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서림리 김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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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57회 작성일 2018-03-0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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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제 (남, 86세, 서면 서림리)
■ 면담일 : 2017.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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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에 3번씩 정족산 초소에 밥을 져 날랐다.


일제강점기시대에 일본사람들이 우리 동네 앞산 깊은 골짜기에 산판을 차려놓고 굵은 소나무를 비어다가 우리 마을 바로 앞산 중턱에 솔개미 차를 만들어 마을 가운데 터로 떨어지게 하고 그 자리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나무를 캐서 일본으로 실어 내갔다.
1945년 해방이 되어 38°선이 그어지자 서림과 영덕사이에 초소를 지어놓고 인민군과 국군이 서로 지키고 있었고 제재소를 하던 자리에 국군 중대본부가 있었다.
그때 국군은 강릉 8사단 예하 1개 독립중대가 15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지역이 워낙 넓어 군인 수가 모자라서 서림, 갈천, 명개 청년 72명이 특공대[대한청년단]를 조직하여 초소에 나가서 군인들과 같이 경계도 서고 호 구덩이를 파는 일도하고 군인들에게 밥을 날라다 주는 일도 했다.
군인은 각 지역에 파견 경계(정족산, 37고지, 서북고지, 반평초소, 후방고지)를 나가고 본부에는 군인이 몇 명만 남아 같이 근무를 섰고, 취사반이 있어서 마을 어머니들은 그들을 밥해주는 일을 맡아했다.
밥은 보통 하루에 3번씩 해서 각 초소에 먼 거리는 1시간 30분 가까운 거리는 10분 동안 밥을 져 날랐는데, 정족산(1개 분대 9명) 1시간 30분, 반평초소(4~5명) 1시간, 37고지(4~5명) 30분, 서북고지(4~5명) 30분, 후방고지(4~5명) 10분이나 소요되었다. 정족산은 1개 분대 병력인 9명이 파견 근무를 하여 2명이 밥을 져 날랐고 나머지초소는 1명이 밥을 배달했다.



◆ 6 ․ 25전쟁이 일어나던 날 인민군들이 신작로에 4열종대로 내려왔다.


6 ․ 25가 일어나던 날 새벽 4시경 우리 집 앞 버덩에 폭탄이 쾅하고 떨어졌다. 당시 중대에서는 GMC에 항상 실탄과 장비 등을 미리 실어놓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어제 보초를 서고 집에 와 자다가 새벽에 어머니가 식사 당번이라 밥을 하러나가 시기에 어머니를 도와주려고 나가니 인민군들이 신작로에 4열종대로 총도 쏘지 않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인민군인지 멋모르고 구경했다.
그 사람들이 쭉 내려오다가 GMC가 세워져있는 중대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운전기사는 그때서야 그 들이 인민군인지 알고는 깜짝 놀라 차 뒤로해서 도망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밥 이구 뭐 이구 다 그만두고 식당 뒤로해서 집으로 돌아오셨고 병석중인 아버지는 내가업고 어머니와 형님 그리고 동생과 함께 어미 소 1마리와 새끼 송아지 2마리를 끌고 피란길에 올랐다.
피란을 가는 중에도 청년들에게 입대를 권하고 있어 형과 나에게 입대하라고 하였으나, 나는 병이든 아버지를 보여주며 사정하여 아버지를 모시게 되었고 그때 형님은 8사단을 따라 다니다가 입대를 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형님은 후에 전사를 하고 말았다.



◆ 사람들은 배에 타고 소는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넜다.


구룡령을 넘어 청도 광운국민학교에서 1박하고 나니 서석 운두령에서 전투가 벌어져 아군과 인민군들이 교전하는 틈을 타서 장평, 제천, 단양 따바리굴[또아리굴:죽령 대강터널]을 지나 단양에오니 단양 마나강을 건너야 되는데 소를 배에 태워주지 않아 사람들은 배를 타고 소는 헤엄을 쳐서 강을 건너기도 했다.
안동역전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의 폭격을 맞기도 하였는데 그 폭격은 호주비행기가 오폭을 했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힘든 피란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먹을 것도 떨어지고 소도 키우기가 어려워지자 안동에서 송아지 한 마리를 1만원에, 남은 송아지마저 1만 5천원에 팔아 쌀을 사서 밥을 해먹으며 피란생활을 했다.
영천에서는 밤이 되자 사과밭주위에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군비행기가 주위를 비행기가 빙빙 돌고 나더니 새벽녘에 꽝 하고 소리가 난지 얼마 후 온 천지가 불바다가 되어 아침에 보니 많은 인민군 시체가 뒹굴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후 나는 소를 키우기가 힘들어 경산에 있는 과수원 주인에게 큰 소를 8만원에 팔았는데, 그때 쌀 1되에 100원정도 이니 쌀이 여덟 가마니 값이라 그렇게 큰돈을 만지니 걱정이 하나도 없었다.
대구에서 북진을 한다고 하여 아버지를 업고는 힘이 들어 도저히 양양까지 올 수 없자 경주에서 1박을 하고 포항에 들어왔는데 그때 포항은 폭격으로 잘락 녹아서 매랜도 없었다.
우리는 포항 부두가로 가서 군인 배를 타고 강구, 죽변을 거쳐 강릉 정동진으로 왔다가 다시 주문진으로 들어와 벽실령을 넘어 서림 집으로 들어오니 부친이 소를 다 팔고 없으니 소를 사자고 해서 피란을 나가지 않았던 이웃 오랍들사람들 집의 송아지를 3만원을 주고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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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제씨 호국영웅기장증〉



◆ 박격포탄 5개를 지고 하루에 대청봉을 3번씩 오르내렸다.


그러다가 동짓달이 되자 2차 피란인 1 ․ 4후퇴 때 또 부친을 업고 송아지를 끌고 나가는데 벽실령이 어떻게 미끄러운지 어쩔 수없이 송아지를 내버리고 면옥치 옥수수가리 속에서 1박을 하고 어성전 명주사 쪽에 있는 망령제를 넘어 달래(월천)로 해서 주문진에 나갔다.
나는 인민군이 내 미는 상황에서 아버지를 업고는 도저히 빨리 피란을 갈수가 없게 되자 아버지는 나를 보고 너만이라도 살아야 되니 너는 빨리 남으로 내려가라고 하여 주문진에 있는 방공호에 가족을 남겨두고 울진까지 나가서 피란생활을 얼마동안 하다가 국군이 다시 북진을 할 때 주문진에 와서 아버님을 만나게 되었다.
하루는 아침에 부모님께 생선반찬이라도 해 드리려고 바닷가에 나갔다가 군인에게 잡혀가게 되자 나는 부모님의 사정을 이야기해도 들어주지 않자 나는 군인 가는 것은 좋은데 부모님 얼굴이나 보고 가겠다고 하여 군인과 함께 부모님이 계시는 곳까지 와서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하고 군인을 따라 갔다.
그 군인을 따라가 보니 수도사단 기갑연대로 주둔지는 양양 월리였다.
군인들은 나를 트럭에 싣고 오색 가재골에오니 거기는 하마(벌써) 취사반이 있어 주먹밥을 받고 80mm 박격포탄을 5개씩 지고 대청봉으로 지고 세번을 오르내렸다.
그때 나는 옷이 다 떨어져 맨살이 나오게 되자 미군 바지를 주는데 얼마나 큰지 아주 헐렁하게 입고 다녔는데 이때 같은 마을 김경춘, 이형섭 그리고 3대대소속인 이대영도 같이 짐꾼으로 대청봉을 오르내렸는데 나는 당시 거기서 제일 젊고 어렸으니 쑈리로 있을 수 없느냐? 하니 그래 그럼 너는 2대대 미 고문관 쑈리를 하라고 하여 고문관 배낭을 지고 따라다니게 되자 조금은 편해졌다.



◆ 미 고문관 쑈리를 하는 바람에 살아나왔다.


이때 국군이 주둔한 지역으로 쌍다리 비행기가 보급품을 떨구어 주는데 바람이 불면 양식인 건빵 등 가벼운 것은 날아가 인민군주둔지역에 떨어지고 아군 쪽으로는 실탄만 떨어져 밥을 굶게 되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밤에 인민군에게 포위되었는데 총소리가 요란하고 수류탄 폭음도 들렸는데 나는 고문관을 따라 한발자국을 옮길 때 마다 수류탄을 까던지면서 오색으로 내려왔고 부대는 풍비박산이 되었지만 나는 쑈리로 있는 바람에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때 같은 마을의 이대영이는 인민군 포로가 되었다. 제1집결 장소는 월리였는데 같은 마을 이형섭이는 취사반 화목을 하러갔다가 지뢰가 터져 등뼈가 나간 것을 단가에 실려 취사반에 모포가 덥혀 눕혀있는 것을 보았다.
전쟁이 끝난 후 형섭이가 죽은 것을 나밖에 모르니 애까지 있는 형섭이 부인에게 내가 형섭이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어 형섭이 부인에게 개가하도록 말해주었고, 3대대 이대영이는 인민군에게 끌려 다니다가 나중에 도망을 나왔다고 했다.
제1집결지에서 다시 후퇴하여 제2집결지인 강릉 구산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부대가 대관령으로 올라가는데 밤중이라 GMC가 저속으로 이동하는 틈을 타서 애이라 모르겠다하고 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그때 나는 현역 군인도 아니니 내 하나가 없어진다고 해도 표시도 안날것이다. 그렇게 부대를 이탈해서 천신만고 끝에 주문진 부모님에게로 가니 우리 가족은 방공호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효자가 되려고 그랬는지 주문진에 와서 3일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 서 내손으로 장례를 치러드리고 4식구가 서림 앞 벽실령을 넘어 서림 집에 돌아왔지만 집은 불에 타 다 없어져 당장 살 일이 막막하였다.
나는 그때 마침 매형이 생기면서 그와 토막집을 두 칸을 짓고 살고 있다가, 22세 때 우리 윗마을 처녀와 혼례를 치루고 다시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 훈련을 마치고 경기도 연천 대광리에서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