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둔전리 추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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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40회 작성일 2018-02-2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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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종삼 (남, 81세, 강현면 둔전리) 호림부대 유족회 총무국장
■ 면담일 : 2017.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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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가 없어 우차 십여 대로 대포와 포탄을 하광정로 실어 냈다.


1950년 초 간곡리 최종옥 아저씨가 우차를 몰고 부역을 갔다 와서 외삼촌과 대화하는 걸 들었는데 머지않아 전쟁이 날 것 같다고 했다. 양양 연창역에 가니까 각 면에서 우차가 몇 십대씩 모여 왔는데 기차에서 내린대포, 포탄, 등 전쟁 물자를 가득 실어 왔더라고 했다.
인민군들이 그 전쟁에 쓸 물자를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일주일 동안 하광정, 중광정에 실어냈다고 했는데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6세부터 서당에 다니다 늦게 인민학교 3학년에 들어갔다. 서당에서 천자문 띠고, 명심보감, 동몽선습, 조선역사 등등 기자 조선부터 한일합방까지의 역사내용을 배우고 학교에 갔다.
학교 통학반장인 중학생은 구호를 부르며 학교에 간다. 구호는 김구, 이승만 타도하자! 미국 양코재비 몰아내자.!를 끝내고 와서는 숙제를 해야 한다.
그리고 낯선 사람을 만나면 학교나 인민위원회에 가서 신고를 해야 했다. 학교에선“용감한 인민군이 남한 괴뢰군을 쳐부수고 대구까지 갔다”고 매일 선전에 열을 올렸다. 곧 낙동강을 건너 부산까지 진격하고 통일을 한다고 장담했다.



◆ 노인과 애들만 남기고 어른들 70%가 이북으로 들어간 사연


미군의 참전으로 비행기가 고무신짝 같은 모양을 하고 왔다는 미군 쌕쌕이 전투기가 와서는 폭격을 하고 갔다. 회룡학교 밤나무에서 종을 치면 방공호에 피신을 한다. 사람들이 낙동강에는 시체가 다리 놓고도 남을 정도로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맥아더장군의 지휘 하에 유엔군이 인천상육작전으로 인민군이 밀리니 손양, 서면의 세포위원장, 민청원 들이 피란가라고 다녔다.
사람들이 북으로 가지 않으려고 둔전리로 모였다. 낮에는 산에 가서 숨어있고 밤에는 마을로 내려와 모인 사람들로 바글바글 거렸다. 아버지 외사촌이 교사인데 북으로 가려는 걸 아버지가 못 가게 하였다.
그러나 한집에 노인과 10세미만 애들만 남고 70%는 이북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선생님들도 속으로는 공산당을 싫어했다. 추교직은 교사로 민주당이었는데 상평 김해김씨에게 장가가서 부인을 찾으러 북으로 갔다가 일주일 만에 혼자 돌아오기도 했다.



◆ 호림부대 첩자를 했다고 한사람이 말하면 모두 작대기로 때렸다.


유엔군과 국군이 반격을 하자 인민군을 북으로 후퇴를 할 무렵 영혈사에 주둔하고 있던 수도사단 기갑연대 정보과에서 간곡리 외삼촌 벌 되는 최○○ 농민위원장을 체포하여 죽인다고 하니 엄마가 펄펄뛰며 사정사정하여 살려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두 번째 인민군이 나왔을 때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회룡리 최○○부친, 박○○씨의 딸인 박○○을 붙잡아다 인민재판을 하고 물푸레 작대기로 집안친척을 포함한 동네사람들이 저 아무개는 호림부대 첩자를 했다고 하자 한사람이 때리면 모두 작대기로 때렸다.
그 인민위원장 부인은 피란을 가지 않았다가 정보과에서 잡아다 조사를 받고 왔는데 저년들이 고발하여 영혈사 정보과에 잡혀갔다 왔다고 분풀이를 한 것이다.



◆ 어머니는 일주일동안 은신처를 바꾸어 다녀서 살았다.


당시 내무서 사람들은 면장 집 방공호를 내무서가 임시 사용하며 가두고 끈으로 묶어두고 사람들을 작대기로 때리기도 하였다. 그 방공호에 남편이 호림부대대원이라는 죄명으로 저의 어머니와 그리고 최○○ 부인이 감금되어 항구에 밥을 해서 엄마에게 밥을 주고 오다가 사교리 영광정 앞논둑길을 오는데 기관총 소리가 정신없이 나서 논두렁에 엎드려서 탄피가 막 떨어지는걸 보며 갔다.
4일째 어머니가 감금되어있는 방공호 사립문 열고 밥을 드리려고 갔다가 인민군이 불 폭탄을 맞아 화상을 입어 온몸에 붕대 같은 것을 감아놓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국방군이 양양 월리까지 들어왔으니 내일이면 여기로 들어온다고 하면서 우리는 다시 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보니 다행스럽게도 방공호를 지키는 놈은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산 쪽 방향으로 올라갔다가 석교리 채마정 쪽으로 건너가 집으로 올라와서 둔전리 최○○ 집과 명성이 집 사이의 뒤 산비탈 고양이바위굴에 송아리 단을 막고 어머니를 숨겨드리고, 저녁 때 밥을 싸가지고 어머니에게 주고 내려오는데 뒤에서 인민군이 내려오기에 웅덩이에 빠져 얼굴만 내놓고 숨어 있다가 나와 방공호를 찾아 엄마의 은신처를 변경시켰다.
다음날 밤 10시경 큰 솔 골과 작은골 지나 올라가 소리를 지르니 어머니가 응답을 하여 가까이 가보니 얼굴이 붓고 멍이 들어 한참동안 붙잡고 울었다. 그리고 이창국 왕고모부 방공호에 옮겨 숨겼다가 5일 지난 후 둔전리 폭포 밑에 덕을 매고 은신처를 만들어 놓고 은신하고 있다가 국군이들어오자 어머니는 통곡하였다.
어머니는 얼마 전 위급에 처한 최○○농민위원장을 살려 주었더니 서로가 서로를 살려준 셈이다. 당시 인민군들은 외할머니를 앞세우고 어머니를 찾아내라고 다녔지만 1주일동안 은신처를 바꾸면서 숨어 다니는 노력 끝에 무사하셨지만, 우리 어머니와 같이 내무서 방공호에 감금되었던 최○○ 어머니는 그 이튿날로 끌고 갔다.
우리 어머니는 나이 30에 남편이 호림부대 대원이라고 혹독하게 지냈다. 그 후 어머니는 많은 고생을 하시다 목에 핏덩어리가 걸려 1962년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호림부대는 1949년 전국의 청년운동 동지들이 결성하여 동해지구에서 유격대 활동을 한 부대이다. 대원 209명중 생존자는 함병주 외 37명인데, 함병주는 나중에 갈 곳이 없어 상복리의 유가족들이 1개월씩 돌아가며 보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