다에 떠있던 군함이 함포사격을 하여 우리가 자던 집 굴뚝 쪽 벽이 무너지는 일도 있었다.



◆ 피란생활에 소를 팔아 농사철에 소 대신 사람이 연장을 끌었다.


그래도 그 집에서 용케 살아났는데 인민군이 후퇴할 무렵에 고향으로 들어오다가 날이 저물어 빈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때 인민군 한명이 총을 메고 들어오는데 장총이 땅에 끌릴 정도인 어린군인이다. 그래서 그 아이들의 총을 빼앗고 잡아서 신고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불쌍하여 그냥 돌려 보내주었다.
다음해 봄이 되어 다시 국군이 들어오게 되자 우리도 따라 들어왔다. 그러나 농사를 지으려니 피란을 나가 식량을 해결하지 못해 끌고 갔던 소를 쌀 5말에 팔아먹었으니 소가 하여야 할 일을 사람이 대신 그 일을 해야했다. 소가 밭을 갈 때 쓰는 가대기나 논갈이 때 쓰는 연장이나 써레를 사람이 앞에서 소 대신 끌었다.
그 당시 우리 마을의 김성열 할아버지는 그 험난했던 피란생활과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소를 아무 탈 없이 데리고 돌아왔다.
농사철이 되자 전 마을에 그 황소가 한 마리뿐이니 인기가 대단하여 그 소를 부리려면 줄을 서 기다려야 했고 소를 하루 부리면 사람 두품에 값을 쳐주어야 했다. 그 때마다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피란살이에 한 식구처럼 지내 정이 들었던 소를 가족들의 베고픔 때문에 견디다 못해 쌀 다섯 말에 소를 넘겨주고 고향에 돌아오니 일할 때마다 그 소가 많이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