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원일전리 박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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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47회 작성일 2018-03-0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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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묵 (남, 85세, 현북면 원일전리)
■ 면담일 : 2017.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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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료와 오징어 곶감을 사러 경비병 몰래 38°선을 넘나들었다.


원일전리는 38°선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곳이다.
6 ․ 25전쟁 전에는 어성전 지서에서 파견을 나와 있는 순경 2명과 마을 청년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그때 총은 순경들이 소지하고 있는 2자루 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고 38°선이 갈려 있어도 초기에는 우리 동네와 어성전 주민들을 포함한 남쪽 지역 사람들은 농사를 질 때 쓰는 비료와 그리고 주로 곶감과 오징어 등을 사러 경계병들의 경계가 허술할 때에는 남북으로 쉽게넘어 다녔다.
그러다가 간혹 산발적으로 우리 쪽을 향하여 총을 쏘며 위협사격을 하는 때도 있었지만 어느 날 인민군들이 이번에는 작정을 하고 직접 지서를 습격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이웃마을로 피란을 가고 마을을 지키는 순경과 청년들은 도수로를 교통호로 삼아 인원이 많은 것처럼 좌측과 우측을 왔다 갔다 하면서 총으로 대응사격을 하자 그들은 북으로 도주했다. 당시 어성전에는 국군 중대병력이 지원을 나와 주둔하고 있었다.



◆ 낙오병 무전기를 날라주고 돌아오다 국군에 잡혀 포탄을 지고 전쟁터로 갔다.


6 ․ 25전쟁이 발발하던 날 아침 일찍 모내기를 끝냈는데 산에서 총소리가 나서 그저 일상적인 도발이라고 생각하고 구경했는데 오늘은 총소리가 점점 거세지면서 대규모 인민군들이 쳐내려오자 38°선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군군이 남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동네 사람들은 다급히 보따리를 싸들고 피란에 나섰다.
우리는 어성전을 지나 부연동 가마소로 갔다가 연곡에서 2일을 묵고 ‘피란증’도 받지 못한 체 큰댁과 함께 떠났다. 강릉 안인을 가니 국군과 인민군들이 안인 천을 사이에 두고 교전이 벌어졌고, 정동진을 나가자 비행기의 폭격으로 사람과 소들의 사체(死體)들이 즐비했다.
당시 이 비행기가 민간인들에게 공격을 퍼부은 것은 피란민 대열 속에 인민군들이 섞여있었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들었다.
이때 식구들은 풍비박산이 되었는데 나는 국군 무전병 한명이 부대에서 낙오되어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자기가 졌던 무전기를 나보고 지고 가자고하여 군인을 따라 갔다.
요행이 그 군인은 소속부대를 만나 합류하게 되었고 나는 혼자 떨어져 남쪽으로 얼마를 걸어서 내려오다가 친척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척은‘피란증’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증이 없어서 친척집 아들 행세를 하면서 네 식구가 이튼 날 새벽에 이불 보따리를 지고 따라 가다가 이번에도 또 국군에게 잡혀 포탄을 지고 북쪽 전쟁터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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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담중인 박상묵씨



◆ 허기가지니 빈집에 들어가 아무나 먹을 만한 것을 무조건 찾아먹었다.


이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이판사판이라 생각하고 여기저기를 어떻게 돌아다니다가 보니 다시 정동진에서 큰댁을 만나 밤재를 넘어 옥계로 갔다. 거기는 빈집이 많이 있었다.
이때 나는 허기가 들어있는 터라 보는 사람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이것 저것 먹을 만한 것은 무조건 찾아 먹었다. 밭에 가서 감자도 파먹고 무도 뽑아 먹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도둑질을 한 것인데 전쟁 통인데 어쩌란 말인가. 그러다가 나중에는 보리쌀을 받고 나의 집 품도 팔아보았다.
그 사이에 인민군이 우리보다 더 남쪽으로 진격해 가고 있어 우리는 더 피란을 갈 수가 없게 되었고 마주치는 인민군들이 집에 돌아가서 농사나 지으라고 했다. 집으로 걸어서 8월 초순경에 원일전으로 돌아오니 아직 벼가 피지 않았다. 남의 집 옥수수는 수염이 나왔는데 우리 밭은 묵었다.
가을이 되어 가니 공산당들이 생산고 조사를 한다고 논의 벼도 이삭을 세고 조이삭도 세어서 현물세를 매긴다고 했다. 그러나 추수를 하기 전에 국군이 들어온다고 하자 인민군들이 북으로 쫓겨나게 되자 현물세는 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국군은 이미 북진을 하고 있었는데 더 남쪽에서 국군에게 밀려 미처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동해안 큰길을 피해 산줄기를 타고 어성전에서 원일전, 장리, 도리로 이어지는 행렬이 끈이지 않고 이어졌다.
사람들은 길이 꽉 차게 들어가는 인민군 패잔병들이 무서워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숨어 있었다. 그때 국군은 벌써 동해안 큰길을 따라 차로 북쪽으로 멀리 진격했는데 인민군은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산길로 접어든 것이다.



◆ 동생에게‘나는 간다.’라고 감나무에 칼로 글씨를 새겨놓았다.


인민군들이 완전이 북으로 들어가자 다시 대한민국 정치를 받게 되었다.
추수를 끝내고 겨울맞이 준비를 하는데 국군이 또 후퇴를 한다면서 동네마다 불을 놓는다고 빨리 피하라고 하여 온 식구가 곡식들을 땅에 묻고 쌀도 많이 못 가져가고 돌담 밑과 지저분한 거름 밭 속에 묻고 피란을 떠났다.

그리고 감나무에다 칼로 동생에게 글을 새겼다.‘나는 간다.’라고 칼로 파놓고 우리가 피란을 갔으니 찾아오라는 표시였다. 그러나 나는 멀리 피란을 가지 않고 대치리까지 나갔다가 집이 궁금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불에 타 없어졌다. 국군들이 날씨가 추워지면 인민군들이 사용할까봐 동네마다 집집마다 태워버린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먼저 나간 피란민들은 멀리 삼척 아래까지 내려갔다고 하여 동생과 함께 강릉에서 삼척 방면으로 나가려 하는데 무슨 영문인지 국군이 길을 막고 대관령 방면으로 가라고하여 삽당령을 넘어 정선으로 갔다.
영월에서 피란생활을 잠시 하다가 다시 고향을 찾아 귀가하여 피란을 나가기 전에 집 주위에 묻어두었던 곡식을 파내어 먹으면서 전소한 집 자리에 토막집을 꾸리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또 다시 같은 민족이 전쟁이 없는 사회가 되었음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