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오색리 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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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54회 작성일 2018-03-0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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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식 (남, 74세 서면 오색리) 전 오색초등학교 교장
■ 면담일 : 2015. 4. 9


이글은 이정식씨가 유년시절 부모님들에게 들은 내용(이야기)을 바탕으로 작성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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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을 똑같이 살게 해준다는 선전을 믿고 열심히 업무에 충실하였다.


당시 서면 수상리에 살았었는데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후 원치 않은 38°선이 생겨 우리국민은 남북으로 갈려 지자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야하는 운명을 갖게 된 것이다.
이곳 양양은 38°선을 경계로 한 지역은 공산치하에서 또 다른 지역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게 되는 운명을 가졌으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생각도 해보지 못하고 어떤 것인지도 몰랐던 그 당시,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모든 인민을 똑같이 살게 해준다는 선전을 믿고 열심히 업무에 충실하였다.
그 당시 아버지(이영운, 당시 31세)께서는 면사무소 창고관리 업무를 맡아보고 계셨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인민은 모두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선전과 함께 그때 당시 잘 살고 있는 지주들이 소유하고 있는 좋은 물건들을 면사무소의 창고에 압수하여 갖다놓기도 하였지만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공산당원들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업무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무서원이나 공산당간부들이 열쇠를 달라기에 무심코 주곤 하였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창고에 있는 좋은 물건들을 자신들의 집으로 갖고 가서 없어지기에 모든 인민이 잘 살 수 있게 하여 준다는 선전과는 다른 행동들을 하기에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갖고 있는 북한 실정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랐기에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많은 우마차가 상평국민학교의 운동장에 집결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마을의 주변 환경이 차츰 변하더니 마을에 인민군들의 숫자가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상평국민학교도 인민군들이 차지하였고 마을의 주민들도 모두 이주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라 하였으나 막상 어디로든지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이웃 마을에 있는 친척에게 더부살이로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우리 집은 친척들과 함께 서선리 안경다리 앞마을로 집단 이주하여 빈 기와집이 있어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곳 양양의 철광산은 일본시대부터 한국에서 자철광이 제일 많이 나는 광산이라 일제가 철을 케어 원산으로 실어 날랐다. 우리가 이주한 서선리는 집 윗 쪽에 철길이 있어 우리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철을 구해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에 놓으면 납작하게 되어 장난감을 만들어 썼고, 기차가 언제 오는 지는 철길에 귀를 대고 있으면 기차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고 가까이 오면 철길에서 멀리 달아나는 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상평리와 서선리 사이에는 매일 원산에서 오는 기차에 우마차와 인민군들 그리고 무기들을 하루가 멀다하게 실어 날랐다. 길가에는 죽은 말이 널려 있어 개들이 죽은 말을 뜯어 먹는 현장을 보면서 자랐고, 많은 우마차가 상평국민학교의 운동장에 집결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그때는 그런 상황이 어떤 일인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6 ․ 25남침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간에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는 논란은 어디에서 발단이 되어 나왔는지 대부분 아시는 분들은 다 알 줄로 사료된다.
그때 이곳 38°선 이북에서 살고 있었던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라는 어린이들이나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 좁쌀 한 꼬투리 중 제일 잘된 해를 기준으로 계산하여 현물세를 부과


제가 어려서 세상물정을 몰랐을 때는 남과 북의 관계를 모르고 지났으나 철이 들면서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서 북한 실정을 할머니와 어머니께 들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중 ․ 고등학교에 다니면서이다.

해방 후 북한은 현물세를 공출할 때는 농사지은 곡식의 낱알을 세어 한꼬투리의 평균을 내어 평당 얼마를 생산했는지 계산하여 제일 잘된 해의 수확량으로 현물세를 공출하였다고 한다.
좁쌀 농사를 지었으면 좁쌀 한 꼬투리 중 제일 잘된 해(년도)를 기준으로 계산하여 현물세를 부과하여 수확한 곡식으로 현물세를 공출하는 정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면 수확한 곡식의 삼분의 이 이상을 현물세를 내어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거기에다 월남을 한집에는 반동분자라는 팻말이 붙어 온갖 어려움을 덤으로 주었다고 하니, 그 핍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마을에 큰 소동이 일어나는 때가 종종 있었는데 저의 기억으로는 조용하던 마을에“저놈 잡아라.”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그때의 북한 노동당 청년들이 손에 큰 대나무로 만든 죽창을 들고 도망을 하는 청년을 붙잡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광경을 보곤 하였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나 모든 일에 궁금한 것이 많았던 때라 그 광경을 눈으로 보곤 하였으나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6 ․ 25가 끝나고 중 ․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그 당시 강릉을 중심으로 애국청년들이 38°선을 넘어 북한 땅에 가서 정보를 얻어오거나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다가 붙잡혀 죽은 애국청년들이 많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내무서원들이 아버지께 총을 쏘았으나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950년 이른 봄 아버지께서 대낮에 월남을 하게 되었다.
당시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아버지께서 내무서원의 감시 하에 아랫마을 수상리에서 윗마을 상평리로 이송도중 아버지께서는 두 내무서원들에게 “이보게들 잠간만!”하면서 작은 논두렁을 건너뛰어 윗마을의 뒷산을 향해 달음질 하였던 것이다. 그때 마을의 작은 길에서 뒷산까지의 거리는 약 100여 미터의 거리였다.
두 내무서원은 갑작스런 일을 당하자“여보게! 여보게!”하면서도 아버지 뒤를 쫒지 않고 윗마을에 세워둔 차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어 총을 갖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총을 가지러 뛰어갔고, 아버지께서는 온힘을 다해 산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마라톤 대회에서 상을 탈 정도로 달리기를 잘하여 윗마을로 달려가는 내무서원들의 거리와 산을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와의 거리 차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저는 7살로 아버지가 근무하는 면사무소에 점심때만 되면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와서 점심식사를 한 후 근무를 하였는데, 그날도 예전과 같이 아버지를 모시러 갔으나 아버지는 그냥 혼자 가라고 하기에 울면서 집에 오니 어머니께서 왜 혼자 오느냐고 하기에 아버지께서 바쁜 일이 있으니 혼자가라고 해서 왔다고 하였다.
그때의 상황은 6 ․ 25를 일으키기 위해 젊은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잡아갔고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근무하였기에 제일 나중에 붙들어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 정보를 알아차린 마을의 젊은 아버지 친구들은 아침 일찍 월남을 하기위해 남쪽인 강릉군 신서면 영덕 쪽으로 탈주를 결심했던 것이다.
윗마을 뒷산을 향해 달리고 있던 아버지가 산 중턱쯤에 갔을 때 자동차에 있던 총을 갖고 쏘았으나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해 무난히 산을 넘어 남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갈 수도 있었으나 인민군이 길에 지키고 있을것 같아 힘든 길일지라도 산으로만 갈 수 밖에 없었다. 밤이 어두워지면서 허기를 느꼈으나 어쩔 수 없이 평소 알고 있는 삼팔선 경계인 영덕을 향해 계속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밤중이 넘어서야 영덕 38°선 경계까지 갈 수 있었으나 어디로 넘어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소련병사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 넘어갈 위치를 여기 저기 찾고 있는데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 아버지는 소리가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다행히 먼저 탈주한 친구들 있어 반가이 맞아주며 그 친구들은 우리 아버지가 고생을 하면서 늦게 왔고 우리는 편하게 이곳까지 왔으니 아버지를 먼저 삼팔선을 넘으라기에 안전한 곳을 찾아 먼저 넘었고 이어서 친구 셋이서 무난히 삼팔선을 넘어 서림까지 월남을 할 수 있었고, 그 후 아버지께서는 강릉군청에서 근무하셨다.



◆ 자아비판이라는 명목으로 노역이나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게 만들었다.


아버지께서 월남한 사건으로 인한 어머님과 할머니께서는 갖은 고충을 다 겪으셨다고 한다.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모든 상황을 알지 못했으나 6 ․ 25가 끝난 후 철이 들면서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알려주어 알게 되었다.
내무서원들은 밤이 되면 집 주위를 감시하며 아버지께서 우리 가족과 내통을 하거나 남한으로 데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서면서 알게 모르게 고통을 준 것은 이루 말 할 수 없다고 한다.
저녁마다 학습이라는 미명아래 마을 사람들을 매일 한데 모아 공산주의 이론을 주입시키거나 5인 1조로 하여 서로 잘못을 감시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공산당에 벗어나는 일을 할 때에는 자아비판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노역이나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6 ․ 25전쟁이 발발한 후 철모르던 시절 우리는 서선리에 살고 있으면서 유엔의 참전군들이 이곳 양양철광에 있는 변전소를 향해 비행기로 폭탄을 퍼붓는 광경을 불과 1km되지 않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경험을 가졌었다.

그때는 여름이라 보리가 자라고 있어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구경하려면 그때는 방공호가 없어 철길의 배수로로 들어오라고 야단들이었다.
그 당시의 어르신들의 이야기로는 비행기는 직접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으나 배에서 쏘는 함포는 언제 어디로 떨어지는지를 알 수 없어 제일 무서운 폭탄이라고 말씀들 하셨다. 그런 상황에서도 같이 살고있던 마을에서 다치거나 사망한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 친구 하나가 비행기 포격을 구경하려고 들어갔던 배수로가 무너지면서 깔려 지금까지도 목소리가 변성이 된 것 외에는 없었다.



◆ 오늘에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진실 된 교육을 해야 한다.


이곳 양양은 38이북이라 전쟁 당시에는 꼼짝없이 그대로 있었으나 다행히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한군이 후퇴할 때 공산주의가 싫거나 고충을 받은 가족은 1 ․ 4후퇴를 계기로 남쪽으로 피란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우리 가족은 제일 먼저 친척들과 함께 현남면 북분리까지 우차를 이용하여 북분리에 작은집 외가 집이 있어 할머니는 먼 거리까지 피란을 할 수 없으셔서 이곳에 할머니를 모셔두고 어머니를 비롯한 삼형제와 누님은 강릉까지 걸어서 피란을 하였다.
강릉에서는 아버지께서 강릉군청에 근무하셨으므로 얼마동안은 편하게 그곳에서 피란생활을 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더 피란을 가야하는 형편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강릉에 두고 삼척을 거쳐 울진까지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나이로 걸어서 피란길에 오른 것이다. 피란길에 온갖 어려움이 있었던 사실을 직접 경험하였거나 이야기를 들어 안 사실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아쉬움이 뒤 따른다.
6 ․ 25가 끝나고 휴전협정을 하면서 미처 북한으로 퇴각하지 못한 북한괴뢰들을 퇴치하기 위해 우리 남한의 청년들은 산속에 숨어있던 잔당을 소멸하였다.
한때 서면사무소 서림분소에 아버지께서 근무하고 계셔서 누님과 저는 토요일마다 아버지께 다녀오곤 하였는데 우리 남한 청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산속에 숨어있는 북한 괴뢰군을 죽여 가마니에 싸서 들것에 메고 마을 가운데에 늘어놓은 것을 몇 번이고 본 사실이 있다.
저희 세대는 해방 전에 태어나 6 ․ 25를 거쳐 어수선했던 시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지나면서 옛 일을 되돌아보면 위정자들이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함은 물론 모든 국민은 나라사랑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선배들이 몸소 겪은 경험이 오늘에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진실 된 교육을 통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으뜸이 되는 나라를 만드는데 온갖 노력과 힘을 들여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