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시기 양양군민이 겪은 이야기 Ⅱ

조산리 최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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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34회 작성일 2018-03-1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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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회 (남, 78세, 양양읍 조산리)
전 양양농업협동조합장
■ 면담일 : 201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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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군청이 복골로 이동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조산인민학교 게시판에는 지도를 놓고 매일 인민군이 남쪽으로 침략한 결과를 써 붙여놓고 학생들은 그 앞에 모여 환호를 불렀다. 얼마 후 인민군이 대구까지 점령했을 때는 곧 통일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B29전투기가 폭격이 심해지고 소문이 이상하게 날 때는 게시판에 승전 지도를 그려 넣지 않았다.
B29폭격기가 양양광업소를 연일 폭격을 하였다. 그 다음날 학교에 갔는데 그 비행기가 스치듯 지나갔는데 학생들은 놀라 뒷산으로 도주하여 각자 집으로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고 갔었고, 그 후 학교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누나는 19세, 형은 16세였는데 미군이 처 들어오면 모두 겁탈한다고 소문이 나서 아버지는 누나와 형을 평양 공장으로 보냈는데 그것이 영영 이산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소를 몰고 삼포 큰댁 아주머니 친정으로 피란을 가다가 인흥 나무 밑에서 1박을 하고 갔다.
1951년 속초로 피란을 갔는데 밤에 총소리가 나서 산위를 보니 국군과 인민군이 전쟁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나가보니 국군은 쫓겨 가고 인민군이 득실거렸다. 이 때 양양군청은 복골에 이동해 있었다.



◆ 재산을 몰수당한 집은 흰 패가 되었다.


농민은 사상이 따로 없다. 남북이 어디가 좋은지 모르고 재산을 몰수당한 집은 흰 패가 되었고 부자로 살던 사람은 월남하거나 박해를 받고 살았다. 그리고 피란을 안가면 이상하게 의심을 받아 안갈 수가 없었다.
월남한 사람들은 남한에 와서도 열심히 노력하여 부자로 사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북한 돈을 보관하고 있다가 박해를 받은 사람도 있었고, 또 북한에 있는 남편과 자식을 만나기 위해 북한으로 갔는데 후에 불행한 일을 당하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