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서림리 이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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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78회 작성일 2018-03-0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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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춘우 (남, 91세, 서면 서림리)
■ 면담일 : 2017.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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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문진에 가서 장을 보고 등짐을 지고 벽실령을 넘었다.


8 ․ 15해방 후 서림은 38°선이 영덕을 지나갔기 때문에 아랫마을인 영덕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 때는 서림, 황이, 갈천, 명개, 조개리가 강릉군 신서면으로 속해 있어서 벽실령을 넘어 주문진을 다니며 어성전까지 쌀이나 생필품을 차로 싣고 와서 서림까지는 등짐으로 지고 왔다.
영덕 38°선에는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마주보고 지키고 있었는데, 인민군은 높은 봉우리에 있고 국군은 아래쪽인 냇가에 주둔해 있었다. 이남지역인 서림동내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순경과 특공대원들이 한조가 되어 잠복근무를 하는데 그 당시 신서면장 처남이 인민군에게 잡혀갔고 같이 근무 중이던 청년은 아래로 굴러 떨어져 겨우 살아 도망을 오기도 하는 일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그날도 경찰과 한청[대한청년단:16세부터 청년들이 가입]이 경계 근무를 하고 교대하고 와서 자는데 새벽 4시 38°선에서 총소리가 나기에 한청 대원들이 출동하여 가보니 벌써 서림리까지 인민군이 와서 할 수 없이 도망쳤다. 그때 인민군은 숫자도 많았고 아군은 경찰만 총이 있었고 한청은 무기도 없는 맨손이었다.



◆ 함경북도 덕천까지 북진을 했다.


집에 와서 빨리 피란가자고 소리치자 가족들은 발 방아로 곡식을 찧다가 그냥 두고 부모님과 여동생과 함께 피란을 가는데 인민군들이 피란민에게 무자비하게 총질을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군인과 함께 가고 가족은 가족대로 피란을 나갔다.
나는 총알과 밥을 짊어지고 군인들 따라가다가 군인이 총에 맞아 죽으면 그 옷을 그냥 입고 계급도 그냥 달고 총도 들고 전쟁에 참여했다.
인민군에게 밀려 경상도 암양면에 까지 내려가서 대구에서 군번을 받고 7사단 3연대 2중대로 배속을 받아 대구서부터는 북진을 시작해서 북한 평양을 지나 백두산을 향하여 함경북도 덕천까지 북진했는데 중공군이 산속에 숨어있다 나오는 줄 몰랐다. 중공군은 앞사람이 죽으면 그 뒤에 다음 군인이 나오고 또 죽으면 다음 사람이 나서고 죽 여도 죽여도 나오니 어떻게 하지 못했다.



◆ 중대병력 130명중 장교 2명과 사병 5명만 살아 나왔다.


그러다 중공군이 포위작전을 감행하려고 사방에서 피리를 불고 총소리가 다가오는데 어찌할 수 없었다. 시체는 여기저기 널려있고 신병들이 대부분이라 총을 쏘아도 잘 맞지 않았고 그 중에서 어떤 신병들은 M 1총 8발을 다 쏘면“선임하사님 총이 망가졌어요!”하면서 총을 다룰 줄 모르는 군인도 많았다. 전쟁이 한창인데 총알 장전해 줄 겨를이 어디 있는가?
제대로 군인 교육을 시키지 못하고 전쟁에 임했기 때문이다.
전투상황이 악화되자 종전에는 모두들 멋대로 뿔뿔이 헤쳐졌고 몸에 지고 있던 쌀을 한 움 쿰 씩 먹어가다가 무거운 총을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총을 버리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아 무거워도 총과 수류탄은 버리지 않았다.
쌀이 떨어져 풀, 나무껍질을 먹으며 3일을 굶으면서 후방인 개성까지 와 보니 중대병력 130여 명 중 장교 2명과 사병은 5명뿐만 살아서 나왔고 나머지는 모두 죽은 모양이다.



◆ 가칠봉 전투가 끝나고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개성에서 인원을 보충 받아 전투에 임했지만 다시 후퇴하여 강원도 인제 기린 현리 전투에서 또 포위되어 부상을 당하여 홍천 야전병원에 후송되었다가 대구 27육군 병원에서 입원 완치되어 부산 보충대에서 3사단 18연대(백골부대)에 배치되어 일등중사가 되었다가 전쟁 중에 소대장이 전사하자 소대장 역할도 했다.
1951년 양양에 입성하였다. 그때 양양은 전체가 불타서 잿더미만 보였다. 오색리에서 배치되어 경계근무를 하다가 양구로 이동하였을 때 가칠봉 전투가 벌어졌는데 우리가 공격하여 탈환하면 밤에는 인민군에 기습을 당하여 빼앗겨서 후퇴를 하고 3번씩이나 점령을 했다가 후퇴하기를 수차례 되풀이하였다. 그때 마다 많은 전
우들이 죽어갔지만 적군과 아군의 가칠봉 전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번은 우리 분대 원 9명이 해질 무렵에 수색을 나갔다가 아침에 돌아오는데 인민군들도 피곤에 겹쳤는지 보초병이 졸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순간적으로 재빠르게 총을 빼앗으니 순순히 따라와 부대에서 조사를 마치고 2명을 포로로 잡아 휴양소로 보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가칠봉 전투가 끝난 후 나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많은 전우들이 희생되었지만 나는 살아서 나온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6 ․ 25전쟁 전 서림리는 청년들이 40~50명 정도 있었는데 전쟁 후 살아남은 청년들은 불과 몇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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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국영웅기장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