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남문4리 김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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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52회 작성일 2018-03-1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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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여, 90세, 양양읍 남문4리)
■ 면담일 : 2015.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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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케가 잡아간다는 소문에 남자만 마땅하면 빨리 시집보내려 했다.


고성 용암리에서 태어났는데 친정아버지가 아들 낳기를 기원하여 남자 이름인 준기로 지었는데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외동딸로 자랐다.
나는 이북 지리를 잘 알고 있어 학교에 다니고자 진남포에 삼촌과 같이 살았는데 삼촌은 일철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젊은 청년들은 보국대(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기 위하여 만든 노무대)에 나갔는데 우리삼촌은 보국대에 가지 않고 일본 일철회사에 다녔다.
춘천에는 정경부인학교가 있었는데 일본 아가씨들은 시집가기 전에 다니는 필수 코스였다. 이 학교에선 시집가서 지켜야 할 예절과 하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곳이다. 과목은 옷 만들기, 예절, 음식 만들기 등을 2년 동안 다 배우고난 다음 각 부락에 다니면서 아가씨들을 가르치러 다닌다.
나는 이 학교를 마치고 부락(마을)에 나가지 않고 도청에 2개월을 근무하다가 해방되어 집에 와 있었다. 그때는 소련군인이 잡아간다는 소문이 나서 남자만 마땅하면 빨리 중매로 시집보내려 했다.
전 양양읍장을 했던 함동기 고모가 중매를 하여 22세에 토성면 용암리에서 청곡2리 비석거리로 25세인 남편에게 시집 왔다. 시아버님은 춘천고급중학교 1회로 졸업하신 분으로 나중에 양양읍장을 지내셨다. 시집 올때 친정 부모님은 소문이 나게 혼수를 트럭이 넘치도록 해 주셨다. 남편은 철도국에 다니고 있었고 시조부모도 계시는 대식구가 사는 가정이었다.
내가 25살이 되었을 때 남편은 1950년 인민군에 끌려갔다. 그때 아들을 둘을 낳았다.



◆ 앳되어 보이는 국군을 김칫독에 숨겨 주었다.


1950년 6 ․ 25전쟁이 나서 시어른들과 피란을 갔는데 강릉의 빈집이 누구의 집인지도 모르고 주인처럼 들어가서 살았다. 식량이 떨어져 시아버님이 옆집에 피란 올 때 끌고 온 소를 주고 쌀 4말을 바꾸어 식량으로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에 국군이란 사람이 집으로 뛰어들어 와 살려달라고 하여 애원하여 아버님이 김치 독 속에 숨겨주었다. 곧 인민군이 찾아와 “지금 국방군이 튀었는데 여기 안 들어 왔소.”한다. 숨이 가뿐 순간이었다. 인민군들이 간 후 아버님은 국군에게 물을 먹이고 물으니,“집이 정동진인데 장○○입니다.”하여 보니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튿날 아침밥을 해 먹이고 보냈다. 우리가족은 강릉 사천리 언덕에 있는 빈집에서 한 달 가량 살다 돌아왔는데 또 피란을 떠났다.



◆ 애를 업은 포대기가 타는 줄도 모르고 불을 쬐었다.


인구에 피란 갔을 때 학교가 불타고 있다. 누가 왜 방화를 했는지 묻는 사람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날씨가 추워 애를 업고 불을 쬐는데 애기를 업은 포대기가 타는 줄도 모르고 불을 쬐기도 하였다.
연곡 다리 근처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군인들이 퍽퍽하고 쓰러졌다.
우리는 전쟁을 피하려고 다리 밑까지 갔는데 총에 맞아 쓰러진 여학생의 가슴속에 품고 있던 사진(학생증)을 꺼내 흔들며 좋아하던 그들의 모습은 사람 같지 않았다. 이리 쫓기다 저리 쫓기다가 사천에 있는 먼저 살던 집에 가서 살았다.
어느 날 산에 나무하러 갔는데 총에 맞은 사람이 살려 달라고 애원한다.
시어머니는 어디 군인인지도 모르니 가면 안 된다 고 하여 가까이 가지 않고 도망치듯 왔는데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된다. 우리도 거지 생활이다. 애기 업고 다니며 나무하고 식량 얻어다 나물(풀)과 섞어 끓여 먹는 생활을 이어갔고, 그러다 애기는 열이 나고 앓더니 얼마 있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 남편이 국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왔다.


막내 시어머니도 막내 시아버님이 국군에 나갔기 때문에 혼자였는데 같이 강릉에 다니며 장사를 했다. 3일에 한번정도 강릉에 가야 하는데 아이들 돌볼 사이가 없어 1년을 이렇게 다니다 강릉에 집을 얻어놓고 시할머니를 모셔다 이이들 돌보라하시고 하고 막내 시어머니와 조카며느리가 장사를 했다.
정신없이 장사를 하는데 포로수용소에서 편지가 왔다. 남편이 국군에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남편이 포로석방으로 집에 왔을 때 땅을 구입, 형편없는 초가집을 사서 헐고 2층집으로 올리고 가게를 만들어 장사를 늘려 나갔다. 그 다음은 철물점을 하였는데 시장에서 떨어져 있어서 장날이면 물건을 시장까지 끌어내어 장마당에 펼쳐놓고 팔다가 집을 사서 다시 짓고 금강상회 간판을 달았다.
아들만 넷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