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석교리 김주혁

페이지 정보

조회 1,137회 작성일 2018-02-22 16:33

본문

■ 김주혁 (남, 87세, 강현면 석교리) 양양군노인회장
■ 면담일 : 2015. 8. 27


327.jpg




◆ 간곡리 뒷산에 방공호를 파고 가족이 함께 피신했다.


1950. 6 ․ 25전쟁 당시 18세였다. 해방되던 해에 회룡인민학교 5학년 2학기에 편입하여 동생과 같이 다녔다. 담임은 적은리 장홍란 선생님인데 나보다 2살이 많았다. 졸업시험은 답안지에 쓰는 게 아니고 문제를 제비로 뽑아 그 문제를 구두로 대답하는 시험인데 나는 최우등을 했다.
그래서 강현중학교에 무시험 합격하여 다녔는데 나보다 2~3년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팔에 4줄이 간 빨간 완장을 차고 급장 노릇을 했다.
그때 간부들은 벽보주필과 무슨 책임을 맡으면 줄이 있는 완장을 찼다.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학교에 가니 선생님이 인민군이 남조선을 해방시키려고 남조선으로 처내려갔다고 선전했다. 하루는 학교에 갔는데 낙산역(洛山驛:강현면 정암리 현 코레일연수원 자리)에 말을 먹이는 마초가리가 쌓여 있었는데 비행기가 폭격을 하여 화염에 쌓였다. 비행기 폭격이 점점 심하니 학교 가지 않고 간곡리 뒷산에 방공호를 파고 가족이 함께 피신했다.



◆ 나는 할아버지의 기막힌 지혜로 인민군대 입대를 모면하다.


전쟁이 심해지니 인민군대를 가라고 독려를 했다. 하루는 증조부께서 할아버지를 부르시더니“너 산에 가서 옷 나무를 베어오너라”하신다. 그때 증조부는 수염을 길게 기르시고 매일 하얀 버선을 갈아 신으시고 책만 읽으시는 선비이시었고 산신령처럼 하고 위엄을 보이셨다.
증조부는 그 옷 나무를 낫으로 척척 베어 화롯불에 올려놓고 옷 나무에 진이 나오면 그것을 내 온몸에 발라주셨다. 옷이 많이 올라야 인민군에 못가게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옷이 오르지 않았다. 증조부는 다시 사랑방으로 부르시더니 이불 꿰매는 돗바늘을 가지고 손등과 손가락사이 그리고 몸을 바늘로 침놓듯 찌르더니 옷 나무진을 발라주셨지만 그래도 옷이 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집 뒤 묘 둥지에 나는 할미꽃을 뿌리 체 캐어서 절구에 찧어 온몸에 바르고 광목천으로 처매 놓으니 아주 따가 왔다. 하루 밤을 지나니 살이 부풀어 올랐다. 그것을 바늘로 따니 진물이 나와 흔디[부스럼,상처딱지]가 되었다. 그리고 팔을 부러졌다고 끈으로 팔을 걸어 매고, 다리도 그렇게 해서 흔디를 만들었다.
얼마 후 인민군이 와서 군대에 나가라고 오자 증조부가“이봐 증손자가 옴에 올라 고생을 하고 있으니 데려갈 생각을 말어! 이리 와 봐.”하며 담뱃대로 내 배를 치켜 올리니 인민군이 흉측한 내 몸을 보고는 바로 돌아가곤 했다.
옷이 다 나으니 이번에 나를 사랑방으로 불러 몸을 바늘로 찔러 피가 나오게 하고 양잿물 병에 짚 꼬갱이(고갱이)를 담가놓았다가 묻히면 따가웠다. 한참 있으면 부풀어 오르고 흔디가 되어 흉측스러웠다.



◆ 인민군 이였던 당숙과 함께 여우 골 토굴에서 살아남았다.


5촌 당숙은 전쟁이 나자 인민군에 입대하여 낙동강까지 갔다가 용케 살아서 후퇴할 때 패잔병으로 돌아와 간곡리 집에 와서는 숨어서 가지 않자, 증조부께서는 당숙을 불러“너 주혁이 하고 여우 밭골에 가서 숨어 지내라.”고 하셨다. 여우밭골은 간곡리 뒷산인데 앞에 도랑이 있고 물이 흐르는데 여우가 자주 나타나 울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사람들이 으스스하여 잘 가지 않는 골짜기이다.
연기를 피우고 밥은 해 먹을 수 없어 백설기를 쪄서 망태에 지고 여우골에 가서 바위 밑에 굴을 파고 숨어 살았다. 밤에는 동네 사람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집에 내려와 옷가지며 먹을 것을 가지고 올라갔다. 이렇게 증조부의 기지로 나는 인민군과 국군의 노무자로 잡혀 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 함포 파편에 맞아 등에 업힌 아이는 죽고 마구간 소 눈에 파편이 박히다.


비행기가 연일 폭격을 심하게 하니 일상생활이 안 되고 굴속에 살수 밖에 없었다. 비행기가 비스듬히 날아가면 배 쪽은 안전하다고 뛰어다니다 기고나면 포사격을 해도 용케도 맞지 않고 무사했고 특히 함포사격도 무서웠다.
1950년 가을 할아버지가 볏짚으로 이엉을 엮고 계셨는데 아랫집 순이가 조카를 업고 놀러와 구경했고 고성에서 고종사촌들이 와있었는데 역시 이엉 엮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마당 텃밭에 함포폭탄이 떨어져 모두 혼비백산이 되었다. 진정되고 보니 업힌 아기가 파편이 귀 부분을 관통하여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었고 또 마구간에 매어놓은 소의 눈에 정통으로 파편이 맞는 일도 있었다.



◆ 나를 아껴주시던 장홍란 담임선생님은 북으로 피란 후 돌아오지 않았다.


국군의 반격으로 모두 북쪽으로 피란을 갈 때였다. 나를 아껴주시던 회룡인민학교 장홍란 담임선생님이 피란을 가자고 오셨는데 하얀 행주치마를 뒤집어쓰고 오셨다. 그 때는 비행기 공습이 심하였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증조부께서 절대 못가게 말리셨다. 할 수없이 선생님만 북쪽으로 피란을 떠나셨는데 그 후 선생님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려고 소에 짐을 실었는데 새끼를 낳은 어미소가 가려고 하지 않고 울고 송아지도 나오지 않고 음매 ~음매~ 하며 울고 있으니 작은 할아버지가 마구에 들어가서 송아지를 쇠스랑으로 때려죽이고 떠났다. 그러자 어미 소가 젖이 뿔고 울어대니까 헝겊으로 입을 싸매고 울지 못하게 하고 끌고 갔다.
소의 울음소리가 멀리까지 들리면 군인들이 달려와 잡아갈까봐 그렇게 한 것이다. 증조부께서는“나는 죽어도 집에서 죽을 테니 너희들이나 가거라”하시어 우리들만 떠나게 되었다.
피란길은 석교리에서 물갑리와 사교리를 지나서 금풍리 골짜기까지 왔을 때 식구들이 회의를 했다.‘증조부도 집에 계시고 이 많은 식구들이 어떻게 멀리 가겠어.’가지 말고 금풍리 골짜기로 들어가자고 하셨다. 깊은 골짜기는 아닌데 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었는데 그 골짜기를 흔 집 골이라 했다.
할아버지 삼형제가 헝겊으로 움막을 치고 살았다. 할아버지는 매일 간곡리 집에 계시는 증조부에게 가서 밥을 해드리고 오셨다. 한 달 가량을 그렇게 지내다 집으로 돌아오니 마을 사람들이 이미 돌아와 살고 있었다.



◆ 태극기를 걸었다가 인민군 패잔병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1950년 10월 국군이 양양을 지나 고성까지 올라갔는데 아직 인민군 패잔병들은 산악지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둔전리 추교춘 부친은 문종이에 양푼을 엎어놓고 태극기를 그려서 대나무 가지에 걸어 마당에 게양하여 놓았다.

그러자 산에 있던 인민군들이 내려와 그 아저씨를 나오라고 하여 데리고 간곡리 뒷산을 지나 회룡리로 갔다. 얼마 후 사람들이 찾아가니 인사불성이고 똥을 싸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어 업고 내려와 간호를 했지만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후 사망하였다.



◆ 인민군패잔병을 소탕하려고 둔전리에 백골부대가 주둔했었다.


백골부대 대원들이 둔전리에 주둔했다. 이는 둔전리가 설악산으로 통하는 길목이고 또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산속에 은거하며 빨갱이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동네 사람들을 동사로 모이라고 하고는 빨갱이들이 산에서 내려오면 어떻게 하라는 주의 사항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온 마을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온몸에 헌디가 아물지 않았고 팔도 부러졌다고 매고 있을 때라 증조부가 가지 못하게 했다.
얼마 후 대원들이 우리 집에 와서 방문을 열어 젖혔다. 증조부는 산신령같은 풍채로 앉아계셨다. 그들은“저 아이는 무어요?”하면서 퉁명스럽게 말을 하자, 증조부께서는“좋은 약이 있으면 약을 좀 주시게! 들어오게.”하자

그 군인이 군화를 신어 머뭇거리자“신발 자국은 닦으면 되지, 어서 들어오시게”하고는 담배 대로 내 옷을 들어 보이며“가까이 오지 말구 멀리서 보게, 나야 옴이 오르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옮기면 어쩌나. 물러서서 보고 좋은 약이 있으면 주게.”하니 그 군인은 흉측한 내 몸을 보고는 그냥 도망가듯 갔다. 그날 그들은 부대 취사장 일이 바쁘다고 동네 아가씨 3명을 데려가서 일을 시키고 며칠 후에 돌려보내주었다.



◆ 적색분자를 마을에 주둔한 부대에 밀고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밀고 밀리는 상황이 전개될 때 ○○○씨는 마을을 다니며“피란가지 말고 기다려라! 조금만 참으면 이북에서 사람이 나와 좋은 세상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을 어떤 사람이 간곡리 최은실 집에 와 있던 국군 백골부대 정보과에 알렸다.
정보과 대원들이 ○○○씨를 불러 말을 물어보더니 어디론지 데리고 갔다. 부대가 이동해 간 후 마을 청년이 나무하러 산에 갔더니 마른 솔가지가 있어 가까이 가니 솔가지 밑에 시신이 있어 마을에 알려 동네 사람들이 올라가 장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