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정암리 김춘래

페이지 정보

조회 1,177회 작성일 2018-02-22 16:27

본문

■ 김춘래 (여, 84세, 강현면 정암리)
■ 면담일 : 2017. 11. 4


331.jpg




◆ 아버지가 똥 장군으로 하루 종일 거름을 나르고 좁쌀 3되를 받아오셨다.


왜정시대에는 아버지가 양양광산에 근무하여 우리 가족은 광산사택에서 살았고, 그때 나는 사택에서 지금 화일리에 있는 쉬일(화일)학교에 다녔다. 학교에 갈 때에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 서선리를 지나서 화일리에 학교가 있어 늘 뛰어 다녔고, 학교에서 일본말을 해야지 조선말을 하면 청소를 시키고 늦게 보내주었다.
해방 후 외가가 있는 정암리로 이사 와서 강현 인민학교 1학년에 입학했는데 산수는 일본학교 때와 같아서 쉬웠는데 한글로 배우는 국어는 어려웠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려 했는데 이북정치에서는 외가 논밭을 몰수해서 고생을 엄청나게 많이 했다. 아버지가 남의 밭에 똥 장군으로 거름을 하루 종일 져 날라 좁쌀 3되를 받아오시면 쑥을 뜯어 좁쌀과 끓여 좁쌀풀죽을 먹고 살았다.
아버지는 유교사상이 있어 상투를 틀고 계셨고 외출할 때는 갓을 쓰고나가셨다.
동네에서는 낫 놓고 기억자도 몰라도 공산당 사상만 있으면 인민위원장이나 세포위원장을 시켜서 높은 자리를 주니 행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동네사람을 끌어다 막 패고 무서웠고, 말도 마음대로 못하고 살았다. 정암리 추○○가 월남했는데 그 집을 뜯어 고쳐서 마을 회관을 만들어 밤이면 회관에 모여서 사상교육을 하고 잘못이 있으면 비판하고 두드려 패고 하였다. 동네 김○○아버지도 맞아서 사망하였다. 그 놈들은 국군이 들어올 때 북으로 다 도망갔다.



◆ 그 집에 가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황이리 김씨네 집 민며느리로 들어갔다.


16살 때 6 ․ 25전쟁이 났는데 아버지가 잘사는 집에 가서 살라고 하셨다.
나는 공부 더 하겠다고 하였지만 요때만 잘 넘기면 평화가 올 것이다. 그 집에 가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하면서 서면 황이리 김씨네 집에 가라고 하셨다.
나는 동네 어른의 소개로 2월에 눈이 많이 쌓인 길을 빠지면서 김씨네 집으로 들어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계시는 집의 민며느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밤에 피란을 간다며 벽실령을 넘어 가는데 소가 새끼를 낳으려 하여 몽둥이로 막 때리며 현북면 법수치리 쇠나드리까지 갔다.
쇠나드리에는 시고모가 살고 있었는데 어미 소는 그 집 마구(외양간)에 들어가자마자 새끼를 낳았다. 그때 어미 소는 새끼를 낳으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하루 밤에 100여리나 되는 거리를 재촉하며 걸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달 후 진동리로 이사를 하여 시아버님이 산속에 움막을 만들어 주어 젊은 사람 들 몇 집과 숨어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중공군이 괭가리를 치며 몇 백 명이 쳐들어 왔다.
그들은 콩과 콩기름을 주로 먹고 지내는데, 먹을 게 모자라니 꼬챙이를 가지고 집집마다 다니며 주위를 찔러 묻어둔 쌀과 감자 옥수수 등 곡식을 찾아 꺼내 갔다. 중공군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으나 손짓발짓으로 통했다.



◆ 얼굴도 보지 못한 남편이 될 사람을 3년 만에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어느 날 풀밭에서 바스락 거려서 가보니 국군이 숨어 있어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 집에 데리고 와서 옥수수밥을 해 주었더니, 잘 먹고 간다며 살아서 이 은혜는 꼭 갚겠다고 하여, 꼭 살아야 한다고 위로에 말을 전해주었다.
어느 때인가 시숙님이 국군이 오자 수고 하십니다. 반갑습니다. 해방은 언제 됩니까? 하고 인사를 하였는데 그 놈이 국군이 아니고 인민군이 국군 옷을 입고 온 것을 알지 못하여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돌아가시는 불행한 일을 겪었다.
나의 남편이 될 사람은 치안대에 들어가서 전쟁터를 다녔는데 어디를 다니고 있는지 모르고 남편 될 사람 얼굴도 못보고 시부모님과 셋이 피란을 다녔다.
나는 이렇게 3년 동안을 살다가 내 나이 19세에 신랑이 와서 결혼식을 올리고는 군인으로 입대하자 나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친정 부모님이 계시는 정암리에 와서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