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인구2리 김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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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17회 작성일 2018-03-0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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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호 (남, 78세, 현남면 인구2리)
■ 면담일 : 2017.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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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5일 새벽 대포소리가 나더니 폭탄 파편이 집 앞마당에 떨어졌다.


해방 후 미군들이 인구 시변리 현 해수욕장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권총까지 차고 우리 동네로 술을 마시러 오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부대 주변에 가서 미군들에게 말을 배워서 헬로!

초코렛 기브미! 라고 하면 초코렛, 과자, 껌 등이 들어있는 깡통을 던져주었는데 참 맛있어서 자주 갔다.
처음 보는 서양인의 코가 크고 얼굴색이 빨개도 무섭지 않았다. 당시 주둔했던 미군들은 면사무소를 통하여 마을에 누런 설탕이 배급하여 달다한 설탕을 그때 처음 먹어 보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났고 대포 소리도 들려 전쟁이 난 것을 알았다. 그때 북쪽에서 날아온 폭탄 파편이 우리 집 앞마당에 떨어졌고 이어서 요란한 총소리가 계속 들렸다. 우리는 우선 다급하게 굴속에 들어가 숨었다. 이 굴들은 그전서부터 전쟁이 나면 숨으려고 미리 파놓은 굴이었다.



◆ 피란민 보다 인민군들이 앞서가니 다시 집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했다.


얼마 후 북쪽에서 피란민들이 밀려나오기 시작하자 동네 사람들도 남쪽으로 가야 산다고 하여 우리도 피란을 떠났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마을사람들은 미처 준비도 제대로
못한 체 쌀과 이불 그리고 그릇과 옷 몇 가지를 챙겨서 지고 갔다.
강릉 사천에 나가니 벌써 논에 모가 조금 심어져 있었다. 사방에서 모여든 피란민들과 농촌 길에 들어서니 국군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어 인민군이 우리 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녁이 되자 우리 가족은 우선 강릉 학산에서 1박을 하게 되였는데, 다른 집들은 성산을 거쳐 삽당령을 넘어 정선으로 간다고 하였지만, 아버지가 이미 인민군이 먼저 나갔는데 나가봐야 소용이 없다고 여러 가족들과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는 농사일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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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담중인 김주호씨



◆ 북한의 100일 정치를 할 때 청년들이 강제로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북쪽에서 나온 사람들에 의해 이름 하여 100일 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인구국민학교 4학년이었는데 선생님들은 피란을 못가서 학교에 나가면 그전처럼 공부를 했지만 학교에선 북한 노래를 가르쳤고 소년단을 조직하고 매일 모여서 무슨 회의를 했다.
그때 북에서 온 내무서 사람들에 의하여 17~19세인 청년들을 강제로 인민군으로 끌려갔는데, 우리 마을도 6명이 끌려갔고 아마 현남면 전체로 보자면 꽤 많은 청년들이 잡혀가서 돌아오지 못했고 35~40세 정도의 사람들은 짐꾼으로 끌려갔다.
국군이 들어 왔을 때도 포탄을 지고 전쟁터에 더러 나갔는데 박○○는 밤에 심한 폭격으로 부대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질 때 산으로 뛰어 살아 돌아왔다. 미군들이 참전하고 인민군들이 북으로 후퇴하면서 소를 끌고 가서 짐을 싣고 갔는데 나중에 소는 돌려 보내주었다고 했다.
◆ 어머니와 누나는 길쌈을 삼아주고, 나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았다.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12월 말경에 국군이 후퇴를 하자 이불과 쌀을 짊어지고 2차 피란을 떠났다. 그때 나중에 나온 사람들 말을 들으니 온 마을이 다 탔다고 했다.
옥계까지 갔는데 군인들이 소를 잡아 다 먹지 못하고 피란민인 우리에게 주어서 그 쇠고기를 먹고 1박을 하였다. 다음날 피란길을 재촉하며 길을 나서자 날은 춥고 짐은 무겁고 나는 울면서 부모님을 따라 호산을 거쳐 울진 매화리까지 나갔다.
그러나 먹을 것이 제일 문제였다. 어머니와 누나는 남의 집 길쌈을 삼아주고 쌀을 조금 받아오고 나는 밥 얻으러 갔는데 한집은 주는데 어떤 집은 주지 않았다. 많은 피란민들이 밥 얻으러 다니다보니 그러려니 했지만 한편으로는 창피하기도 했고 야속하기도 했다. 그때 나에게 밥을 준 집은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평해에 피란 나가서는 매일 밥만 얻어다 먹을 수 없어 톱과 도끼를 사서 산에 가서 나무를 하러갔다. 그 당시 우리뿐만 아니라 피란을 나온 사람들은 약 2km 정도 멀리 떨어져있는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 패고 말려서 후리포(후포)에 지고 가면 잘 팔렸다. 나무를 팔아 그 돈으로 식량을 사다 먹었다.



◆ 어머니가 준비한 비상금으로 죽변에서 배를 타고 묵호항에 내렸다.


평해에서 피란살이를 할 때였다. 양양이 수복 되었다고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소문이 났다. 그때 물론 라디오는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소문을 듣고 알았다. 당시 어머니는 언제 준비하셨는지 비상금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돈으로 고향으로 가기위해 울진 죽변에서 고향으로 가는 배삯을 내고 돛단배에 올랐다. 배는 목선인데 노를 저어가는 배로 약 50여명이 탔다.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여러 척의 배로 죽변을 떠났다.
배에서는 쌀도 없고 불도 피지 못하고 굶으며 왔고 배 멀미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고향을 간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 배가 닿은 곳은 묵호항이다. 걸어서 고향 인구 2리에 오니 너무 살 것 같았다. 총소리도 없으니 전쟁이 끝이 났는지 모두 학교에도 나갔다.



◆ 상운 아줌마가 우리 집을 불 태우러온 사람의 다리를 잡고 사정하여 안탔다.


1 ․ 4후퇴 당시 우리 동네 모든 집들이 불에 탔다고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우리 집은 불에 타지 않았다. 당시 다리가 아파서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우리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밥을 많이 해놓고 할머니를 집에 남겨둔 체 피란길을 나섰다.
그때 마침 우리 집으로 피란 온 손양면 상운리 아줌마가 불태우러 온 사람에게 다리를 잡고“우리 어머니가 걷지 못하고 기어 다니는 판인데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 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하고 자기 어머니라고 속이면서 애원하자 불을 태우러 온 사람들도 어쩔 수 없었는지 그냥 가는 바람에 집이 타지 않았다.
그 후 우리 할머니는 집 앞 밭에 쌓아놓았던 콩깍지가리가 불에 타자 놀라면서 불이 집으로 옮겨 붙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불을 안고 논으로 기어 나가 주무시다가 엄동설한에 그만 얼어서 돌아가셨다고 전해주니 더욱 가습이 아팠다.
1 ․ 4후퇴 때 우리 마을 60호중에서 불에 타고 남은 집은 우리 집과 박원봉, 덕봉이네 집으로 3채만 타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우리 집에 국군대령이 살고 있어 우리는 뒷방에 살았는데 국군이 자가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켰다. 후에 인구 현남지서가 불에 타서 우리 집이 지서가 되었다.
그때 우리 집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장기영이 강릉에 발령을 받아 갔다가 장가를 들어 아이를 낳고 다시 인구 지서에 발령을 받아 우리 집에 또 와있었다. 나이가 80세가 넘은 지금도 그와 서로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