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원일전리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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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38회 작성일 2018-03-0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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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우 (남, 82세, 현북면 원일전리)
■ 면담일 : 2017.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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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할아버지 예언대로 6 ․ 25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1945년 해방되고 당시 원일전은 38°선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지역이라 늘 총소리가 나니 어린 지식들이 전쟁이 나도 안전하게 기르기 위해서 우리 식구는 전쟁이 나기 전인 1947년 횡성 둔내로 이주하였다.
처음 횡성으로 이사를 하려고 살 집을 보러 어성전에서 명주사 쪽 망령재를 넘어 주문진으로 가는데 아는 경찰이 나와서 우리할아버지는 운전석 옆에 태우고 장리 박홍순 아저씨는 짐 위에 태워 주었다.
대관령 반쟁이 주막에 내려 쉬었다가 진부를 지나 원주에 장조카가 머슴을 살고 있어 그 집에서 새벽에 화로 불을 쬐다가 식사를 하고 38°선을 넘어 횡성 둔내가 곡창지대니 여기서 살라고 장조카가 권유하였다.
할아버지는 그 말에 솔깃하여 둔내에서 살기로 결정을 하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재산을 처분하고 둔내에 논밭전지를 구입하고, 이삿짐을 챙겨서 둔내면 현천리로 가족 전체가 이사를 하고난 다음 3년 만인 1950년 할아버지 예언대로 6 ․ 25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 풍기 인삼밭에서 일을 하며 살다가 원주에 오니 재 바다가 되어있었다.


해가 바뀌어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인민군들이 다시 남하하자 1 ․ 4후퇴가 시작되어 피란을 나가는데 우리 집 옆에 방앗간을 미군 비행기에서 폭격을 하고 휘발유를 뿌려 화재가 나서 전소 당하는 것을 보며 피란을 나섰다. 당시 미군기들은 인민군의 대공세를 저지하기 그들이 사용할만한 요소들은 모조리 태워버리는 전략을 썼다.
우리가족은 중이재를 넘어 풍기 전구동으로 피란을 하여 김성중씨가 주인으로 있는 젊은 부부 집에서 일을 해주고, 나는 부역을 대신 나가기도 했는데 하루는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부대로 부역을 나가 물통에 물을 길러 산위로 들고 올라가서 미군들이 등목을 하는 물을 공급해주는 일을 해보기도 했었다.
풍기 인삼밭에서 일을 하며살다가 원주에 오니 재 바다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영을 넘어 고향 쪽으로 간다고 삼척으로 가서 나는 장성 탄광지역의 화광동 시장에 있는 중국집 식당에서 배달 일을 했다. 짚신장사도 했는데 당시 짚신은 하루만 신어도 잘 떨어져서 잘 팔렸다.
마침 6 ․ 25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둔내로 피란을 와 우리와 같이 피란생활을 하시던 아버지 친구이신 이기선씨는 가마니를 풀어 짚신을 삼아 팔아 피란생활을 하다가, 집안 대부이신 박용우씨가 장성경찰서 경비과장으로 있을 때 지인의 덕으로 이기선씨를 장성광업소 화약창고에 취직시켜 주었다. 그 후 정세가 안정 되자 우리 식구는 고향으로 들어와 터전을 마련하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