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전진리 이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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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26회 작성일 2018-02-2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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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원 (남, 81세, 강현면 전진리)
■ 면담일 : 2015.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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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에 일가친척이 있으면 소년단원 가입은 안 되었다.


6 ․ 25한국전쟁 2년 전 월남했다. 왜 월남했느냐하면 인민학교 학생들도소년단이 있는데 아무나 단원을 못한다. 남한에 일가친척이나 월남가족은 가입이 제한되었다. 단원에 들지 못한 아이는 소년단원과는 같이 놀지도 못했다. 또 말을 잘못하면 고발하기 때문에, 또 비판을 받아야하니 같이 놀 수 도 없었다.
나는 제일 큰형이 월남하여 소년단에 가입하지 못하여 불만이 많았다.
북한은 배급제도인데 형님은 세포위원장의 지시를 받고 무엇이든지 해야하기 때문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배를 타고 38°선을 넘어 현남면 동산리에서 어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1948년 1월 어느 날 새벽 3시 38경계선을 지키는 군인들이 자고있는 듯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38°선 다리 밑 도랑을 따라 기어들어가니 마침 도랑물이 얼어 가기가 어렵지 않았다.
날이 새자 인구에 도착하여 살금살금 숨어서 다니다가 할아버지 한분을 만나서 동산리를 물으니“너 북쪽에서 오는구나.”하셨다.“저기 이북에서 온 사람이 있는데 가 볼래.”하고 데려다 주어 형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노인은 전진리에서 월남한 정연호 집 자리에서 살던 할아버지였는데 “네가 어떻게 왔니 너의 형이 여기 있어”하신다. 그때 내 나이가 17세였다.



◆ 미군인지 소련군인지 분간을 못해 숨어 다녔다.


인구 정거장에서 미군을 보았는데 북쪽에서 소련 사람은 보아서 그런지 미군인지 소련 사람인지 분간을 못하여 겁이 나서 숨어 다녔다. 형님 집에서 1년간 놀다가 학교에 들어갔다. 북에서의 학교생활과는 엄청 편했다. 감시하는 사람도 없고 잘못하면 비판을 하는 시간도 없다고 자유스러웠다.
나만 나이가 많고 다른 아이들은 3~4살이 적었다. 인구초등학교 26회로 졸업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아침에 꽝! 꽝! 하고 대포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내가 살던 곳과 38°선은 10리 정도 떨어져 있어 구경나갔다. 북한에서 전쟁을 일으켰으니 피란가라고 한다. 월남가족은 제일 먼저 죽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쪽으로 피란을 나가야만 했다.
강릉을 지나 삽당령을 넘어 정선으로 갔다. 바다 쪽은 인민군이 상륙하여 바닷가는 가지 못한다고 사람들이 줄지어 피란길을 걷는다. 이고 지고 아이들까지 자기에 맞게 짐을 지고 간다. 피란을 나가다가 중간에 작은 형을 만났는데 형은 국군 8사단에 입대하여 30여명의 부대원들과 후퇴하는 중이라고 한다.
군인들도 산중으로만 걸어서 잘 걷지 못했다. 엄마가 베보자기에 밥을 싸서 형 일행에게 먹였다. 형이 떠나고 엄마가 병이 났다. 그래도 앓아누울 수가 없다. 동서남북 방향도 모른다. 그저 다른 피란민들과 같이 걸어만 갔다.
밤이 되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고 일어나 걷고 배고프면 집집마다 다니며 동냥을 해서 먹었다. 길을 가다가 감자밭을 만나면 생감자를 파먹으며 가다가 강릉에서 왔다는 태민이와 태진이를 만나 나이가 같은 또래라 같이 밥을 얻어먹으며 친 형제처럼 다녔다.
부산 동래 피란민 수용소까지 가니 피란민들은 떼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밥을 주는데 그릇도 없어 주먹밥이고 잠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포대기 하나 들고 다니다 잠을 잤다.



◆ 배에 풍(돛)을 달고 울진까지 피란을 갔다.


1950년 10월 국군이 38°선을 수복하였다고 소문이 나니 사람들이 떼 지어 국군 뒤를 따라 고향으로 떠난다. 대포소리가 나면 멈추고 조용하면 고향을 향해 걷고 새벽이면 또 걷고 낮에는 배고프면 밥 얻어먹으러 나갔다.
강릉 아이들과 자루를 매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쌀을 달라고 하면 보리쌀을 조금씩 주었다. 강릉까지 와서 태민이 형제는 떨어지고 나는 동산까지 왔다. 서로 살기 바쁘니 태민이 형제는 그 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아쉽다.
동산에서 예전처럼 살고 있었는데 중공군이 참전하여 1 ․ 4후퇴가 일어났다. 인민군이 겨울에 나오면 사용한다고 집을 모두 태우는데 우리 집을 태울 때 아버지가 나오시지 않으니 국군이 아버지를 끌어내고 불을 질렀다.
아버지를 모시고 다시 피란을 가지 않으면 또 죽인다고 하여 배에 풍(돛)을 달고 울진까지 갔다. 전쟁 중에 장질부사 전염병이 돌았는데 형수가 걸려 미군부대 아스피린이 직방이라고 해서 구해 먹고 났다가 재발되어 사망하였다.
큰형이 강릉 지필[강릉시 강동면 심곡리의 옛 지명]에서 사천까지 1인당 500원씩 받고 피란민을 배에 태워 주었다. 아버지도 피란 중에 병을 얻어 낫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가매장했다가 후에 장례를 치러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