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전진리 이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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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56회 작성일 2018-02-2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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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수 (남, 75세, 강현면 전진리) 낙산신용협동조합장
■ 면담일 : 2017.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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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참혹한 공산치하에 살면서 남은 기억


세월이 흐르다 보니 6 ․ 25를 겪은 세대들도 거의 죽어가고 그때의 참혹하고 어려웠던 일들을 글로 남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이 글을 쓰게되었다.
나는 당시 양양군 속초읍 중도문리에서 살았는데, 속초 시내에서 논미고개(논산리 뒤 고개)를 넘어 청대산 아래 작은 농촌 마을이다.
나는 어릴 적에 짚신을 신고 옷은 어머니가 무명실을 뽑아서 베틀에 앉아서‘짤깍 찍깍’하고 소리를 내며 짠 천으로 옷을 해 입었지만, 당시 누에를 처서 실을 뽑아 짠 명주는 아주 고급 옷이었다.
밥은 하루에 세끼조차도 먹기 어려워 질경이나 쑥이 밥그릇을 차지했다. 어느 날 우리 뒷집 미우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갔다 온 후 마루에 앉아 쑥 밥을 먹는 것을 보고 집에 가시더니 보리밥 반 그릇을 다져다 주셨는데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우리 누나는 왜 그 아주머니가 오셨을 때 밥그릇을 감추지 않아 창피했다고 종종 나에게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곡식이 아주 귀할 때라 들에 나물이나 바다풀 밥도 자주 해 먹었다.
나는 어려서 해방의 감격을 알지 못 하지만 북한 공산 정권이 들어선후 부터 기억이 있다. 저녁이면 형 누나들이 모여 가면 나도 따라 가 보았다. 사람이 많이 모인 동사 방에 어떤 청년이 나와서 연설을 하다가 책상을‘탁’하고 힘껏 내려치면 박수를 친다. 나는 그때 의미도 모르고 책상만 치면 박수를 쳐야 되는 줄만 알았다. 그리고 어떤 누나도 나와서 연설을 하고나면 또 박수를 쳤다.
연설이 끝나면 줄을 서서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멀리서 앞서가던 한사람이 구호를 외치면 줄을 서서 가는 청년들과 누나들이 구호를 따라 외친다.
그리고 캄캄한 밤중에 구호를 외칠 때는 그 소리가 메아리쳐서 아주 멀리울렸는데 나는 밤에는 어둡고 무서워 따라가지는 않았다.
우리 집은 강 건너말 이라고 하여 네 집이 떨어져 있어 건너말 아이들과는 놀지 않고 뒷집에 송자라는 여자아이와 눈만 뜨면 그 애와 놀았다.
사람들은 송자 네를 보고 흰 패라고 부르며 가끔 군인들이 와서 그 집을 옷장까지 다 쏟아놓고 간 후에 그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나는 영문은 모르지만 흰 패는 나쁜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송자 오빠인 김찬우가 월남하여 흰 패라고 부른다고 했다.
나는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어린나이라서 형이 가르쳐주는 노래와 높은 사람들에 이름을 외우고 있었는데, 그때 노래는 김일성 장군 노래이고 스탈린은 대원수이며 우리나라를 해방시킨 은인이고 무슨 장군, 무슨 상 등 북한사회의 고위직 이름은 다 외웠다.
그때 어른들이 나를 만나면 높은 사람들 이름을 외워보라고 시켰다. 그러면 나는 신이 나서 줄줄 외웠고, 노래도 시키면 멋지게 목청을 돋우어 불렀다. 그 당시에는 책도 라디오도 없는 세상이라 버릇이 되어 김일성 장군 노래만 부르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느 쪽도 아니고 농사를 짓는 농부다. 여름 한날 동사 앞에 솔문이 생겼다. 아저씨들이 소나무로 문을 만들어 소나무 가지를 꽂아 아치를 만들고 국기를 쫒아 놓고 사람들이 모여 박수를 친다.
옆에 가 보니 앞에 목침 크기만 한 라디오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를 듣고 박수를 친 것이다. 그 소리는 인민군이 남쪽으로 가서 남조선을 해방시키고 있는데 며칠만 있으면 통일이 된다는 것이다.
통일 된다고 선전을 하던 인민군들이 어느 날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경상도 대구까지 밀고 내려가며 승승장구하던 인민군들이 북쪽으로 후퇴를 거듭하더니 국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해오자 설악산에서 전투가 한창 벌어졌는데 아버지를 데려가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한다고 울고 야단이 났다.
그때 동네 할머니들도 와서 위로해 주었고, 설악산에서는 계속 대포 터지는 소리에 불안하기만 하고 가족들은 안타깝게 아버지만 기다렸다.
그리고 한 보름이 지나서야 밤에 아버지가 돌아오시더니 겁에 질려 말도 잘 못 하셨다. 그때 아버지는 짐을 지고 설악산을 몇 번 올라갔다 왔는데 그날은 짐을 지고 따라 가는데 어떤 인민군이 무슨 다른 심부름을 시키는 바람에 짐을 내려놓고 가는 것처럼 하면서 틈을 엿보다가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며 산길로 도망쳐 산을 넘어 오셨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우리 집은 서둘러 피란을 떠났는데 아버지와 그리고 누나와 형이 짐을 지고 어디론지 가셨다. 그때 전염병에 걸려 같이 못가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 작은 누나와 나는 피란을 못가고 집을 지켰다.
온 동네가 피난을 나가서 동네가 비었는데 낮에도 무서워 밖에 나가지 못했다. 후에 아버지는 손양면 도화리에서 피란 생활을 하며 고생을 하였다고 했다.



◆ 뒷집 옷장 속에는 기관총 알이 박혀 있었다.


어느 날 폭격기가 날아와 폭격을 하고 대포 터지는 소리가 끈이지 않으니 아버지는 집 뒷산에 방공호를 팠다.
둥그런 굴 입구는 커서 앞에 거적으로 문을 만들고 식구들이 밥도 거기서 먹었다. 나는 동생과 낮에는 뒷산에 가서 굴을 팠는데 땅굴을 파는 것 자체가 그때는 놀이처럼 여겼을 때였다. 그러나 흙냄새가 싫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고막이 터지는 듯 소리와 함께 포탄이 마당 앞 논에 떨어져 한참 후에 나가보니 큰 웅덩이가 파여 있었지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다.
초가을인가 소를 매기러 논길에 갔는데 물치리 바닷가 쪽으로 시커먼 전투기 두 대가 날아가는 걸 보았다. 나는 또 북쪽으로 날아가겠지 하고 소에 풀을 먹이는데 갑자기 청대산을 넘어 그 전투기가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그때 내가 가던 길은 논둑이어서 어디 숨을 곳도 없어 정신없이 논둑길을 뛰어 우리 집으로 숨는다는 것이 뒷집 부엌으로 들어갔다. 꽝! 소리와 합께 먼지가 자욱하게 나다가 사라진 후 나는 정신이 나간사람처럼 뛰어 마당으로 나갔다.
그날 개똥이네 집과 문천집이 탔고 아랫말도 몇 집이 탔다. 나중에 보니 뒷집 옷장 속에는 기관총 알이 박혀 있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은 굴속에서 내가 총알을 피해서 논둑을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죽는 줄 알고 애를 태웠다고 했다.
지금도 아찔한 순간이었고 더욱 궁금한 것은 그 비행기가 왜 나를 쏘았으며 맞출 수도 있었을 텐데 겁만 주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지만 비행기는 조금한 어린애 보다 집을 폭격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비행기 폭격이 있은 후 산에 가면 기관총 탄피를 주을 수 있었다. 노란색 탄피가 좋은 장난감이 되었고 탄알 연결 고리는 불에 달구어 두드려 펴서 칼을 만들어 썼고 나무 막대에 기관총 탄피를 고무줄로 묶고 M1실탄에서 빼낸 좁쌀 같은 화약을 넣고 불을 붙이면 불꽃이 멀리 까지 나오는 좋은 장난감이 되었다.
그리고 박격포 뒷날개에는 노란색 종이 같은 화약이 있었는데 뒷집에 사는 김○○는 거기에 불을 붙이자 불꽃이 날아가면서 얼굴에 붙어 화상을 입게 되자 군인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했지만 아직도 그때 입은 화상 상처가 남아 있다.
대포바다 쪽에서 함포를 쏘면‘짜~르르’하고 소리를 내며 설악산 쪽으로 날아가는데 한참 후에‘우르릉 꽝~’하고 설악산이 울린다. 저녁때가 되면 더욱 자주 대포 날아가는 소리를 들어서 어린 마음에 늘 불안하다.

밤이 되면 밖이 환해서 나와 보면 하늘에서 대낮처럼 불빛이 내려온다.
그건 낙하산이라 했다. 사람이 타고 내려 올 때도 있고 전쟁을 하려고 밝게 비친다고 했다. 청년들은 그 낙하산 천이 좋다고 주으려고 불꽃이 떨어지는 곳을 찾아가는 청년도 있었다.



◆ 쌀독에 흙을 섞어 땅에 묻어 놓고 피란을 나가는 집도 있었다.


인민군이 북으로 완전히 쫓겨 가고 국군이 들어왔다. 어린 나이던 그 시절 나는 이남 군인이 우리와 다르게 생긴 나쁜 사람인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국군이 우리 마을로 들어왔는데 총을 메고 양 어께에 총알을 주렁주렁 메 달았다.
전에는 모자를 쓴 인민군대만 보아서 그런지 철모를 쓴 군인은 무섭게 보였다. 마을에 와서 나가보니 그 군인들이 건빵을 주머니에서 꺼내 주었는데 그때 누나는 무섭다고 나오지도 않았지만 국군이 주던 건빵은 바삭 바삭 한 것이 아주 맛있었다.
건너말 경일이네는 피란 갈 때 뒤뜰에 쌀과 감자를 묻고 떠났는데 다른 집은 쌀을 비롯한 감자와 무를 모두 파내갔는데 경일이네 쌀은 무사하였다.
그 이유는 할머니가 쌀독에 쌀을 넣을 때 위에 흙을 섞어 놓고 뚜껑을 덮고 그 위에 흙과 짚을 덮었는데 인민군들이 봉양 꼬챙이로 산에 봉양을 찾아내듯이 집집마다 다니며 찔러 찾아냈지만 흙이 섞여 있는 쌀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피란에서 돌아온 경일이 엄마는 그 쌀을 쌀남박[이남박: 안쪽에 여러줄로 고랑이 지게 돌려 파서 만든 함지박으로 강원도 방언] 으로 쌀을 씻어 일 때에 돌과 흙을 골라내고 밥을 해 먹을 수 있어 동네 사람들은 경일이 할머니보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찬의 말이 입에 오르내렸다.

전쟁 통에 고성에서 피란 나온 권영달 이네가 동네 사랑방을 얻어서 살고 있었는데 그 집 아저씨는 어디 가서 예쁜 빈 깡통을 구해다가 가위로 잘라 그릇도 만들고 재떨이 등 여러 가지를 만들고 깡통을 펴서 이어 붙여 지붕을 덮어 알록달록한 양철집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깡통쟁이 집이란 택호를 지어 주었다.
그러나 그 집은 그 말이 듣기 싫어서 동네사람들에게‘고성집’이라고불러 달라고 음식도 해 먹였지만 깡통집이란 택호는 바뀌지 않았다.



◆ 미군 쓰레기장에 차가 오면 아이들이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야단이었다.


그 당시 그 집 권영달이 나이가 비슷하여 그 아이와 같이 아저씨를 따라 동네 아이들과 하도문에 가면 맛있는 게 있다고 가자고 했다. 무서워 혼자서는 못가고 여럿이 걸어서 하도문 제방 둑에 가니 군인 트럭이 무엇을 내려놓고 간다.
가까이 가보니 여태껏 못 보던 사람들이 보였다. 하얀색 얼굴을 한사람, 노란색 머리카락, 얼굴이 까만색 사람. 눈알도 파란사람도 있고 그런데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다.
키는 엄청 컸고 코도 주먹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코재비 또는 코쟁이라 불렀다. 얼굴뿐만 아니고 손도 까만 군인을 깜둥이라 불렀다. 그런데 깜둥이가 더 무서웠다. 그리고 얼굴이 흰색 군인은 우리에게 과자를 던져주었다.
그 과자는 동그란 모양인데 바늘구멍 같은 것이 있는데 아주 맛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우리를 잡아 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과자를 더 얻으려고 무서웠지만 가까이 가보니 노란색 감 같은 것을 하나 주었는데 그들이 그것을 미깡(귤) 이라고 불렀는데 여태 보지도 먹어본 적도 없는 과일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다른 과자를 얻은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다른 동네 아이들도 있어 나는 형들 따라 다녔다. 다른 친구는 바둑알 같은 과자를 얻었는데 그건 삼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씹는 것이라 했다. 친구가 나보고 씹어보라고 해서 입에 넣으니 찐덕찐덕 한 것이 이상했지만 달달한 맛이 났는데 그것을 끔(껌)이라 했다.
그곳은 미군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쓰레기장이다. 미군 차가 간 후 버린 곳에 가보니 냄새도 나고 파리들도 많았고 별 란 물건들이 많았다. 예쁜 색깔의 깡통과 병들이 많았고 깡통에는 먹다 남은 소고기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나는 예쁜 색깔의 깡통을 몇 개 주어서 왔다. 집에 오니 어머니가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어서 그 이야기를 하니 다시는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또 가고 싶어 어머니 몰래 형들 따라 그 쓰레기장에 가곤했다. 미군 차가 오면 아이들이 달려가서 먼저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야단이고 나는 숫기가 없어서 뒤에서 좋은 것들은 남들이 다 주워가고 나머지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미군을 보고‘헬로! 헬로!’하면서 손을 흔들면 과자를 던져 주는 데 쪼꼬레트(초콜릿)라고 하는데 너무 맛있었다. 그거 하나만 얻으면 너무 기분이 좋았다. 쪼꼬레트를 얻은 아이보고 조금 띠어 달라고 하면 아주 조금 띠어서 주면 넘기지 않고 입에 오래 넣고 있다가 저절로 넘어갔다.
가끔 끔을 얻어서 씹었는데 몇 개씩 얻어서 씹다가 친구들에게 나누어 씹기도 하고 잠잘 때는 방 기둥에 붙여놓았다가 아침이면 떼어서 또 씹고 며칠씩 씹었다. 껌을 구하지 못할 때는 밀밭에 가서 밀알을 따서 오래 씹으면 껌처럼 되어 그것도 껌이라고 씹었다.
산에 미군이 주둔하다 떠난 자리는 여러 가지를 땅에 묻고 간다. 그러면 아이들이 빨리 달려가서 구덩이를 파면 맛있는 과자며 고기, 깡통들이 나온다. 어떤 때는 따지 많은 깡통도 얻는다.
비닐에 들어있는 설탕도 나오고 껌도 있고 소금, 갈색 가루도 나오는데 맛이 쓰다. 어른들도 이 갈색 가루가 무엇에 쓰는지 몰랐다.‘미군 놈들은 이상한 것도 먹는다.’했는데 나중에 커피인 것을 알았다.



◆ 대포학교는 군인들이 사용하고 우리들은 맨바닥에서 공부를 했다.


고성 쪽 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고 하였다. 대포학교는 군인들이 학교를 사용하여 학생들은 바닷가 조금 넓은 맨바닥 방에서 공부를 하였다.
교과서가 없이 선생님이 칠판에 글씨를 써 놓으면 공책에 베끼어 쓰고, 공책은 백노지 라고 하는 큰 종이를 잘라서 누나가 바늘로 매 주었고, 연필은 잘 안 써져서 침을 묻히면 진하게 나오고 잘 못써서 지우려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 문지르면 종이가 찢어졌다.
필통에 연필을 넣어가지고 다녔는데 책보에 싸서 허리에 차고 다녀서 뛰어가면‘달그락 달그락’하고 소리가 났다. 연필을 깎아보면 연필이 골아서 심이 부러져 있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이니 몇 년을 다녀도 글자를 모르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래도 학교가 좋아 밥만 먹으면 더운 날 추운 날 바람이부는 날도 학교에 안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알고 십리가 넘고, 나무내 고개를 두 개 넘어야 하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비 오는 날은 마대를 접어 고깔을 만들어 쓰고 비에 젖은 고무신은 미끈거려서 들고 다녔고 하천에 흙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 할 때 업어 건너 주시던 아저씨는 구세주 같았다. 그래도 6년 개근상을 받았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 크레용은 본적이 6학년에 가서야 6개짜리 크레용을 처음 받아서 그것도 다 쓰지 못하고 졸업하여 그림 못 그리는 핑계를 댄다.
군인들이 전방으로 떠난 후 우리는 학교로 올라와 교실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넓은 운동장도 있어 너무 좋았다.
그때도 학교에 점심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교실에서 밥을 먹는 학생은 없고 물 한바가지만 마시고 운동장에서 공차기를 하고, 여자들이 하는 고무줄놀이는 두 아이가 고무줄을 마주 잡고 발목에서 차츰 단을 올라가며 노래에 맞추어 고무줄을 넘는다. 고무줄넘기는 노래에 맞추어 춤추는 것처럼 신나게 놀았다.
공은 주먹한 정구공이었고 맨발로 차다보니 잘 못하여 땅을 차게 되어 발가락에서 피나나기 일수여서 피나는 발가락에 마른 흙가루를 뿌리면 피가 멎었고, 오금팍(무릎)에 상처가 나고 피가 나기도 하여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픈 것도 잊고 신이 나게 놀면서 배고픔을 잊고 점심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쯤은 점심때 우유를 배식했다. 학교 아저씨는 가마솥에 우유를 끓이고 학생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다 컵도 없이 선생님이 퍼주시는 한 바가지씩 마시게 했다. 그때는 그 맛이 메슥거려 이상해서 안마시려 해도 선생님이 지키고 꼭 마시게 했다.
큰 드럼통에 우유가루가 나오면 봉지에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러면 집에 가지고 가서 밥할 때 솥에 넣어 두면 딱딱한 게 과자처럼 되는데 가지고 다니며 먹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던 동네 3,4학년 형들이 진달래꽃을 따먹으러 산에 올라갔다가 이상하게 생긴 것을 주어왔다. 그것은 불발한 박격 포탄이었다. 그 형들은 길에 내려와 방망이 같은 포탄을 돌로 두드리다 터지면서 세 명이 논바닥으로 날아가 배가 갈라져 죽고 다른 형은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어떤 형들이 폭탄이 터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어른들이 내려갔고 아이들도 구경을 갔다. 나는 무서워 가지 못했고 학교 갈 때 그 곳을 지날 때면 소름이 끼쳤다. 그 후 부터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절대로 산에 가지 말고 길로만 똑바로 오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 하였다.



◆ 가슴이 뭉클하게 느껴지는 어머님에 대한 추억


북한 공산치하에 있을 당시에는 과도한 현물세를 내기도 힘겨웠고, 전쟁 중에는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처지여서 누나들은 놀지도 못하고 둥지리(바구니)를 들고 들에 나가서 쑥이나 베짱우(질경이)등 나물을 캐는 일이 일과였고, 둥지리를 채우지 못하면 어머니께 꾸중을 듣기도 했는데, 다른 집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예전부터 동네 형들과 자주 먹어 본적이 있는 송기를 먹으러 가끔 동생과 산에 올라갔다. 송기는 물이 오른 소나무 새순을 비틀어 속가지를 쏙 빼낸 다음 먼저 속가지에 단맛이 나는 엷은 막을 쪽 빨아먹고 난 후소나무 껍질에 붙어있는 솔잎과 겉껍질 뜯어내고 하얀 송기줄기를 먹고 배고픔을 달래기도 했다.
또 봄이면 산으로 가 진달래꽃을 따먹으면 입이 새파래져 서로 처다 보며 웃어댄다. 그때 어른들은 꽃이 핀 곳에는 문등이가 숨어있어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문둥병이 낫기 때문에 아이들을 잡아간다고 하며 못 가게 했다.
하지만 진달래가 피어있는 산은 놀이터이기 전에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장소였고,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냇가 언저리에서 주로 나는 찔레의 연한 새순은 어린아이들에게 또 다른 먹 거리 이기도 하였다.
식사 때만 되면 나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밥은 시커멓고 나물밥이 아니면 죽이 다반사니 성에 차지 않고 반찬이라야 된장국에 김치가 전부였다. 밥상은 아버지만 차려드리고 우리는 방바닥에 구박이라는 큰 그릇에 퍼서 방에 들여오면 우리는 숟가락만 가지고 달려들어 먹으니 젓가락 필요 없었다.
그때는 우리는 뒤에 누가 있는지 생각도 없던 철없는 시절이었고 어머니는 밥을 먼저 들여보내고 나중에 들오셔서 우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둘러앉아 밥을 퍼 먹는 모습을 바라만보고 계신 줄은 세월이 퍽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때는 조그만 뱃속에 왜 그리 밥을 많이 들어가는지 큰 밥그릇에 고봉으로 담아도 많게 보이지 않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배는 같았을 것인데 왜 그렇게 많이 먹었는지 모를 일이었으며, 먼저 육남매의 배를 채우느라 늘 배를 곯고 살았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가슴 뭉클하게 느껴진다.
또한 나의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5월이 들어 제삿날이 돌아올 때가되면 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려운 살림에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을 때이지만 그 날만큼은 이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오기 때문이다.
제사는 꼭 밤중에 지내니까 나는 잠을 쫒으려고 눈을 비비고 찬물에 세수를 하고나서 잠시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날이 환하게 새었고 제사가 다지나가자 나는 너무 억울하고 서운해서 울기 시작했다.

나를 왜 안 깨웠냐고 어머니에게 생떼를 쓰면서 불평을 늘어놓았고, 어머니는 나에게 밥을 같이 먹자고 하였지만 나는 그때 화풀이를 한답시고 홱 돌아앉으며 밥을 먹지 않고 울다 돌아보니 모두 일하러 가시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우는 것도 지쳐서 슬그머니 울음을 그치고 부엌에 가서 부뚜막에 올라가 무쇠 솥을 열어보니 이밥을 넣어두고 나가셨다. 당시 나는 철모르는 어린 아이였지만 그래도 그때만큼은 양심이 있었는지 어머니에게는 정말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