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인구2리 이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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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22회 작성일 2018-03-05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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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진 (남, 84세, 현남면 인구2리)
■ 면담일 : 2017.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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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학교에서는 놋그릇과 소나무 관솔을 걷어갔다.


해방이 되어서도 잠시 동안 일본인인 미시가와 곤조가 교장으로 우리를 가르쳤고, 한국인 선생들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얼마 후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 아라이, 기무라, 기모노 선생이 쫓겨나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떠나갔다. 그들은 얼마나 악독하게 했는지 일본인 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학교에서 조선말 하다 들키면 5전(현재 5,000원 정도)을 벌금으로 내야 되었고 못 내면 대신 벌을 받아야 했었다. 당시 학교에는 각 가정에 놋그릇과 소나무 관솔가지 등을 걷어갔으며 나는 지금까지도 일본 국가를 외우고 있다.
당시 농부들은 농사를 지어 공출 량을 내지 못하면 책임자가 와서 어른들을 때리기도 했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쌀을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두기도 했다. 이렇게 압박을 받다가 일본 놈들이 쫓겨 갔다니 앓던 이가 쏙 빠진 기분이었다.



◆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는데 피란을 가지 말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6 ․ 25전쟁 전에 인구는 남한인데 인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중학교에 해당하는 임호 공민과에 들어갔다. 그때 학생들의 나이 차이도 많았고 장가간 아이 아범도 학생으로 학교를 다녔다. 학교 다닐 때는 고무신도 없어 짚신이나, 게다(나막신)나, 쪼리(짚신 슬리퍼)라는 신을 신고 다녔다.
당시 미군부대가 들어와 시변리에 주둔하였는데 미군들이 맛있는 과자를 주니 아이들이 자주 갔다. 미군은 신사적이고 물품이 풍족하여 아이들에게 먹을거리를 잘 주어 매일 갔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소련군은 흘레브란 빵을 먹고 놋요강에다 밥을 해 먹기도 하여 미개인이라 했다.
6 ․ 25전쟁이 나서 국군이 후퇴하니 우리는 남으로 피란을 나가기 시작했다. 사천을 지날 때까지 피란을 가면서도 인민군은 보지도 못하다가 강릉에 가서 대관령을 넘어가다가 인민군을 만났는데 그 인민군들이 왜 피란을 가느냐?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는데 다시 들어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앞서 북에서 피란 나온 사람들에게 북한 사정을 많이 들어서 알기 때문에 피란민들은 인민군들이 보이지 않자 평창을 지나 제천에 가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갔는데 피란민들이 너무 많이 몰려있어 모두들 울산으로 갔다.



◆ 피란민 증을 발급받아 쌀을 1인당 한 홉씩 배급을 받았다.


울산에 가서 면사무소에서 피란민 증을 발급받아 면사무소나 지서에 가면 쌀을 한 홉씩 배급을 주었다.
경상도 사람들은 참 인심이 좋았다. 그러나 안동에 갔을 때 런닝 차림으로 밥 얻으러 갔더니 호로 새끼라고 내 쫓겼다. 그래서 부근 학생들에게 물으니 옷을 다 입고 가라고 일러주어 옷을 입고 다시 가니 배가 고프겠다며 밥을 많이 주었다.
낮으로는 배급을 준다고 오라하면 자루를 들고 쌀을 얻으러 갔다. 그러나 대구방면인 낙동강에서 전투가 심해지면서 군인을 뽑아 가는데 한 대학생이 집에 가서 부모님 얼굴 보고 가겠다고 해도 들어주지 않고 데려갔다.
양산에 가니 피란민이 너무 많아 다시 올라와 울산 정자리에 가서 동사에 있으니 거기도 피란민이 꽉 차서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지만 어쩔 수가 없이 쪼그려 자고 안남미 쌀을 배급받아 저장해놓고 밥은 얻어먹으러다녔다.
쌀은 1인당 한 홉씩 주는데 우리는 아버지와 나 그리고 동생과 함께 셋이 면사무소에도 가서도 배급받고 지서에도 가서도 배급을 받아와 밥을 해놓고 반찬은 얻어먹었다.
피란민 수용소인 동사무소에서 뉴스를 들으니 수복 명령이 났다. 사령관이 그 지역 똑딱선 배를 동원한다고 해서 포항까지 피란민들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어떤 배는 사람을 너무 많이 실어 배가 가라앉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배를 타고 삼척 정라진에 와서 인구까지는 걸어서 왔다.



◆ 거지가 왔다고 돌팔매질에 동생 발에 맞아 피란민에 설움을 삼켜야했다.


1 ․ 4후퇴 때는 두 번째 피란을 울진 매화리 까지 피란을 갔다. 그러나 먼저 피란 때인 경상도와 달리 여기에는 피란민증도 안 해주고 배급도 없으니 밥을 얻어먹어야 했다. 그래도 몇 번씩 밥 얻으러 가도 주니 이 동네도 인심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동네 어떤 아이들은 거지 왔다고 돌팔매질을 하여 동생이 발에 맞아 피가 나도 말도 못하고 피란민의 설움을 삼켜야 했다. 하긴 피란민이 하도 많이 넘쳐 나다보니 지역 본토박이들도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소문에 고향에 가도 된다고 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국군을 따라 왔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남에 집에 가서 사정하여 집에 들어가면 사람이 바글바글하니 누워서 잘 수 없고 쪼그려 앉아 자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피란민 모두가 몸이 고되니 금방 잠이 든다.
피란살이 몇 달 만에 집에 들어오니 집이 모두 불에 타고 없었다. 하지만 전쟁 통이라 그 누구도 어디다 하소연을 할 수 없어 모두들 불에 탄집 구들장위에 초막 같은 집을 짓고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생활이 조금 안정되자 나는 현남중학교를 졸업하고 동네 김○○훈장 집 서당을 12년간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