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광진리 박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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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12회 작성일 2018-03-0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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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도인 (남, 83세, 현남면 광진리)
■ 면담일 : 2017.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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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선에 인접한 잔교리에 교통호를 파러 1년 동안 부역을 나갔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견불리 조석행 훈장이 가르치는 서당에서 학교처럼 체조도하고 일본글도 배웠다. 서당에도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있어 3학년을 마치면 시험을 보고 성적이 좋으면 인구초등학교 4학년에 넣어주었다.
나는 1학년에 들어갔다가 시험을 보아 3학년에 월반해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후 훈장님은 현남면 사무소에 들어가고 서당은 없어졌다.
그 후 해방이 되면서 38°선이 그어지면서 현남 사람들이 부역을 나가 38°선에 인접한 잔교리 남쪽 산에 교통호를 파는데 그때 현남 사람들이 한차에 30여 명씩 6대가 동원되어 약 1년 동안 다니면서 교통호 작업을 했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해 내가 대신 부역으로 나갔다. 교통호는 산 능선 남쪽 바로 밑에 가로로 한줄 씩, 그리고 능선 넘어 북쪽방향도 바로 밑에 가로로 두 줄씩 교통호를 파는데 간혹 작업도중 이북 쪽에서 따콩 하고 총소리가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숲에서 작업을 감독하던 소대장이 인민군에게 노출되어 재수 없이 총에 맞았다고 했다.



◆ 모를 심는데 꽈당 탕 하더니 매호에 대포알이 떨어졌다.


나는 13세살 어린 나이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다리를 못 써서 농사는 못하고 시멘트 바르는 일을 했다. 당시 나는 학교에 갔다 오면 책보를 던져놓고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땔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
아버지는 시멘트 바르는 일로 힘들게 번 돈으로 논 4마지기인 약 600평을 쌀 3가마니를 주고 샀지만 아버지가 농사일을 못해서 동네 아저씨들이 논갈이를 해주면 다른 일은 어린 내가 도맡아 했다.
그러면서도 국민학교를 3월에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해 가물어서 다락 논에 모를 못 심다가 6월 23일과 24일에 비가 와서 25일 곰불리에 모내기를 하러 가서 모를 찐 다음 모를 막 심으려는데 갑자기 꽈당 탕! 하고 소리가 나서 38°선에 무슨 사고가 난가보다 했는데 쑹~하더니 집 앞 매호에 대포알이 떨어졌다.
그때 광나루 어떤 집은 굴뚝이 포탄에 날아갔다고 했다. 이어서 사람들이 북쪽에서 피란을 나오기 시작했다. 6 ․ 25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부리나케 집에 오니 부모님은 벌써 피란가실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 달래에 사는 아저씨가 부인이 포격을 맞아 죽자 그 옆에서 울고 있었다.


쌀은 화장실 옆에 잿더미를 파고 묻고 논에서 흙이 묻은 옷을 갈아입고 쌀 1말을 어머니가 이고 황소 한 마리를 몰고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피란길을 나섰다. 사천까지 갔는데도 아직까지 인민군은 보이지 않았다.
철둑길로 걷다가 사천진리 다리를 건너려는 그때 비행기가 폭격을 했다. 어떤 아저씨가 강가에서서 울고 있었는데 그는 달래 사람으로 부인이 폭격에 맞아 죽어서 운다고 했다.
아버지가 다리가 아파서 더 못가겠다고 해서 사천 산대월리 숨께 라는 외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최중철 이라는 아저씨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 집 아저씨는 피란민인 우리 가족을 편하게 대하며 들어오라고 한다.
나는 소를 그 집 마구에 매어놓고 방으로 들어가니 그 집 아저씨 네는 아들이 6살 딸은 9살인데 그 아들은 홍역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 아저씨는 무슨 주문을 소리를 내면서 외우고 있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 피란 중 한솥밥을 먹고 살아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소문에 그날 밤 인민군들이 강릉으로 나갔다고 한다. 낮에는 감자 굴을 수리하여 굴속에 들어가 살았다. 그 집 아이들은 나보다 나이가 적어 오빠형으로 불렀다.
해가 저서 어두워지면 불을 때고 밥을 했다. 문들도 이불로 가려 빛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비행기가 정찰 후에는 꽈 당 당 꽈 당 당 폭격소리가 났다. 그래서 정찰기만 뜨면 굴속으로 기어 들어가 숨어야 한다.
우리는 숨께에 있는 연못에 가서 통살(고기를 잡는 기구)을 눌러 고기도 잡아왔다. 어느 날 옆 동네 아주머니가 와서 불에 댄대 약이 없느냐고 물으러 왔는데 폭격에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집 그 아저씨는 아주머니가 왔다간 후 부정이 들어 홍역이 걸렸던 6살인 최석중이 얼굴을 긁어 후에 곰보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최중철 아저씨 집에서 편하게 여름을 났다. 하루는 어머니가 어디서 들었는지“인민군이 사람 안 잡아 간다더라”하시면서 아침에 집으로 들어갔다가 저녁에 나오셨다.
집으로 들어갈 때 철길과 소나무 밭에 지뢰를 묻었다하여 못 간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사람들이 다니던 길로 해서 갔다가 밤에 오는 중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나서 산대월리로 가는 길을 확인하고 가만히 있으니 그냥 지나갔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 집에 같이 사는 동안 그 집 쌀을 먹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두 번째 집으로 들어갔다 오시더니 집에 가서 묻어 두었던 쌀을 퍼내왔다. 주인집은 살벌한 전쟁 중에 생판 모르는 피란민인데도 한 솥밥을 먹고 살았으니 너무 고마워서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그 집 딸 최순덕이도 나를 잘 따랐고 폭격이 없으면 그 집 딸과 아들을 데리고 뒷산에 올라가서 놀았다. 우리는 그 집 덕분에 피란살이에도 고생 없이 살게 한 은인으로 서로 사돈을 맺을 정도로 얼마동안 서로 왕래하며 살았다.
그리고 피란 기간 동안 우리가 사는 집은 동 떨어진 깊은 산골짜기의 오막살이 집이어서 다른 피란민은 오지 않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 소나무 껍질을 벗겨 쌀을 조금 넣고 송기떡과 나물죽을 끓여먹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밖에 갔다 오더니 국군이 북진했으니 집에 가도 된다고 했다.
국군을 따라 들어왔지만 먹을 게 없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는데 가을 껍질은 먹기 어려웠다. 봄이 되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 쌀을 조금섞어 송기떡을 해먹기도 하고 나물죽도 많이 끓여 먹었다.
마을은 그전처럼 살았는데 국군이 또 후퇴를 한다면서 반장이 와서 피란을 나가라고 하여 1 ․ 4후퇴가 시작되었다. 우리 식구는 이번에도 또 쌀서너 말을 지고 피란을 떠나면서 집 동네 쪽을 보니 연기가 자욱하다.
나중에 알았는데 국군이 집을 태우고 후퇴했다고 한다. 우리 식구는 또 숨께 최씨 아저씨 집에 가서 전처럼 같은 식구처럼 살았다.
한때 사천 앞바다에서 함포 사격을 해서 태백산맥 주위까지 포탄이 떨어지는데 눈이 하얗게 쌓여있어도 불이 붙어 그때는 이상하게 생각했었고, 또 하늘에서 비행기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면 꽝~하고 포탄이 터지면 불이 났다. 나는 그것을 구경하러 그 집 아이들과 매일 구경을 나갔다.

1951년 3월 수복이 되었다고 해서 집으로 들어오는데 길가에 민간인들이 죽은 시체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온 동네와 마찬가지로 우리 집도 불에 타 없어졌지만 집들이 없어져서 목수인 아버지의 일감은 많아졌다.
그때 나는 아버지와 같이 다니면서 일을 해서 돈도 많이 벌었고 23살에 영장을 받고 국군에 입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