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사교리 김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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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11회 작성일 2018-02-2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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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래 (남, 71세, 강현면 사교리) 전 경기도의회교육위원
■ 면담일 : 2017. 12. 5
이글은 김광래씨가 유년시절 어머니에게 들은 내용(이야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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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주의에 반기를 들고 월남을 했다.


1950년 6 ․ 25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의 일이다.
당시 내가 사는 사교리는 38°선 이북으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설정된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나라였다. 북조선은 공산주의를 선택하게 됐고 공산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많은 청년들은 자유주의를 신봉하며 38°선 이남으로 내려가게 된다.
이들이 주문진을 본거지로 호림부대를 편성하고 대 이북 유격전 및 첩보공작을 맹렬히 전개하게 된다. 이들 호림부대중 제5대대는 1949년 7월1일 봉정암 근거지에서 철수하며 대청봉과 화채봉을 새로운 본거지로 하고 양양지구 반공청년과 연락을 맺고‘게릴라’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부대원 일부가 조부인 김철기와 10촌간인 김환기 집에 잠입하여 작전을 모의하게 된다. 이때 부대원이 위조군표로 양양읍에 나가서 각종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아지트인 사교리 김환기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군표가 위조임을 알고 가게주인이 내무서에 신고하게 된다.
이때 신고 받은 인민군들이 호림부대원의 뒤를 밟아 사교리까지 당도하여 김환기 집을 완전 포위하고 집중 사격을 가하자 호림부대원들은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부대원중 이계화는 현장에서 자폭하였고, 나의 아버지인 김남열과 8촌 관계였던 김남홍 부대원은 여러 곳에 총알을 맞았지만 목숨이 붙어있어 들것에 실려 잡혀가게 되면서 집주인 김환기도 함께 잡혀 끌려가게 되었다.



◆ 친척에게 밥을 차려주었다고 반동분자의 집으로 몰려 감시를 받았다.


나의 조부이신 김철기와 10촌간인 김환기는 당시 60이 넘는 노인 이였으며, 이 두 분은 이 사건이 발발하기 30년전 인 1919년 4월 물치만세운동과 양양만세운동을 주도한 분들이다.
호림부대 위조군표 사건으로 수발의 따발총을 맞았으나 목숨이 붙어있는 김남홍은 취조과정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호림부대의 행적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이사건과 무관하게 대목수로 원산등지에서 건축일을 하게 되는데 어느 날 인민군에 의해 잡혀가게 된다. 8촌 동생인 김남홍이 고문 중 우리 할머니가 호림부대원들에게 저녁을 차려 주었다는 한마디를 했기 때문이다.
호림부대원 친척에게 식사 한 끼 제공한 죄로 육순 노모를 대신해서 끌려간 아버지는 과거에 본인의 부친이셨던 김철기 공이 3 ․ 1만세운동으로 숱한 고문과 옥고를 겪었던 제2원산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죄 없
는 죄인으로 총살당하는 기막힌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나의 어머니는 이 뼈아픈 슬픈 상황을 가슴에 안고 죽지못해 평생을 살았음을 자라면서 강도 높게 깨닫게 되고 강하게 성장하자고 수 만 번 가슴에 새기기도 했다.
우리 집과 김환기 집은 호림부대 사건으로 반동분자의 집으로 몰려 수 많은 감시와 멸시를 받게 되면서 평화로운 마을에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이데올로기에 의한 피해와 즉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피치 못할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는 요소가 무수히 내재되기 시작했다.



◆ 4촌간에도 나쁘게 고하여 죽이고 죽는 상황이 많았다고 한다.


1950년 10월 어느 날 사교리에도 아주 어려운 상황이 찾아오게 된다.
국군이 진격하며 특수요원들이 마을마다 빨갱이, 즉 공산주의 정치에 협조한 사람을 색출하기 위해 들어왔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서 많은 동네 분들은 우리 어머니와 이장에게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게 됐다. 아버지는 죄 아닌 죄로 인민군에 끌려가 총살당하고, 그 아픈 상처가 조금도 아물지 않은 1년도 안된 시점에 이 마을에 자식이 인민군대에 가 있는 집들만 공산조직에 협조한 집으로 말하게 되면 수많은 사람이 다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북지역 이였으므로 젊은이들은 당연히 인민군대에 갔고 똑똑한 사람들은 공무원을 하는 등 북한 정치 행정에 몸담을 수밖에 없는데 국군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 집안도 호림부대원에게 저녁을 차려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 김○○는 교사를 하다 월북했고 김○○는 인민군대 빨치산에 가입, 수십 전투에서 총알에 맞고도 살아남은 전쟁 영웅이고 아버지는 비록 원산형무소에서 죄 없이 처형당했지만 그 전에는 건축기사였다.
이때 주변의 많은 다른 마을에서는 정세에 따라 4촌간에도 그 행적을 나쁘게 고하여 죽이고 죽는 상황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9 ․ 28수복이후 어머니는 끝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닫으셨다고 했다.
본래 나의 어머님은 성품이 강직하셔 말 수가 적었고 남의 흠이나 약점은 입에 오르내리지 말라는 것이 내 어릴 때 중요한 어머님 훈육 이였음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이때 이장을 보던 김창희 할아버지가 마을사람에게 하였던 일들을 나는 어머니로부터 여러 번 전해 듣게 된다.



◆ 끝까지 마을을 위하여 희생하신 두 분의 이장님들 덕분에 피해가 없었다.


당시 이장 김창희는 독립운동가인 김철기의 수제자로 마을 일을 오래보면서 집안 내력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국군이 들어오면서 마을회관에 이장을 끌어내고 이 동네 친북 빨갱이를 불라며 엄청난 매질을 했다고 한다.
그때 이장은 의식을 잃으면서도 이 동네는 빨갱이가 없다고 끝까지 숨겼다. 사실 이때 미처 피란 못간 많은 사람들이 다락방 등에 숨어 있기도했다. 이때 얼마나 심하게 구타당했는지 5~6년이 지난 어느 날에 배 보자기에 찹쌀밥을 넣고 우리 화장실 변기통에 넣었다 며칠 후 꺼내 짜서 먹는, 똥 물약을 쓰는 것을 참 많이 보았다.
당시 사교리는 이북의 공산정권 치하 때나, 국군이 들어왔을 때에도 끝까지 마을을 위하여 희생하셨던 두 분의 이장님과 과묵 하셨던 우리 어머님 때문에 국군이나 인민군들에 의한 보복 피해가 전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 ․ 4후퇴로 국군이 밀려갔을 때 다른 여러 마을에서 복수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리고 다른 마을과 같이 사교리도 모든 집들이 불타버리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끝내 이웃을 서로 도우면서 평안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지금 우리 한반도에서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남과 북의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사교리의 역사와 같이 어려울수록 인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많을 때 진정 행복한 살맛나는 평화의 마을이 존속된다는 교훈을 새기며 사교리 마을의 아름다운 인내의 역사가 끝없이 이루어 나아가길 소망하며 합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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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리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