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임호정리 임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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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60회 작성일 2018-03-0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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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명식 (남, 78세, 현남면 임호정리)
전 현남농업협동조합장
■ 면담일 : 201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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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없는 나는 책 보따리를 등에 매고 황소를 끌고 피란을 나갔다.


6 ․ 25전쟁 때 인민군들이 처 나오고 피란민들이 나온다고 하여 그때는 어린나이라 멋모르고 남애리까지 뛰어가서 구경하였다. 피란민 속에는 국군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그날은 흐린 날씨였지만 6 ․ 25가 나기 전 논에 물이 차지 않아 모를 못 심고 있다가 6 ․ 25당일 논에 물이 차자 주민들이 늦모내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사람들은 짐을 이고 지고 나오는 걸 보고 집에 오니 아버지가 피란가야 한다고 했다. 집 어른들은 증조할머니를 보고 집 지키라고 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먹을 것을 지고 어머니는 이불을 머리에 이고 철이 없던 그 시절 나는 책 보따리를 등에 매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큰 황소를 나보고 끌고 가라고하셨다.
우리 집 식구들은 먼저 강릉 주문진 장덕리로 시집간 고모네 집으로 가려고 하치랑골 위를 경유해서 바리봉을 넘고 향골을 지나 향호리 문방재를 넘어 장덕리 고모네 집에 가서 1박을 하고 또 10여리를 가서 으슥한오리골로 들어가서 산위에서 내려다보니 멀리 7번 국도에 말을 타고 가는 인민군도 보이고 마차를 짐을 싣고 가는 인민군도 보였다. 그 산속에서 4일을 머무르고 있는 동안 국군은 남쪽으로 다 후퇴해 가고 주위에 인민군들만 눈에 보이니 할 수없이 집으로 돌아오니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



◆ 어린학생들도 밤마다 잠도 못자고 모기에 물리며 학교를 지켰다.


이제부터는 북한정치가 시작 되었다.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에 의하여 7월 초 소년단을 조직했는데 그 전에도 마을에 공산주의자가 있었던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잘 배우지 못한 이에게 자위대 대장을 시켜 훈련을 했다.

밤에는 목총을 만들어 원포리와 임호정리 애들이 전쟁놀이를 했다. 학교에서는 당번을 정하여 학교를 지키라고 하여 밤마다 학교에 가서 지키는데 모기 때의 극성으로 가려워 고생을 많이 했다.
당시 임호정리, 하월천리, 상월천리, 인구 학생들이 약 300~400여명이 임호정리국민학교에 모여 공부를 했고 선생님은 6 ․ 25전 북에서 월남한 분이 가르치다 그분은 피란을 가고, 머리 좋기로 소문난 ○○○ 선생님은 하월천에 살았는데 고학년만 가르쳤다. 그 선생님은 3개월 동안 열심히 가르쳤지만 국군이 들어와서 공산주의자라고 화를 당하였다.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놓으면 공출을 한다고 쌀과 좁쌀 수확량을 조사한다. 이삭을 뽑아다 세어보고 벼도 낱알을 세는 것을 보았다.
우리들은 밤마다 모이라고 해서 가면 학습을 한다. 노래도 배우고 “대한민국 때려 부수자! 김일성은 위대한 지도자다!”등 지금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른들은 밤에 동네 앞 바리봉에 교통호를파는 일에 동원되었다.



◆ 아버지는 의용군에 잡혀갔다가 거제도에서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인민군이 도망가고 얼마를 지났는데 국군이 온다고 소문이 돌았다. 나는 약 1.5km를 뛰어서 나무다리까지 갔다. 그런데 여태 보지 못하던 자동차에 국군들이타고 도로를 매우고 줄을 지어 들어오고 있다. 나는 만세를 불렀고 다른 사람들도 만세를 부르고 야단이 났다.
당시 아버지는 36세였는데 추석전날 동내 여러 사람들과 의용군에 잡혀 안변까지 갔는데 비행기 폭격으로 굴속에 숨어 있다가 국군에게 잡혀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3년간 수용되었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할 때 돌아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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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담중인 임명식씨



◆ 눈(雪)물이 배어 든 쌀도 감지덕지하며 밥을 지어 먹었다.


1 ․ 4후퇴가 시작되는 겨울에는 증조할머니가 연로하셔서 피란을 갈 수가 없었다. 당시 국군이 집을 태우고 나가는데 기와집은 금방 불이 붙자 할아버지가 깍지가리 밑에 굴을 파서 짚 가마니를 넣어 쌀을 묻어 놓았다.

그러나 집이 타자 벼를 묻어 놓은 것들이 위에 것은 타고 그나마 아래에 있던 것들은 눈이 녹아 물이 배어서 뜬 쌀이 되었지만 그것도 감지덕지하며 밥을 지어먹었다.
그때 중광정리 집안사람들도 나와서 같이 지냈다. 할아버지가 얼럭(조그만 소나무석가래)으로 바람을 막아 하늘 위는 별이 보이고 밥은 짚가리에서 먹으며 지내다가 다행히 불에 타지 않았던 장영수씨 집과 조씨 아저씨 집이 남아있었는데 그 집 주인들은 피란을 가서 그 집에서 겨울을 날수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는데 남과 북은 화상천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이 화상천 개울을 따라 달래마을까지 화상천 북쪽 둔덕에 호를 파고 경계를 하였고 국군도 그 남쪽에 진을 치고 임호정리 제방에 총을 쏘며 대치를 하였다. 그러다 국군의 세가 증강되고 전 전선에서 북한 인민군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북으로 퇴각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인민군들은 우리에게 큰 피해는 주지 않고 도망가고 3월이 되어 국군이 북진하여 왔다.



◆ 피란길 옛 얘기 밤재가 궁금하고 그리워 어른이 되어서 다녀왔다.


그러나 그때는 작년 여름 피란 때처럼 완장차고 설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장질부사에 걸려 많이 죽었는데, 우리 증조모와 할머니도병에 걸려 고생을 하셨다. 인민군이 완전히 도망가고 피란 나간 사람들이 들어왔고 그때 큰댁은 움막에서 살면서 마당에 빨래를 널어놓았는데 구라만 전투기가 공습을 하면서 휘발유를 뿌려서 그 집도 타버렸다.
나는 방에 있었는데 창문으로 연기가 들어와 나가 보니 세모꼴로 지은 움막들도 다 타버렸다. 그때 8촌 동생은 손에 총에 맞았었고 다른 사람들은 미리 피해서 인명 피해는 없었다. 당시 전쟁에 많이 시달렸던 사람들은 눈치가 빨라서 비행기가 뜨면 사격을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를 미리 다알고 대피하여 위기를 넘겼다.
후에 피란을 나갔다 돌아온 동네 사람들이 우차에 짐을 싣고 밤재를 넘어 피란살이를 한 이야기를 하니 밤재가 어디인지 궁금하고 부럽기까지한 철없는 아이였다. 세월이 지나 나라가 안정되고 어른이 되어서야 얘기로만 듣던 한 많은 피란길이었던 밤재를 직접 다녀오니 마음이 후련하고 감회가 새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