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명지리 윤춘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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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27회 작성일 2018-03-0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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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춘애 (여, 82세, 현북면 명지리)
■ 면담일 : 2017.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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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 조각으로 인민군견장과 실로 마후라를 떠서 마을 책임자에게 내야했다.


현북면 말곡리에 살았었는데 이북청치 때는 인민군이 먹을 미숫가루를 만들어 내라고 하면 사람들은 없는 쌀을 구해서 미숫가루를 만들어 반장에게 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천 조각으로 인민군 견장을 만들었고 실로 마후라를 떠서 마을 책임자에게 내야했다. 어느 날 오빠가 비판 받으러 나가며 웃었다고 그들이 가죽 허리띠를 가지고 막 때려서 우리는 무서워 얼굴도 내놓지 못하고 엎드려 떨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인 1950년 음력 추석 무렵 학교에 있던 인민군들이 비행기에 대고 총질을 했다. 잠시 후 미국 비행기가 와서 폭격을 하여 학교 뒤편 방공호로 뛰어가 숨었다. 그러다 화약 냄새가 아주 독하게 나 제방둑 넘어 있는 남에 집으로 들어가 큰 가마솥 안에 들어가 숨었고 어떤 아이들은 부엌 아궁이로 들어갔다.
한참 후 나와서 중광정으로 오는데 오줌을 저리고 논인지 밭인지 구분도 못하고 정신없이 집에 들어가 일 년 전에 돌아가셔서 대청에 차려놓은 아버지 상청(喪廳)을 잡고 살았다는 감격에 엉엉 울었다. 한반에 47명 정도 되었는데 타서 죽고 무슨 냄새로도 죽었다고 한다. 그 후로는 무서워 학교에 가지 못했다.



◆ 넷째 오빠는 의용군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다행히 집으로 돌아왔다.


국군이 들어온다고 방공호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농민위원장, 세포위원장이 와서 국군이 오면 모두 죽인다고 하여 오빠들 셋이 같이 들어갔는데 그 후 아무 소식도 없었고, 그러나 넷째 오빠는 의용군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다행히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우리는 남조선 군인들이 오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조선 사람들이 말하기를 남조선 사람들은 개미처럼 굶고 살며 못 먹어서 뼈만 앙상한 사람으로 알고 우리처럼 잘 살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방공호에 계속 있는데 국군이 와서 나오라고 하며 총을 들이 댔다. 국군들은 사람들을 산위에 죽~ 세워놓고는 죽인다고 하여 겁을 먹고 서 있었다는데 꽝~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엎드렸다가 고개를 드니 총에 맞은 사람은 없고 공중에 쏘고 겁을 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들으니 국군들은 남자들을 데리고 가서 짐을 지켜서 데리고 갔다고 했다. 그때 우리는 설마‘남조선 사람들도 사람인데 사람을 죽이겠나?’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 북한 교육은 세상에서 제일 좋고 남조선은 다 거지로 사는 줄 알았다.


당시는 전쟁 통이라 전염병이 돌아 동네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렸다. 그때 김기흥 집에 올케 셋, 언니 둘이 있었는데 국군이 오면 나이가 제일 어린 학생이던 내가 마루를 세 번 처서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 방에서는 올케들과 언니가 병에 걸렸다고 헌 옷을 입고 머리를 산발하고 누워 정말 병에 걸린 것처럼 앓고 있는 척했다가 끌려가지 않아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었다.
나는 국군이 막 들어올 무렵 처음에는 학교가 문을 안 열어 중광정 한기월 집 등 과 동네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김준영, 김흥기 선생님에게 공부를 배웠다. 나중에 학교에서 나는 학교 연극반, 무용반, 음악반에 들어 활동했는데 군부대에 위문을 가서 공연하면 잘한다고 박수 쳐주었다.
그리고 공연 후에는 군인들이 주는 선물과 깡통에 든 음식들 집에 부모님께 드리면 아주 좋아하셨다. 그렇게 좋은 걸 모르고 북한 교육은 세상에서 제일 좋고 남조선은 다 거지로 사는 줄로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