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상월천리 전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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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07회 작성일 2018-03-05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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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찬오 (남, 84세, 현남면 상월천리)
■ 면담일 : 2017.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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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인민군이 웃으며“피란가지 마시오. 잘사는 세상이 올 겁니다.”


일정 때는 짚신을 신고 인구까지 6km를 걸어서 인구국민학교에 다녔다. 당시 잔교리와 대치리에 파출소가 있었고 336고지에는 국군이 경계를 서고 있고 주문진에 있는 서북청년단은 상월천리 뒷동산을 지켰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상월천 뒷산인 망월산(현북에서는 망령재로 부름) 산등을 넘어 새까맣게 밀고 나왔다. 총과 옷차림새 그리고 말씨를 들어보니 동무라고 하는 소리를 들어서 인민군인줄 알았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피신하였고 경찰도 미처 피란을 못 갔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개중에 사람들은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아저씨, 왜 피란을 가시오?”하니 한 인민군이 웃으며“피란가지 마시오. 잘사는 세상이 올 겁니다.”
그러나 전쟁이 난 걸 빨리 안 사람들은 멀리 인민군을 앞질러 갔는데 그 뒤에 늦게 알고 피란을 떠난 사람은 인민군의 뒤를 따라가는 형편이니 가다가 돌아왔다. 그날 우리 마을 김주욱씨는 논에서 늦모내기를 하다가 늦게 알고 나가려니 인민군이 이미 나간 것을 알고 피란을 나가보지도 못했다.



◆ 그 사람들의 말이 곧 법이니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피란을 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동네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는데 얼마 후 북한 청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내려와서 17세 이상은 의용군을 뽑아 간다고 했다.
그들은 어렵게 살던 동네 세 사람을 어떻게 포섭하였는지 책임을 맡아서 강제로 의용군에 보내려고 사람들을 찾아 설치고 다녔다.
그때 젊은 사람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굴을 파고 숨어 살았다. 그들은 은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악랄하게 찾아다니자 배기다 못한 청년 16명이 끌려갔으니 가는 도중에 3명은
도망을 쳤다가 나중에 돌아왔고 나머지 13명은 아직도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
당시 우리 할아버지는 닥나무로 한지를 뜨는 분인데 세포위원장보고 “너 이놈아, 왜 이 동네 청년들을 의용군에 보내느냐?”하고 호통을 처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아침마다 동사에 모이라하여 김일성 노래를 가르쳤다. 그리고 대나무로 죽창을 길게 만들어 국군을 만나면 죽여야 한다고 까지 했다.
그들이 나오라고 할 때 만약 나가지 않으면 반동분자라 하여 재산을 몰수한다고 하고 사람을 찾아내라고 졸라대고 협박하였다. 그때는 그 사람들이 시키는 게 법이니까 사람들은 겁을 먹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김일성 노래를 가르쳤던 사람은 그 후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갔었는데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 때 나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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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담중인 전찬오씨



◆ 만삭이 된 인민군 여군은 어성전에 가서 애를 순산 했다고 한다.


약 3개월만인 10월쯤 인민군들이 국군에 쫓겨 가면서 1개 대대가 서림지서를 습격하여 근무하던 경찰을 끌고 가서 때려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을에서 소도 끌고 가서 잡아먹었다고 했다.
그때 인민군 중에는 배가 만삭이 된 몸으로 카빈총을 맨 여군도 있었는데 그 여군은 어성전에 가서 애를 순산 했다고 한다.
수복도 잠시 겨울이 되자 1 ․ 4후퇴가 시작되어 마을에 소개 명령이 내렸다. 앞서 6 ․ 25때 1차 피란을 못나가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들에게 곤혹을 치렀던 일들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이번에는 동네사람 모두가 서둘러피란을 나갔다.
그때 우리 식구는 할머니와 부모 그리고 큰어머니와 8남매와 함께 12명인 대 가족이 새끼소가 딸린 어미 소까지 끌고 강릉 안인 노간리의 아는 집으로 갔는데 동짓달이라 눈이 많이 내려 날씨는 몹시 추웠다.
큰길은 비행기가 심하게 폭격을 했고 주민들은 모두들 피란을 나가고 비어있는 집들이 많아 그 빈집들에서 잠을 자며 나갔다. 어느 날 나는 나보다 두 살이 위인 작은댁 아저씨와 밖으로 나가 피란민들 중에 우리 마을사람들이 있는지 살피러 나왔다가 시커먼 비행기에 공격을 받고 주변에 있는 조그만 집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갑자기 쾅 하는 폭음이 들리더니 집 벽이 무너져 내려 큰 사고를 당할 번했었다.



◆ 폭격으로 죽어있는 엄마 등에서 애가 울고 있었다.


눈은 쌓이고 매서운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더 남쪽으로 피란을 나가는데 또 비행기가 폭격을 하니 여기 저기 길 바닥에 있는 시체가 눈에 덮여있었다.

그 시체 중에는 폭격으로 죽어있는 엄마 등에서 애가 울고 있었는데 잠시 후 굴다리에서 그 아빠는 뒤에서 애기가 울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지 뒤돌아가 애기를 보더니 애기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고 가는 매정한 애비를 보았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 아비가 설사 애기를 안고 가더라도 누구에게 젖을 물려야 될 것이며 또 이 매서운 엄동설한에 애를 키울 자신이 없어 냉정한 판단을 한 것에 대해 조금 동정이 갔으나 인륜을 저버린 천인공노할 짓에 대해 안타깝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피란길에 눈이 깔려 유혈이 낭자한 시체의 모습이 잘 보이니 가슴이 더욱 아팠다. 정동진에서 밤재로 못 간다고 하여 산길로 해서 옥계로 가서 자고 묵호 용정리 골짜기에 무슨 회사의 사택이 있어 거기서 피란을 했다.



◆ 옥수수 광밥 터트리고 남은 노란 껍질에 붙어있는 살로 죽을 쑤어먹었다.


그러나 피란을 나가면서 지고나갔던 식량이 떨어지자 바다에 나가서 철사로 갈고리를 만들어 파도에 굴러 나오는 싱퉁이(도치)를 갈고리로 찍어 끌어내서 잡았다. 그때 어떤 아저씨가 병에 무었을 넣었는지 그 병속에 든 것을 바다에 뿌리니 싱퉁이가 모여들어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작은댁 아저씨와 LST가 정박하고 있는 묵호 항구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는데 군인이 오라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따라가니 LST에서 부둣가로 하역해놓은 폭탄 상자를 나르고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하던 중에 내 손가락이 상자 사이에 끼어 피가 많이 나서 일을 더 할 수가 없게 되자 국군은 반창고를 붙여주고 우리에게 쌀을 한말을 주면서 돌아가라고 하여 아저씨와 고맙게 받은 쌀을 반씩 나누어가지고 왔다.
그리고 피란 중 어느 농촌 지역을 가니 썩은 감자를 버린 것을 발견하고 푸대에 담아 가져와서고 썩은 감자를 말려 빻아 가루로 만들어 떡을 만드니 새까만 감자떡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었고, 옥수수 광밥 터트리고 남은 노란 껍질에 조금 살이 붙어 있는 것을 몇 자루 얻어다 광밥 껍질과 살을 분리하여 쌀과 섞어 죽을 쑤어 먹으면 그것도 맛있게 먹었다.



◆ 12명 식구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끌고 갔던 소를 쌀 5말을 받고 팔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소를 묵호까지 끌고 갔다. 그러나 엄동설한에 소먹이가 없으니 방앗간 짚을 뜯어 소에게 먹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인들이 소를 빼앗아 가려고 해서 산골짜기에 소를 끌고 가 숨겨 키웠다.
나중에 수복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려면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어도 소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남과 달리 우리는 대식구라 식량도 쉽게 떨어지고 얻어먹는 것도 한계에 다다르자 할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주문진에서 농사짓는 집에 쌀 5말과 새끼 딸린 소를 바꾸었다. 그 쌀로 그간에 굶주렸던 한이라도 풀려고 쌀밥을 많이 해서 실컷 먹었다.
다음해 봄에 고향에 돌아오니 마을에 집은 한 채도 없었다. 집을 지으려고 나무를 베어다 짚이 없으니 소나무 잎을 씌워 하늘을 가리고 벽은 통나무로 쌓아 토막집을 지어 비가 오면 토막집 안으로 굵은 비가 들어오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농사를 지으면서 새 터전을 마련하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