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동호리 홍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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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50회 작성일 2018-03-0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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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하 (남, 85세, 손양면 동호리)
■ 면담일 : 2015.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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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내기를 하다가 탱크가 처박혔다기에 꺼내주고 왔다.


1950년 6월 25일 우리가 모내기를 하는데 동네 인민위원장이 논에 찾아와 밀양고개에서 탱크가 처박혔는데 인부를 내라고 했다. 모내기 하다가 5명이 가서 탱크를 꺼내주고 왔다. 그러고 보니 마차에 대포도 끌고 가고 인민군이 새까맣게 총을 메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 군 내무서에서 인민군에 나가라고 해서 싫다고 했더니 장작을 무릎에 대고 꿇어앉아 있으라고 해서 하루 종일 있으니 발이 저려서 감각이 없어졌다. 그들은 저녁때 입대하겠다고 하니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양양학교에 오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북한에서는 조국 보위훈련이라 해서 15세부터 손양학교에 모여 모의 수류탄도 만들고 총도 깎아 훈련을 시키기도하였다.



◆ 빨간 딱지 군인과 파란딱지 군인


이튿날 연창 기차정거장에 가니 약 200명 정도 모였다. 기차를 타고 안변에 내리니 날이 밝았다. 학교 운동장에 모이니 부대편성을 한다. 빨간딱지를 한 군인이 와서 줄을 세운다. 나는 파란딱지를 한 사람이 나를 데리고 가서 강원 내무성 1대대로 편성되었다.
편성지에 가니 궤짝에서 독일제 총을 꺼내 지급하면서 기름이 묻은 것을 닦으라했다. 그리고 빨간 딱지를 한 사람은 전쟁터로 간다고 하여 총알을 100발씩 지급받아 간성에 있는 인민군 연대의 빈자리에 배치되어 진부령을 도보로 넘어 양구읍에 가서 근무하였다.
낮에는 숲에서 자고 밤에는 이동, 식사는 민가에 가서 식사를 제공 받는데 마을 인민위원회에 연락을 하면 그 마을에서 쌀, 옥수수, 보리쌀이 섞인 밥을 주었다. 그 때 먹었던 10년 된 된장이라고 하여 먹었는데 그 맛이지금도 기억에 난다.



◆ 포로들은 8명씩 손을 묶어 오줌을 누러 같이 갔다.


우리 2개 소대는 포로병을 양구로 이동시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포로는 약 150명이었다. 그중에는 남한 경찰, 군인, 국회의원, 책임자들, 공무원을 하던 자들이라 했다. 이들을 이천에서 회양 산골로 인솔하여 황해도 금천군 인민학교에 가서 인수하러 온 사람들에게 인계했다. 포로들은 8명씩 손을 묶어 오줌을 누러가도 같이 가야 했다. 이때 중대본부는 산골 절에 주둔해 있었다.
양구에 돌아오니 방송에 인천상륙작전이 있으니 인민군은 북쪽으로 후퇴하라고 나왔다. 후퇴하면서 인민학교 운동장에서 문서들을 태웠다. 소대본부는 양구 읍내 큰 건물에 주둔해 있었는데 다시 원산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 의용군에 잡혀갔다가 도망을 쳤다.


인민군들은 후퇴를 위하여 이동을 하다가 어느 한 고개를 넘게 되면 잠을 자게 되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친구와 둘이 몰래 도망치자고 모의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가 사방을 둘러보니 모두 잠이 들어있었다.
특히 장교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산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래야 사방이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나와 친구는 총과 탄알을 버리고 그냥 뛰었다. 그때 탄띠를 찼던 엉치[방언: 엉덩이 뒤 부위에서 뼈가 만져지는 부위]에는 멍이 들어있었다.
해가 저물고 사방이 어두워지는데 골짜기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방을 살펴가며 집 가까이 가서 보니 노인이 살고 있다.
“너, 웬 사람이냐?”
“예, 저 양양 명지리 사람인데 의용군으로 잡혀왔다가 도망가려는데 도와주세요!”나는 동호리는 북한 땅이어서 순간적으로 외가가 있는 명지리지리를 잘 알고 있어서 둘러 댄 것이다. 노인은 옥수수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여 방으로 들어가니, 그 방에는 통천에 산다는 사람도 와 있었다.
강냉이와 좁쌀이 섞인 밥을 먹고 나니 노인은 인민군 옷을 입고 있으면 잡히니 10월 말 쯤 이라 싸늘한 날씨이긴 하나 배주적삼을 갈아입고 노인이 길을 가르쳐주어 그대로 영을 넘으니 통천이다.



◆ 쌀밥에 쇠고기 국을 먹으니 눈이 번적 떠졌다.


해가 저서 아직 어둡지는 않은데 길거리에서 헌병이 지키고 있었다.
“너, 어디 갔다 와!”
의용군으로 잡혀갔다 옵니다.
고향이 어딘데!
양양 현북면 명지리 인데요.
저기 민가에 가서 자고 내일 와!
라고 하여 민가를 찾아 들어가 자초지종을 말하니 들어오라고 한다. 그리고 소를 잡았다며 쇠고기를 얻어와 쌀밥에 쇠고기 국을 먹으니 눈이 번쩍 떠졌다. 주인은 친절하게도“잡히면 포로가 되어 고생을 할 테니 저 버덩으로 질러가면 양양으로 가는 길이 나와.”하며 안내를 해주었다.
한길에는 군인GMC트럭이 빗발치듯 다녔다. 통천을 걸어 오다보니 빈차가 오고 있어 용기를 내어 손을 번쩍 들으니 묻지도 않고 용케도 세워주어 친구와 둘이 타고 장전을 지나 고성읍에 내렸다. 밤이 되어 민가 집에 들어가니“젊은이들 위험한 시기에 어디 갔다 와!”주인이 물어서 사정을 말하니“고생했구나!”하고 밥도 주고 재워주었다.
아침을 먹은 후 고성 역에서 국군들이 타는 차로 4인이 철로 위로 손으로 지기는 철도 수리용 차를 타고 토성면 사람들과 남쪽으로 내려왔다. 간성읍에서 죽왕면에 들어서는데 국군이 딱 막아서며 조사를 한다.

다른 두 사람을 조사하는 중에 우리 둘이는 눈짓으로 신호를 하여 죽어라고 도망을 쳤다. 뛰어가면서 뒤를 보니 따라 오지 않았다. 청간에 오니 헌병이 또 막아선다.
“야, 너희들 어디 갔다 와!”
“양양 현북면 명지리에 사는데 의용군에 잡혀갔다 도망쳐 가는 중입니다.”하니 가라고 하는데 생각해 보니 또 잡히면 어려울 것 같아 증명서를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헌병은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증명서를 해 주었다.
그 증명서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오니 식구가 다 있었는데 집에서는 죽은 줄 알았다고 하며 반가워했다.



◆ 젊은 강릉 아줌마와 20일간 한방에서 살았지만 아무 탈 없이 지냈다.


집에 와서 약 한 달을 지냈는데 1 ․ 4후퇴로 국군이 인민군에게 밀려 피란을 가야 한다고 했다. 부모님과 동생 5명이 소 질매에 쌀 1가마니를 싣고 현남면 동산과 강릉 경포를 지나 안인에서 자고 눈이 많이 와서 더 가기가 힘이 들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인민군에 갔다 도망 왔으니 잡히면 죽는다. 너는 남쪽으로 더 나가거라.”고 하여 가족과 떨어져 울진까지 가는 동안 이집 저 집을 전전하면서 밥을 몇 술씩 얻어먹으며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피란지에서 구걸생활을 하였다.
국군이 북진하여 묵호에 들어오니 묵호항 부둣가에서 큰 배에 연탄을 싣는 일할 사람을 구한다고 하여 찾아갔다. 하루를 일하면 알랑미(안남미)밥과 국을 주고 쌀 2되씩을 품값으로 주었다.

나는 묵호의 어느 빈집에서 숙식을 하며 살게 되었는데, 마침 강릉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남편은 의용군에 잡혀갔고 3살 된 아기가 있는 20대 후반의 아줌마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줌마는 전쟁 중 피란생활이라 본인에 신변도 보호 받을 수도 있고 겸사겸사 해서 나와 같이 있자고 하여 나는 낮에 일하고 품값으로 받은 쌀을 갔다가 주면 그 아줌마가 밥을 해주어 같이 먹으면서 그럭저럭 한가족처럼 생활을 했다. 아줌마는 아랫목에서 자고 나는 윗목에서 자면서 그렇게 약 20일을 연탄 나르는 일을 하면서 동거도 아닌 동거를 하면서 함께 살았다.
그 당시 피란생활을 하면서 서로 알지도 못하는 남녀가 한 방에서 기거를 하면서 아무 탈이 없이 지내게 된 것은 지긋지긋한 피란생활 속에서 오로지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양양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강릉 시장으로 간다고 했는데 그 후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 총탄을 지고 전쟁터인 대관령을 오르내렸다.


묵호를 떠나 양양으로 들오는 중에 연곡에 산다는 한 아저씨가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그 아저씨와 걸어오다 옥계에서 어떤 기와집에 들어갔다.
주인집 아저씨는 요사이 잘 못하면 국군이 잡으러 오니 저 뒤에 있는 골방에 가서 자라고 한다. 골방에서 한참 잠이 들었는데 노크소리에 일어나니 국군이 짐을 좀 옮기면 되니 따라 오라고 한다.
주인아주머니가“아직 밥도 안 먹었는데 밥이나 먹고 데려가요!”하니 국군이“잠간 가서 도와주면 되니 빨리 갔다 오자”고 한다. 나는 할 수 없이 그 군인을 따라가니 군용 GMC차가 기다리고 있다. 약 20명이 같이 타고 가다가 차에서 내려 보니 대관령 밑 구산국민학교라 했다.
탄알을 지고 대관령으로 가는 일이었다. 중간에 주막집에서 쉬면서 건빵을 1봉 주었다. 입춘인대도 날씨는 춥고 눈이 쌓여 자동차가 가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가 춥다고 하니 누비옷을 내 주어 뜨뜻하게 입고 대관령에 올라가니 정상에는 공병대가 눈보라 치는데 눈구멍을 파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일행 중에 한 사람이 가다가 앉아 쉬었는데 일어나지 못하겠다고 하여 그냥 두고 가니 마음이 아파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때 일어나지 못한 사람을 그냥 두고 간 7명은 그대로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투는 횡계리에서 벌어진다고 했는데, 횡계리에 도착하니 밥과 쇠고기국을 주는데 오랜만에 쇠고깃국을 먹으니 살 것 같았다.
전쟁터에 도착하여 전사한 병사들의 총을 메고 중대본부에 오니 중대본부 상사가 같이 다니자고 하여, 나는 무서워 싫다고 하니 구둣발로 차면서 욕을 하더니 가라고 한다.
그날 구산국민학교 연대본부에서 1박하고 다음날 또 오대산 쪽으로 가라하여 중대본부에서 총알을 지고 가니 철수 명령이 났다고 또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 모이라고 할 때 나는 아파서 못 가겠습니다. 라고 하자 이새기 꾀를 쓴다! 라고 하며 막 패니 할 수 없이 또 가겠습니다. 하고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연곡 중대본부에 가니 국군이 빈집에 가서 벼를 가져다 발 방아[디딜방아]를 찧으라고 해서 그 쌀로 밥을 해 먹었다.
인부들도 군인들과 마찬가지인 위험한 전투 현장으로 총알을 계속 날라다주고 난 다음 전쟁이 뜸 하자 나이든 사람들이 많이 오면 보내준다고하여 그때 도매금으로 풀려났다.
아버지와 헤어진 안인을 찾아가니 모두 모른다고 해서 양양으로 들어오려고 인구에 오니 국군, 미군, 경찰이 합동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여 큰길을 피해서 대치리 명지리 상광정으로 해서 동호리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 어머니는 감자를 심으려고 조 뿌리를 뽑고 계셨는데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