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북분리 전경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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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91회 작성일 2018-03-0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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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찬 (남, 84세, 현남면 북분리)
■ 면담일 : 201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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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들! 잘 살게 해 줄 테니 집으로 들어가시오.”


아버지가 14살 때 사망하시어 가정형편으로 잔교리 현북 중앙학원을 4학년까지만 다니고 농사일을 해야 했다.
1950년 당시에는 38°선 부근에서는 가끔 총소리가 났다. 6 ․ 25전쟁이 나는 당일도 총소리가 나서 또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점점 총소리가 잦고 국군이 남으로 후퇴해 나갔다.
동네 사람들은 평소와 다르게 38°선을 지키던 국군이 다급하게 남으로 퇴각을 하는 것을 보고 뭔가 큰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모두 보따리를 싸가지고 피란을 떠났다.
우리 식구는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 2명 그리고 형님내외와 조카와 함께 8식구가 피란을 떠났다. 피란을 나가는 도중 비도 많이 오고 큰 길인 철둑길로 나가다가 혹시 북한 인민군을 만나면 잘못 될 것 같아 바닷가로 떨어져 남쪽으로 숨어서 나가다가 사천 친척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강릉으로 해서 삼척으로 바로 나갈려는데 무슨 일인지 국군이 막아서 정선 쪽으로 가라고해 삽당령으로 갔다. 먼저 떠난 사람은 삼척으로 이미 나갔고 늦은 피란민은 막혀서 삽당령으로 간 것이다. 임계까지 가서 1박하고 예당이라는 어느 학교에서 1박을 하였다.
피란민들은 다시 정선으로 들어가려는데 벌써 인민군이 앞을 막았다.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었다. 국방군에게 내 밀려서 나왔다고 하니“동무들! 잘 살게 해 줄 테니 집으로 들어가시오.”하여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 연극은 공화국 선전 내용이고 인민군에 가면 가족들이 대우받는다고 했다.


집으로 들어와서 논에 물이 없어서 모를 못 심었던 논에 모내기를 해놓고 보리를 베고 농사일을 했다. 그런데 젊은 학생들에게 소년단에 가입하라고 강요했다. 그래서 안 들어갈 수가 없었고, 18세 이상은 민청에 가입하라고 하였다.
그때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동네책임자로 ○○○씨를 시켰다. 당시 그는 일정 때 학교를 나온 사람이지만 재산이 없는 사람이었고, 면 위원장은 포매리 사람들이 맡았다. 그리고 1달이 지나자 의용군을 뽑는다고 했다.
1차 대상은 이북에서 나온 책임자들이 번들번들하게 일도 안하는 사람을 지원자라고 하여 뽑았고, 그리고 2차는 반장이나 또는 무슨 일을 책임지고 일을 해야 하는 책임자를 강제로 지원하는 것처럼 하고 언제든지 가야만하니 먼저 가서 때우고 오라고했다.
그래도 지원을 잘 안 하니 오늘저녁에 연극과 오락회를 하니 모이라고 했고, 안 나가면 뒷조사를 하여 끌어다 참석시켰다. 연극은 공화국 선전 내용이고 인민군에 가면 가족들이 대우받고 안가면 해가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나중에 지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자 현남면 죽리로 모두 모이라고 하고 안가는 사람은 달래다가 다음엔 완력을 행사하여 참석시켰다. 죽리에 가니 마을별로 만들고 의용군 갈 사람을 지원하라고 한다. 강제로 뽑는 판인데 신상명세서를 작성하여 넘기고 나니 인구 인민학교에 모두 모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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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담중인 전경찬씨



◆ 만약 도망가면 가족을 몰살 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렇게 의용군에 징집된 청년들을 교실에 빽빽하게 모여 놓고 40명 단위로 소대를 정하는데 나는 4소대에 편성되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인민군 책임자가 남쪽으로 인솔하여 가면서 만약 도망가면 가족을 몰살 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의용군 행렬이 남애리 고개를 넘어가는데 쌕쌔기 4대가 와서 한 바퀴 돌더니 공습을 한다.
그때 1.2소대는 이미 고개를 다 넘었고 3.4소대가 뒤따라 넘어가는 도중에 비행기가 기관총 사격을 하니 숨을 곳이 없어 신작로 옆 가시나무 숲속으로 들어가다가 축대를 쌓은 낭떠러지에 떨어지면서 넓적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그때 총을 맞거나 다친 사람은 12명이었다.
나는 낙오자가 되어 다친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른 의용군에 부축을 받으며 다음 집결지인 경포대로 향하다가 주문진에 들어서 솔밭 옆길로 가는데 또 비행기가 돌아치면서 공습을 하자 나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재빨리 담을 잡고 뛰어넘어 구렁이처럼 구석진 곳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비행기 공습이 끝난 후 해안 길로 나가니 인민군들이 바닷가 옆에 있는 산에다 포를 걸어놓고 포사격을 하고 있었고 강릉 경포까지 가는 동안 인민군들을 마주치니 도망을 간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했다. 그때 마침 인솔자가 조금만나가면 너희들은 빼줄 터이니 강릉 경포초등학교 까지 가자고 하였다.



◆ 심사관 처녀들이 남자들에게 넓적다리를 보이며 인민군에 입대를 유혹한다.


의용군들은 그 학교에서 1주일을 묵으면서 교육을 받았는데 몇 백 명이 모였다. 인민군들은 소도 훔쳐오고 명태도 훔쳐다 잘 먹였다. 나는 밤에 자지 않고 접질린 다리를 핑계 삼아 엄살을 부리니 누군가가 밖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일이면 다시 군대 심사를 보는데 저녁으로는 노래와 특기자랑 그리고 북한에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며 선전하는데 나는 아프다고 안 나갔다. 나와 같이 의용군에 잡혀온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내일은 인민군으로 간다고 수군수군 했다.
경포로 오기 전 댓골(죽리)에서 작성한 신상명세서를 가지고 심사를 받는데 심사하는 사람들은 남자가 아니고 처녀들이 나와 심사를 하였다. 그때 처녀 5명과 심사를 받는 의용군들과 마주 앉았는데 처녀들이 넓적다리가 다 보이고 삼각팬티도 보이게 하여 남자들에 마음을 움직여 인민군에 입대시키려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번에 입대하면 우리들이 가서 가족들을 다 잘 해준다고 하면서 입대하라고 하며 싫다는 말을 하기 곤란하게 만들었다. 심사를 받는 사람들은 16세부터 60세가 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다친 다리를 아주 못쓰겠다고 심사하는 사람에게 말을 하자 “동무는 나이도 어리고 다리도 아프니 다음에 오도록 하라.”고 했다. 그때 심사를 받던 사람들은 몇 백 명 중에 11명이 불합격을 맞았다.



◆ 국군들이 탄 자동차가 사람숫자만큼 들어오니 모두 나와 구경을 하였다.


나는 인민군에 입대를 못하고 동네에 돌아와서도 민청에서 나오라고 해도 나는 다리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안 나가고 방에만 있었다.
어느 날 국군이 들어온다고 수근 거렸다. 그 무렵 북에서 내려온 동네 책임자들은 벌써 북으로 들어가고 남은 사람은 노인과 아이들만 남았다.
국군 수색대가 먼저 들어오다가 인민군 이 쏜 기관총에 맞아 1명이 사망하여 지역인부들이 매고 북분리 주막거리에 나왔다. 그때 국군 수색대 1개 소대가 먼저 들어오자 주민들이 나와서 만세를 불렀다.
북분리에서 다리만 넘으면 38°선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당시 인민군들은 고산봉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지키고 있었다.
나중에 국군 대부대가 들어오니 국군 수색대는 앞서 북진했다. 그때 북분리 사람들은 자동차를 잘 못 보았는데 국군들이 탄 자동차가 사람숫자 만큼 들어오니 모두 나와 구경을 하였다.
1 ․ 4후퇴 후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해갈 무렵이다. 하루는 국군이 들어오면서 나를 짐꾼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는 북으로 도망을 가지 못한 인민군들은 북분리 뒷산에 진을 치고 숨어 있다가 주로 밤이 되면 총질을 하며행패를 부릴 때였다.
그러다가 낮이 되면 국군 수색대가 북분리 마을에 들어와 인민군과 교전을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를 찾아 나섰다가 하필이면 그 시간에 국군과 인민군이 교전을 하는 바람에 마을사람들 2명과 함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나중에 소식을 듣고 누나와 동생이 찾아 나서니 인구 시변리 비석거리 근방에 시신을 거적때기로 씌워놓았다. 그때 피란을 나가지 않았던 남은 사람들이 고맙게 도와주어 장례를 지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