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학포리 박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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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96회 작성일 2018-03-0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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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동 (남, 89세, 손양면 학포리)
■ 면담일 : 2015. 4. 21



◆ 의무장교가 되어 권총을 차고 옛 친구들을 혼을 내다.


일정 때 나의 증조부는 현북면 장리 연하동에 살았는데 후에 손양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학포 집은 조부가 양양의 제1부자 윤규병씨가 지은 집을 매입하여 살았는데 해방되고 북한 당국이 몰수하여 손양면 인민위원회 간판을 기둥에 걸어놓고 북한 정치를 하였다.
1951년 3월 국군이 양양을 탈환했을 때 소위 계급장을 달고 의무장교되어 고향 학포리에 권총을 차고 와서 악질 공산당 짓을 하던 옛 친구, 이○○, 이○○, 박○○ 등 5~6명이 피란가지 않고 있어 그들을 모이게 하고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그냥 보냈다. 나중에 다시 수복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그들은 이미 북으로 가고 없었다.



◆ 연화동을 거처 새벽에 살금살금 38°선을 넘었다.


1945년 8월 해방되고 북한은 토지 5정보 이상 가진 지주는 재산을 몰수하고 일주일 이내에 나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부친은 식량 10일치와 간단한 취사도구를 챙겨 서문리 친척집 좁은 방 1개를 얻어 온 식구가 2~3개월 정도 기거하였다. 식량이 떨어져도 배급품이 많지 않아 대두박을 배급으로 주었다. 동네에서는 우리 집을 밤중까지 감시하고 지키고 있어 나는 공산당을 싫어했다.
나는 당시 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왔는데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38°선이 막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야간에 학포리에서 출발하여 38°선 근처인 장리 연하동 골짜기를 왔다. 그곳에는 인민군과 소련군이 합동으로 보초를 서고 있어서 붙잡히면 죽는다는 공포감 때문에 마음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조마조마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살금살금 기어 38°선을 넘어 월남하였다.



◆ 피란 당시 간부후보생 교육을 받고 장교가 되어 병원에서 근무하였다.


당시 주문진에는 고모부가 동제병원을 하고 있어 거기서 1년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도청 지적계장을 지내셨는데 수산에서 배를 타고 월남하였다. 할아버지는 글을 잘하여 인제에서 교사를 하다가 손양, 현북 면장을 20여 년간 하셨고 나중에 양양명륜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그 후 6 ․ 25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젊은이들이 부산으로 피란을 갔는데 당시 19세인 나도 군인으로 잡아갔다. 그러나 그때 군대에 입영된 자들 중에는 배운 사람이 많지 않아 19세 입대한 나는 장교가 되는 간부 후보생으로 2개월 동안 교육을 받고 소위계급을 달고 병원에 근무하게 되었다. 다른 동기들은 전선에 배속되어 전투 중에 사망하기도 하였다.
군정시기에 접어들자 제1군단에서는 1951년 8월 18일 박종승씨를 민정관으로 임명하고, 부친이신 박증길 씨를 부군수로 임명하여 군정을 하고 1954년 민정이 이양되고 내무과장을 하였다. 나는 춘천에서 약종상 자격시험을 보았는데 합격하여 한 때 양양시내에서 관동약국을 운영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