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동산리 김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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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40회 작성일 2018-03-0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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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인 (남, 80세, 현남면 동산리)
■ 면담일 : 2017.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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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소병들 모르게 38°선을 넘어 큰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


내가 13살 때 중광정에 사는 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38°선을 넘어 가서 장례를 치러야 했는데, 그 당시 38°선 이북에는 로스케가 지키는 초소가 있어 거기를 지나야만 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일반 사람들이나 주로 보따리장사꾼들이 38°선을 자주 넘어 다니고 있었고, 그 사람들은 주로 새벽 4시에 초소병들이 교대하는 것을 알고는 그 틈을 타서 제집을 드나들 듯이 넘어 다녔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리쿠사쿠(배낭보따리)에 국수를 지고 새벽 4시에 38°선을 넘어가려고 하니 아직도 교대를 안 했는지 다발총을 맨 사람이 지키고 있어 되 내려와서 지서 순경에게 말하니 동이 틀 무렵에 넘어가라고 가르쳐주어 넘어갔다가 큰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 6월 25일 새벽 꽝 하고 대포소리가 나더니 집 앞 기둥에 파편이 박혔다.


당시 38°선에는 국군 8사단 5중대가 태비골에 주둔하고 있었고 중대장 숙소가 우리 마을에 있었다. 군인들은 소대병력 밖에 안 되었고 차량은 스리코다 1대와 중화기는 박격포 1문 밖에 없었다. 우리 마을에서 38°선은 약 3km정도 거리이고 북한과 마주 보는 경계 초소에서 소리 지르면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해변에서부터 1호, 2호, 3호, 4호 초소가 있고 북한은 시멘트 콘크리트 방카가 있었지만 국군은 각 호마다 나무를 걸치고 지키는 군인이 그나마 2명밖에 없었다. 겨울에 눈이 오면 마을 사람들이 교통호로 눈을 치러 나갔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는 지서가 있었고 우리 동네사람인 윤상율 순경이 거기서 근무를 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아버지는 논에 가시고 얼마 안 있다가 꽝 하고 대포 소리가 나더니 앞집 기둥에 파편이 박혔다.



◆“동무들, 집으로 돌아가라! 좋은 세상이 되었는데 왜 피란을 가는가!”


그때 아버지가 들어오시더니 난리가 났다고 하여 언덕에 가보니 북분리 쪽에서 인민군들이 줄을 서서 나오고 있었다. 차는 없고 탱크를 앞세우고 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피란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짐도 제대로 못 싸고 냄비와 이불 등을 지고 피란을 나섰다. 국군은 쓰리코다를 타고 먼저 나갔고 뒤에 처져 있다가 미처 나가지 못한 군인과 순경들은 민간 옷을 갈아입고 우리와 같이 피란민에 섞여서 나갔다.
주문진을 지나 강릉 성산으로 해서 삽당령을 넘어 갔다. 길도 모르는 초행길이지만 그저 앞 사람을 따라 밤새도록 걸어갔다. 비는 오는데 정선에 가니 여기저기에 피란민이 꽉 찼다. 길거리에는 어느 부모가 아이들을 잃어버렸는지 한 아이가 애타게 어머니를 부르며 울고 있는 모습을 안타깝게 처다 볼 수밖에 없었다.
피란민 모두가 제대로 먹지 못해서 지칠 때로 지처 있었는데 그때 다발총을 맨 인민군이 길을 가로 막으며“동무들, 집으로 돌아가라! 좋은 세상이 되었는데 왜 피란을 가는가!”라고 한다. 하긴 인민군들이 앞서 나갔으니 그보다 더 앞으로 나갈 방법이 없어 할 수 없이 밥을 얻어먹으며 피란을 나간 지 4일 만인 6월 28일 집으로 돌아왔다.



◆ 그들이 하는 말만 잘 들고 살아야하는 무서운 세상이 되고 말았다.


집으로 들어와 농사일 하며 사는데 완전히 인민군 세상이 되었다. 북에서 나온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은 소년단에 들라고 하고 어른들은 농지위원회를 만들고 농지위원장을 뽑고, 맨날 해가지면 모이라 해서 노래 부르고 학습을 한다. 위대한 공산당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상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교육을 시켰다.
아버지는 남에 집일을 하며 살다가 외가에 장가가서 글을 몰랐지만 말은 잘했다. 그들은 밤에 아버지를 나오라고 하여 나가니 권총을 찬 놈이 아버지를 담에 세워놓고 위원장을 하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위협을 가하였지만 아버지는 글을 몰라서 못하겠다고 버티자 그들은 다른 사람을 위원장으로 세웠다고 했다.
그 후 뱃사람 그물바리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소년단과 청년단을 뽑고자 저녁마다 신상파악하고 날치고 다녔다. 모든 마을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하는 말만 잘 들고 살아야하는 무서운 세상이 되고 말았다. 또 공산당원들은 의용군에 나가라고 누구누구를 지명하면 아무도 말도 못하고 끌려 가야했고 동네에서 3명 중 1명만 살아서 돌아오고 2명은 소식이 없다.



◆ 인민군 패잔병을 피해 배를 타고 중 바다에 나가 머물러 있다가 들어왔다.


그들은 매일 부산만 해방시키면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고 하더니 10월이 되어 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도망가고 마을에서 설치던 사람들은 모두 북으로 따라 들어갔고 이어서 국군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국군들 뒤에 인민군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국군은 원산까지 북진했는데 미처 북으로 도망가지 못한 인민군 대부대가 패잔병이 되어 밀려들어 온 것이다. 패잔병들은 총은 가졌어도 총알이 없고 옷도 누렇고 다쳤는지 어께동무를 하고, 끌고 가다시피 했고, 거지같은 행세여서 불쌍하게도 보였으나 그래도 패잔병 숫자가 워낙 많으니 무서웠다.
사람들은 남쪽에서 밀려오는 인민군들에게 쫓겨 오히려 북쪽으로 피란을 갔다. 그때 아버지는 형들을 보고 저 바닷가 바위 돌 뒤에 가서 숨어 있으라고 하여 바닷가로 나갔고 나는 뒤따라가서 아버지! 하고 소리치며 따라가니 태워주었다.
배는 목선인데 할아버지들 몇 명이 같이 타고 남쪽으로 나가면서 밤새 비 맞고 날이 밝아지자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먼 중 바다에 머물러 있다가 남애항 솔봉밑에 내렸다. 어머니와 형들은 바닷가로 나가 숨는 바람에 무사히 지낼 수 있었고, 우리가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와 형들은 이미 집에 와 있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회상해보면 당시 아버지는 혹시 예측할 수 없는 변고를 대비해 고심 끝에 나와 형님을 의도적으로 갈라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고성까지 피란을 갔다 왔다고 했다.



◆ 불에 타고 남은 탄 냄새나는 쌀로 밥을 해 먹었다.


마을은 다시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다 겨울에 인민군이 다시 밀고나와 1 ․ 4후퇴가 시작되니 집에서는 귀중한 물건과 쌀을 묻어놓고 배를 타고 피란을 나갔다. 주문진 영진에 가서 우리 마을 쪽을 바라보니 벌겋게 불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우리 집에 수색대가 주둔하다가 나가면서 태웠다고 했다. 그때 만해도 대부분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한집만 불이 붙으면 옆집으로 순식간에 불이 붙어 온 마을이 불길에 휩싸였다고 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함석을 이은 흙 담으로 지은 8칸 집과 산 밑에 홍복만씨의 기와집 그리고 해변가 전복례씨 집은 운 좋게 타지 않았다.
우리 식구는 이튿날 삼척 정라진에 가서 피란생활을 했다. 두 번째 피란도 미처 준비를 못해 대부분 피란민들은 밥을 얻어먹으며 구차한 생활을 하다가 국군을 따라 집에 돌아와 보니 집터도 못 찾을 정도로 온 마을이 폐허로 변해있었다.
아버지는 방향과 지형을 보더니 집터를 용케 찾아 재를 퍼내고 묻어 놓은 물건을 찾았으나 누가 다 파내갔는지 알 수 없었고, 묻고 간 쌀은 윗부분은 다 타고 아래 부분만 조금 남아 있어 탄 냄새가 나는 쌀로 밥을 해먹었다.
보란 듯이 마을을 지키며 떡하니 버티고 서있던 큰 아름드리 소나무가 폭설에 부러져 그 나무를 베어다 구들장위에 초막을 쳤다.
통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올리고 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얹었다. 연장도 없이 식구들이 힘을 합쳐 토담집을 지어 1975년 정부에서 슬레이트를 주어 집을 다시 지을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