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송천리 탁홍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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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57회 작성일 2018-03-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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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홍영 (남, 76세, 서면 송천리)
■ 면담일 : 2017. 6. 21
이 글은 고 탁상호씨의 자제분인 탁홍영씨가 아버님이 6 ․ 25전쟁을 전후하여 체험한 기록물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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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암령을 넘어 월남했다.


내 나이가 26세인 1948년 나는 서면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 당원의 감시가 심한 북한사회에서는 살기가 힘들어 월남하기로 결심 아버지께 의논하고 서면 새덕 골짜기를 택하여 월남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길은 내가 이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잘 아는 길이다. 동생 상진에게 두 살배기 애기인 정자를 산 중턱까지 업어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상진이는 중간지점인 새덕까지 가서는 무서워 더 못가겠다고 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망대바우를 지나 북암령을 넘으면 설피밭(진동리) 삼거리이다. 때는 겨울이고 그것도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는 깊은 산길에 눈까지 쌓인 경사가 가파른 비탈길을 오른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만 우리 부부는 죽을힘을 다해 두 살 된 애기까지 업고 눈길을 헤치고 9부 능선을 돌아 북암령을 넘어 설피밭까지 가서는 지처서 더는 못 가 주저앉게 되었다.
마침 아래 동네에는 화전민들이 몇 집 있어 그 집을 향해 “사람 살려!”를 연발하며 도움을 청하였다. 어두운 밤 동네사람 몇 명이 설피를 신고 횃불을 들고 눈을 헤치고 마중을 나왔다.
그들의 도움으로 화전민 장씨 집에 도착하여 발이 얼어서 감각이 없어진 발을 콩 자루에 넣어 발을 녹이고 있는 동안 그 집에서 급히 조밥을 해 주어 허기를 면하게 되었다.
이튿날 방동리 처갓집에 갔다. 그러나 치안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매를 때리며 고문을 하며 북한 첩자가 아니냐고 실토하라는 것 이었다.
마침 장인인 김우성이 방동 마을에서 양조장과 생필품 가게를 하여 큰부자로 살고 있어서 치안대원들을 설득하고 각서를 쓰고 보증을 서 주셔서 쉽게 풀려난 후, 방동리에서 한 2개월 동안 생활을 하다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녹리에 장인이 땅 1만 5천 평을 사 놓은 게 있어 그 중 8천평을 집사람에게 주어 농사를 지으러 가서 고구마, 옥수수를 심고 2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 피란을 나가서 떨어진 고무신 때우는 일을 했다.


1950년 6 ․ 25전쟁이 발발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마침 장인은 공주군 사곡면 동해리 삼박골에 토지 2천 평을 구입해 두었다. 정감록을 숭상하던 장인(김우성)은 계룡산이 피란처라고 믿고 토지를 사 두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공주에 나가 있었다.
나는 공주 무성산 골짜기 용목동에 들어가 통나무로 귀틀집을 지었는데 일어서면 머리가 닿아 구부리고 있을 정도로 낮았으며, 집이라야 벽 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통나무집에서 애기까지 낳았는데 이불도 부족하고 찬바람이 들어와 다른 애들이 서로 작은 이불을 잡아당기며 잠을 자는 바람에 갓난 애기는 그만 얼어 죽었다.
생활이 어려우니 애기 낳고도 산후 관리를 못해 아내는 얼굴이 퉁퉁 부어 눈을 뜰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지만 처사촌 동생인 김병국이 노동일을 하여 미역과 쌀 몇 되씩 사다주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또 장모가 공주군 유구장에 갔다 오면서 애들에게 줄 과자 등 먹을 것을 사다주어 아이들은 외할머니를 늘 손곱아 기다렸다. 전쟁이 한창이라 의용군이나 짐꾼이 많이 필요한 때라 경찰은 자주 젊은이들을 잡으러 왔다. 그러나 나는 가족이 있어 잡혀가면 식구 생계가 어려워 갈수 없었다.
그래서 방바닥에 굴을 파고 판자로 덮고 자리를 깔고 농짝을 올려놓고 그 속에 숨을 공간을 만들어 놓고, 평상시 아랫마을 사람들이 보초를 서면서 머리를 긁으면 경찰이 왔다는 표시로 신호를 주면 굴속에 들어가 숨어 지내게 되다보니 늘 긴장하며 아랫마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면서 살아야 했다.
여름에는 옥수수, 감자, 콩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이웃에 사는 한용덕이란 동료와 고무신 때우기 장수를 했다. 장판을 돌며 또는 집집마다 다니며 “떨어진 고무신 때우세요!”“떨어진 고무신 때우세요!”를 연발하며 헌신을 모아오면 나는 고무풀로 고무신을 때우는데 기술이 별로 없다보니 잘 붙지 않을 때에는 여러 번 항의를 받아 그냥 돌려주기도 했다.



◆ 휴전 후 두고 간 딸이 엄마를 못 알아봐 한동안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송아지를 구입하여 키워 우차를 만들어 땔나무를 하여 장사를 하였고, 또 가을이 되면 마을사람들은 디딜방아와 연자방아로 벼 방아를 찧었는데, 마침 장인이 얀마 라고 하는 4마력짜리 일제 원동기를 사주어 마을마다 싣고 다니며 벼 방아를 찧어주었다.
여름에는 보리방아도 찧었고 제분기를 직접 제작하여 밀가루 방아도 찧어 주다보니 살림도 풍족해지자 살림살이까지 우차에 싣고 딸을 지게 위에 태우고 1개월에 1회 정도 이사를 다니기도 하면서 돈을 벌었다. 또 집집마다 3~5대씩 직조기를 놓고 비단공장을 하였는데 목재 수요가 많아져 원동기로 목재 제재소를 세워 직조기에 쓸 목재를 공급하였다.
그러다가 사업의 규모가 조금 커지자 산판 허가를 받아 제재소를 차려 목수 길씨와 모씨를 고용하여 규격이 4자8치×2자2치 짜리 인 문짝을 며칠 동안 만들어 장날이면 4장씩 지고 공주군 사곡면 유구장에 나가 팔았다. 전쟁 후라서 집이 불에 타거나 파괴되어 곳곳에서 집 건축 붐이 일어 문짝이 잘 팔렸다.
휴전이 된 후 1955년 봄에 고향 송천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마을 사람들이 장례를 치려주었고, 동생은 북한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그리고 두고 간 딸 화자는 그간 키가 크지도 못 했고 옷도 남루하게 입고 있었으며 엄마를 알아보지 못 하고 할머니 뒤에 숨으며 할머니를 엄마처럼 따르며 한동안 할머니 품에서 자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