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대치리 김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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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74회 작성일 2018-03-0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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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곤 (남, 83세, 현북면 대치리)
■ 면담일 : 2017.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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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케군인이 공중에 총을 쏘아대고 겁을 주어 무서워 학교에 가지 못했다.


6 ․ 25전쟁 당시 대치리는 이북인 상광정리와 마주보는 38°선 이남이다.
해방 전인 일정 때 나는 현북면 상광정리에 있는 현북국민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해방 후 남과 북이 서로 갈라지면서 내가 다니던 학교는 38°이북인 상광정리에 학교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과 북을 가로막은 38°선이 그어진 직후에도 학생들은 며칠 동안은 북한에 있는 현북국민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로스께가 학교로 들어가려는 학생들을 손짓을 하며 가라고 하자 말이 통하지 않으니 우리들은 영문도 모르고 잠시 머뭇거리자 로스께가 공중에 총을 쏘아대고 겁을 주어 무서워 그 다음부터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때 우리 동네 아이들은 상광정리에 있는 학교에 못 가게 막으니 집에서 놀고 있다가 나중에 어성전 학교로 가야했다. 그러나 학교가 멀어서 일주에 3일 정도씩 가고 학교로 안가는 날에는 동네 한문서당에서 글을 배웠는데 학생들은 약 30명이나 되었다.
처음엔 38°선 이남을 경찰이 지킬 때는 서로 왕래를 하였는데 경찰경비대가 국군 1개 소대와 교체되면서 왕래가 완전히 차단되어 잔교리와 대치리는 인구 관할이 되었으며, 명지리 장리 원일전리는 어성전에서 주둔한 국군이 관할하였다.
당시 국군이 와서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화랑고지, 일정골 고지, 귀골고지에 호를 파고 3개분대가 24시간 경계 근무하였는데 귀골고지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보면 3 ․ 8이북에 있는 상광정리 검소골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이때 각 호의 초소에 근무하는 국군장병들에게 마을 주민들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가마솥에 밥을 해서 등짐으로 져 날라 식사를 해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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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치리 38 표지석



◆ 앞산 능선에 올라가는데 인민군이 새까맣게 늘어서 있었다.


당시 38°선 부근에서는 자주 충돌이 있었고 논에 벼가 익으면 북쪽에서 베어가니 농사를 짓지 않을 때도 있었다. 소금을 사려고 시장에 가려면 북쪽 땅을 막고 못 가게 하니 20분이면 가는 거리를 40분 넘게 돌아서 인구장에 다녀야 했다.
그러니 농산물로 자급자족하고 쌀과 곡식이 귀하니 주로 나물을 뜯어서 곡식과 섞어먹고 칡과 봉양을 파먹으면서 연명을 하였다. 그리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말려서 떡을 해먹기도 하였으며 그때 칡 떡은 아주 고급이었다.
인민군들은 주로 밤이 되면 가끔씩 3 ․ 8이남인 남쪽으로 기습하여 오자 남쪽에서도 해방 전에 월남한 청년들의 단체인 주문진에서 들어왔다던 개병대라고 부르던 부대가 보복을 하였다.
6 ․ 25전쟁이 나던 날이다. 그날도 38°선 근방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는데 평상시 같으면 아침에 가끔 총소리가 나는 것은 보통이지만 그날은 부친께서 나를 보고“밖에 나가 보니 앞산으로 사람들이 남쪽으로 자꾸 올라간다.”하신다.
그날도 우리 식구들은 평상시와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때 경찰이 피란가라고 했다. 우리 식구는 무슨 큰 일이 일어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대충 짐을 싸가지고 피란을 나갔다.
당시 피란을 빨리 떠난 사람들은 멀리 현재 레이더 부대가 있는 336고지가 있는 산까지 앞서나갔고 우리는 이제 막 마을 앞산 능선에 올라가는데 인민군이 새까맣게 늘어서있다. 그때 피란민들과 마주친 인민군들은 마을 사람들 앉으라고 하면서 말도 못하게 하고 꼼짝도 못하게 주위에 들러 섰다.



◆ 전봇대에 올라가 교신을 하고 있는 경찰에게 빨리 숨으라고 했다.


피란민 중에는 인민군이 내려 온지도 모르고 주민들에게 피란가라고 알렸던 경찰도 그 뒤에 처져있었다. 그때 마침 뒤에 경찰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황동구 할머니가 인민군을 보고“우리 며느리가 애기를 낳으려고 하는 것을 내가 보고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내가 집에 가야 하겠다고”인민군에 바지를 잡고 사정했다.
다행히 인민군들이 보내주어 다급하게 내려오니 그때 본부에 알리려고 전봇대에 올라가 교신을 하고 있는 경찰에게“인민군이 산위에 꽉 찼으니 빨리 숨어라.”고 하여 순경 둘은 경찰 옷을 벗어 던지고 피신할 수 있었다.

약 한 시간 후 대장으로 보이는 인민군이 나서더니“우리는 인민을 위한 인민군이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시오.”하자 마을 사람들은 더 가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 내려오다가 국군 한명이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솔밭에 있는 것을 보고“절대 산 쪽으로 가지 마라. 거기에는 인민군이 꽉 찼다”고라 알려주기도 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날 어성전에 주둔하고 있었던 국군병력은 오전까지 버티다가 오후에 후퇴하여 가마소를 지나 전우재를 넘어 사천까지 갔었는데 그때 8사단 본대는 이미 대관령을 넘었을 때여서 인민군 대병력과 맞닥뜨려 전투가 벌어졌는데 거기서 대부분의 국군은 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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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담중인 김희곤씨



◆ 사람들은 겉으로만 마지못해 그들을 따랐지 속으론 완전히 달랐다.


이제부터 멀리 피란을 나가지 못한 대치리 동네 사람들은 인민군이 점령한 공산주의정치가 시작되어 그들에게 지배를 받아야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때 나는 14살인데 소년단에 들라고 했고 안 들면 반동분자로 몰려 혼난다.
밤이면 홍윤보 씨 집의 넓은 방이 있었는데 거기에 모이라고 하여 가면 어성전에서 온 어떤 사람이 와서 김일성을 선전하고 북한 정치는 좋은 거라고 선전하는데 아주 말을 잘한다.
그리고 주민들은 야코가 죽어서 그런지 반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잘못하면 비판을 받는데 반항하면 반동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었고 농담 삼아 애기해도 3명씩 조를 짜서 누가 뭐 했는지 신고하고 알고도 신고 안하면 혼난다.
그러나 사람들은 겉으로만 마지못해 그들을 따랐지 속으론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신고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인민위원장과 농민위원장도 마을에서 단합하여 선임했다. 그래서 이쪽저쪽 패가 없으니 국군이 들어와서도 다른 마을처럼 처벌 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때 이웃마을인 상광정리는 못 다니게 하여 멀리 돌아 현남 인구로 가서 일을 보았다.



◆ 조와 옥수수를 섞어 주먹밥이 되지 못하고 푸석푸석하고 흩어졌다.


그해 추석 전날 마을 동쪽 바닷가 쪽에서 꽝 하고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이 들렸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놀라 바닷가 쪽 하늘을 바라보니 공중에서 검은색 비행기가 쌩 하고 아래로 내리 꽂으니 폭음이 들리고 검은 연기가 나면서 불꽃이 솟는다.
나중에 들으니 현재 현북면사무소 자리에 있었던 현북중학교 앞 산꼭대기초소에서 인민군이 정찰기에 총을 쏘았다. 그리고 나더니 잠시 후에 폭격기가 나타나 현북중학교를 폭격을 했고 그 당시 많은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음력 8월 21일 인구에 국군이 들어 왔다고 하여 먼 길을 달려 구경 나갔다. 걸어오는 군인도 있고 차를 타고 오는 군인도 있었다. 우리는 친구들과 좋아서 만세를 계속 부르고 환영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51년 1월 초가 되자 국군이 또 피란가라고 하고 마을사람들은 후퇴를 하는 국군을 따라 이부자리와 먹을 것을 챙겨서 피란을 떠났다. 첫날은 현남면 남애리에서 자고 다음날 북평에 도착하였으나 거쳐할 집이 없어 애를 먹다가 어떤 집에 찾아가 사정사정하여 방을 얻어 임시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가 16세인데 섣달 그믐날 국군 2명이 와서 문을 열고 나를 나오라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그 군인은 협조 좀 해달라고 하여 어머니가 못 가게 하니 군인은 일 조금만 하고 돌려보낸다고 하며 나를 데리고 갔다.
군인들은 나를 북평에서 철조망 설치하는 일을 시키고 난 다음 식량을 지는 짐꾼을 하라고 하여 짐을 지고 백봉령을 넘어가니 날이 훤하게 샜다.
다시 삽당령을 넘어가는데 어제 전투를 했다는데 인민군 시체가 드문드문 널려 있었다.
그러고 다시 왕산에 가니 밥을 주는데 조와 옥수수를 섞은 밥이어서 주먹밥이 되지 못하고 푸석푸석 흩어졌다. 강릉 성산에 가서 지뢰 제거 작업도 해보고 다시 횡계리로 갔다. 나는 거기서 이제 일을 웬만큼 했으니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해 집에 보내달라고 사정하니 국군이 통행증을 만들어주며 대관령에서 차를 태워 성산에서 내려준다.
성산에서부터 도보로 강릉 시내로 들어와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다가 우리 마을사람들을 만나 강동에 가족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부모님을 만나 다음해 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치리는 큰길에서 동떨어진 곳으로 피란처로는 그만이다. 다행히 2차 피란인 1.4후퇴 때 다른 마을은 전소되었으나 대치리는 불에 타지 않아 전쟁이 끝난 후에 다른 동네보다는 고생을 훨씬 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