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북분리 이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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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84회 작성일 2018-03-05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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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연주 (여, 79세, 현남면 북분리)
■ 면담일 : 2017.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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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집 언니는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하고 애기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강현면 강선리에 살았는데 5살 때부터 강선리 서당에 다니면서 한글도 배우고 일본글도 배웠다.
당시 원산에 외할머니가 계셨는데 셋째 동생을 외갓집에 데려다 주었고, 어머니는 가끔 기차를 타고 원산에 다니셨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나오셔서“곧 전쟁이 난단다.! 애가 보고 싶을 테니 데리고 왔다” 하시고는 저녁 마지막기차로 가셨는데 이튿날 바로 전쟁이 났다.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학교 전 반으로 미숫가루를 만들어 밭치라는 명령이 나왔다. 그러나 미숫가루 만들자면 쌀이 귀해 논에 피를 훑어다 빻아서 만들었는데 그것도 양이 모자라면 반장에게 꾸중을 들었다. 그때 우리는 먹을 건 없고 쑥을 뜯어다 곡식에 섞어 풀을 쑤어먹는 날이 태반이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어느 날 인민군대 둘이 우리 집에 왔다. 그들은 우리보고 양말을 달라고하자 어머니가 양말이 없다고 하니 이불을 달라고 하더니 이불을 찢어서 발에 감고 갔다.
전쟁 통에 아랫집 김 씨네 언니가 애기를 낳았는데 언니는 죽고 애기는 할머니가 키우게 되었는데, 얼마 전 애 엄마였던 그 언니는 비행기 공습을 피하려고 아이를 안고 방공호로 대피하려다가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하고 안고 있던 애기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할머니가 애기를 키우게 되었던 것이다.



◆“쌀은 농사지으면 되지만 족보는 한번 타면 아주 없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비행기가 또 폭격을 하자 할머니가 그 아이를 업고 정신없이 방공호로 피신을 하려고 뛰어가다가 애기가 그만 빠져서 땅에 떨어졌는데 그때 할머니는 애기가 빠진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기만 방공호로 뛰어 들어가게 되었고, 할머니는 방공호에 들어간 다음에 애기가 빠져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때 할머니는 방공호에 대피해있던 동네사람들에게 애를 놓고 왔다고하며 욕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나중에 할머니가 오던 길로 허겁지겁 달려가니 다행히 애기는 울고 있었다. 그러던 지금은 손녀가 잘 커서 할머니에게 효도를 한다고 했다.
6 ․ 25전쟁이 나고 국군이 들어오면서 인민군이 북으로 쫓겨 들어간 후 12월 중순쯤에 강선리에 국군 야전병원에 군인 차에 열십자를 그린 국군병원차가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강선리 고란골짜기 옆 밭으로 싣고 가서 화장을 하였는데 12살 어린나이에 멋모르고 구경을 했었다.
좋던 세상도 잠시 인민군들이 다시 처내려와 후퇴가 시작되어 겨울에 피란을 떠나려는데 아버지가 땅을 파고는 족보를 묻고 있어 내가 왜 쌀은 안 묻고 족보를 묻어요. 하니“쌀은 농사지으면 되지만 족보는 한번 타면 아주 없어진다.”고 하셨다. 지금도 그때 그 족보는 친정에 보관되어 있다.



◆ 피란민들이 좁은 교실 문을 서로 빠져나오려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리는 큰집과 작은집이 합께 집을 떠나 낙산 조산에 갔는데 국군들이 지키며 학교로 들어가라고 한다. 그러나 교실마다 피란민이 꽉 차서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지만 복도를 지나 끝 교실에 삐 집고 들어가 막 자리를 잡는데 빠지직 빠지직 하며 불이 붙는 소리가 나며 교실에 불이 붙자 피란민들이 보따리도 미처 못가지고 사람만 겨우 빠져나와 살아났다.
그때 수많은 피란민들이 좁은 교실 문을 서로 빠져나오려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동생을 업고 나오다가 가족을 잃어버려서 우왕좌왕하는 피란민 속에서 가족을 부르는 소리는 밤하늘에 퍼져나갔다. 나도 그때 “아버지! 아버지!”하고 소리쳐 불러도 찾지 못하여 어딘지도 모르고 사람들을 따라 걸어가니 바다가 나왔다.
거기서도 아버지가 없는 것 같아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오니 그때 아버지도 “연주야, 연주야!”하고 소리치며 불러서 가족을 비롯해서 큰집과 작은집 식구를 모두 만났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를 만난장소가 조산리 솔밭 옆 신작로로 기억된다.
당시 조산학교 건물 속에 수많은 피란민들이 그 교실 안에서 피란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들은 아무리 작전상 불가피하게 학교를 태워야한다 할지라도 피란민들을 대피하라는 등의 어떤 조치를 취하고 불을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내가 그때를 돌이켜 회상해보면 불이 나고 피란민들이 좁은 교실 문을 미쳐 못빠져나와 사상자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 얼음 짱 같은 남대천 물에 아이들을 몇 번씩이나 업어 건너야 했었다.


후에 3가족이 만나 피란 짐을 확인하는데 그때 우리식구들은 교실 끝부분에 있어서 비교적 다른 피란민보다 먼저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도 큰집오빠는 원산에서 사 입은 비싼 옷가지가 들어있었던 트렁크(가방)를 미쳐 못 가지고나왔다고 했으니 교실 안 깊숙이 들어가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은 최악에 상황을 맞았을 것이다.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던 큰집과 작은집 식구들이 모두 만나 얼음 짱 같은 남대천 물을 빠져 건너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을 몇 번씩이나 업어 건너야 했다. 가족들은 가까운 오산리에 가서 어떤 집의 소 사료창고 같은 깍지가리에서 그날 밤을 보낸 후 약 보름동안 오산리에서 피란을 생활을 하다가 들어왔다.
강선리의 살던 집에 들어오니 다행히 우리 집과 또 다른 2집이 불에 타지 않아 남보다 헐 씬 고생을 덜했지만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아버지가 쑥둥주리를 주며 쑥을 캐 오라 하셨다.
그 당시 피란을 갔다 온 모든 사람들이 쑥을 뜯으러 나서니 들에 쑥이 없어 한 둥주리를 채우지 못하면 집에서“니는 쑥도 제대로 못 캐니 굶어야 한다.”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래서 20살도 안 돼 북분리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